순수 박물관 1 민음사 모던 클래식 27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 민음사 / 2010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오르한 파묵의 작품은 세계 문학과 다른 이질감을 느끼게 하지만, 그러면서도 이상하게 친근감을 주곤 한다. 아무래도 오르한 파묵의 작품에서 펼쳐지는 공간적 배경이 터키의 수도 이스탄불이라는 점 때문인 것 같다.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지리적 요충지이자 동서양 문화의 충돌지점으로서의 이스탄불은 오르한 파묵의 모든 작품을 관통하고 있는 주제이기도 하다. [내이름은 빨강]에서 오스만 투르크 족의 전통 설화와 페르시안 문학과 서구문명과의 충돌에서 빚어지는 문화적 갈등을 로맨스와 추리로 풀어내는 솜씨에 반해 오르한 파묵의 책을 찾아 읽게 되었다. 《순수박물관》은 오르한 파묵이 노벨상 수상 이후 첫 발표한 책으로 작품을 이루고 있는 주요 뼈대는 ‘남녀간의 사랑’이야기이지만, 남녀간의 사랑을 통해 서구 성문화와 충돌하게 된 이슬람 사회의 혼란을 작가 특유의 서사로 들려주고 있다.

 

1975년, 이스탄불에서 아쉬울 것 하나 없는 남자 케말은 미국에서 경영학을 공부하고 돌아온 재원이다. 아버지의 회사에서 본부장으로 일하면서  스무 살이나 서른 살 정도 나이가 많은 사람들을 부하직원으로 둔 케말은 상류층의 신분으로  ‘공무원의 딸’인 완벽한 상류여자 시벨과 결혼을 앞두고 있다. 시벨은 그 자체로 기품있고 상류층에 어울리는 우아한 여자로 그려진다. 가난한 여성이 결혼에 대한 선택폭이 좁은데다가 가난한 노동자계급의 여성들의 불행들을 잘 알고 있는 케말은 혼전 성관계에 대하여 보수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다. 혼전 성관계를 맺는 것은 곧 결혼이라는 의미이기에 시벨과의 결혼을 한번도 의심한 적이 없는 케말은 부와 명예, 아름다운 약혼자까지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을 만끽한다. 적어도 시벨에게 가방선물을 하기 위해 들린 ‘세나이의 가게’에서 퓌순을 만나게 전까지는 그랬다. 가게에서 먼 친척뻘인 어린 퓌순과 우연히 재회 한 후,  어머니가 투자목적으로 사놓았던 멜하메트 아파트를 둘만의 은밀한 밀회장소로 사용한다. 둘의 사랑이 격정에 이를수록 퓌순과 케말의 사랑이 비극을 암시하는 이야기들이 시작된다. 세나이의 가게에 자주 들렸던 이스탄불의 한 여성이 가난하단 이유로 남성에게 버림받은 이야기라든지 케말의 돈많은 친구 자임의 바람둥이 기질과 쌍벽을 이루는 시벨의 여자친구들은 서양의 개방적인 성문화에 열렬한 지지를 보내면서도 혼전 순결을 여성에게 강요하는 1970년대의 터키의 성정체성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혼전 성관계를 하였다는 이유로 평생 결혼하지 못한 채 수많은 남자들의 노리개로 전락한 여인의 불행과 아버지가 젊은 날 너무 사랑했던 애인의 비극적인 죽음은 모두 '퓌순'의 미래를 예견해주는 장치이다. 시벨과의 아름다운, 상류층다운 사치스러운 약혼식이 끝난 후 퓌순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고, 케말에게서 퓌순의 사랑을 듣게 된 시벨도 떠나버린다.    

 

 

한 여자와 만나 44일 동안 사랑하고,

339일 동안 그녀를 찾아 헤맸으며,

2864일 동안 그녀를 바라본 한 남자의

30년에 걸친 처절하고 지독한 사랑과 집착.

 

그러나, 퓌순을 다시 만났을때는 이미 퓌순은 결혼한 상태였고 케말은 퓌순을 만날 수 있다는 것에 안도하며 퓌순의 영화제작자라는 명분으로 퓌순곁을 맴돈다. 8년을 같은 자리에 앉아 퓌순만을 해바라기 하며 퓌순이 버린 담배꽁초까지 소중하게 보관하는 케말. 이렇게 해서 수집된 물건들은 그대로 순수박물관에 전시된다. 

 

이 작품은 떠나버린 퓌순을 위해서 퓌순과 함께 한 모든 물건들을 '멜하메트' 아파트를 박물관으로 개조하여 전시 보관하게 되면서 시작되는 이야기이다. 케말이 죽어가면서 부탁한 퓌순의 사랑이야기를 작가에게 의뢰하였는데 이 소설가의 이름이 바로 '오르한 파묵'이다.(물론 픽션) 이슬람 문화가 지배적인 터키에서 서구의 자유연애 사상을 경험한 젊은이들이 보수적인 터키에서 겪는 문화충돌을 섬세하게 담아내고 있으며 그 안에서 사랑이 지배층과 피지배층이라는 계급의 소유물로 변질되는 사회적 분위기로 인해 불행한 터키여성들의 삶을 대변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가난하고 어린 퓌순을 첫 눈에 반해 애인으로 삼고는 시벨과 약혼하기 까지의 케말은 사랑에 대하여 보편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여성으로서의 퓌순은 가난한 집안의 여성이 혼전 성관계로 인한 사회적 부담을 끝까지 떨쳐내지 못하는 것으로 불행해진다. 70년대의 터키는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의 갈등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었고, 작품에서 보여지는 젊은 세대들이 혼전 성관계에 대한 인식을 케말과 퓌순의 사랑이야기와 직조하여 짜낸 박물관은 욕망과 문화의 혼종성이 혼재되어 있는 시대에 한 여자를 순수하게 사랑하고 싶었던 한 남자의 지독한 집착이 만들어낸 '순수의 공간'이다. 한 여자를 향한  남자의 순수한 사랑이 살아 숨쉬는 곳, 그곳이 바로 순수박물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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