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인 오늘의 일본문학 6
요시다 슈이치 지음, 이영미 옮김 / 은행나무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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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봉석의 [하드보일드는 나의 힘]에서 《악인》의 칼럼을 읽고 이 책은 꼭 읽어봐야겠다고 접어 놓고 이제서야 읽기 시작하였다. 영화로도 평이 좋은 작품이라 기대가 무척 컸던 작품인데 킬링타임용처럼 가벼운 책이 아닌 인간 본성에 대한 심도깊은 심리 스릴러라 조금 의외라는 생각을 하면서 읽었다. 이야기는 두 가지의 큰 축으로 나누어지는데 한 가지 축은 요시노 살인사건에 관한 이야기가 전개되며 다른 한가지의 축은 유이치와 미쓰요의 사랑이야기이다.  

 

고속도로 개통으로 오래 전 버려진 미쓰세 고갯길에서 나가사키 교외에 사는 젊은 토목공 유이치에게 살해당한 요시노의 이야기 부터 시작하면,  살해당한  이시바노 가家의 외동딸인 요시노는 보험설계사로 회사에서 마련해준 기숙사에서 머물고 있다. 일주일에 한번 부모님을 만나러 가고 외동딸처럼 제멋대로고 자유분방한 성격이다. 외동딸은 특히 부모에게는 한없이 소중한 딸이었지만, 이제 막 사회초년생인 요시노는 만남사이트에서 문자로 남자를 사귀고 금품을 요구하기도 하는 영악한 아마추어 창녀였다.  같은 기숙사에서 친한 동료 마코와 사리에게 늘 남자들과의 경험담을 자랑스럽게 떠벌곤 하던 그녀는 우연히 마주친 여관집 도련님 '마스오 게이고'에게 한 눈에 반한다. 이후 과시욕으로 만남사이트에서 만나는 다른 남자들을 모두 마스오로 둔갑시킨다. 마코와 사리는 요시노와 데이트하는 남성들을 모두 '마스오'로 알게 된다. 

 

나가사키의 토목공 유이치는 어려서 부모님께 버림받고 할머니와 할아버지와 살고 있다. 거동이 불편한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친자식처럼 손자 유이치를 키우지만, 유이치는 점점 외로운 아이로 자란다. 또래 보다 말수가 유난히 적었던 유이치는 과거 엄마에게 버림받은 기억이 트라우마로 남겨져 있어서인지 타인과 감정 표현이 무척 서툴었다. 성장하면서 사랑이라는 감정에도 서툴었던 유이치는 사랑은 곧  SEX였다. 타인과의 공감이나 감정을 나누어본 적이 없기에 그저 일방통행이었던 유이치의 어리숙한 감정표현들은 여자들에게 불쾌감을 준다. 만남사이트에서 만난 요시노 역시도 그런 유이치를 원나잇 상대로만 대한다. 이때까지 유이치는 천박하고 가벼운 사람에 지나지 않는다. 타인에 대한 이해나 배려와 같은 사회적 관계 맺기가 어려운 사람으로 보여진다. 뿐만아니라 요시노가 만난 남자들 중 말수가 가장 적고 노동으로 불거져 나온 힘줄은 사치스럽고 허영심 가득한 요시노에게는 천박함의 상징으로 비춰지고  반면에 부잣집 도련님이며 대학생이었던 마스오의 뽀얀 얼굴과 부드러운 손은 요시노의 탐욕과 숭배의 대상이 되기에 충분하였다.  

 

우연히도 너무도 우연히 유이치를 만나는 날, 같은 장소에서 마스오를 만난 요시노는 나카사키에서 요시노를 만나러 온 유이치를 따돌리고 마스오를 따라간다. 그렇게 떠나가는 요시노는 오래 전 엄마가 선착장에 자신을 버려두고 떠나간 '그날'을 떠올리게 하고, 분노로 마스오와 요시노를 따라간다. 그리고 그날 밤, 요시노는 살해된다.

 

지금까지 외롭다고 느껴본 적은 없었다. 외롭다는 게 어떤 건지 몰랐다. 그런데 그날 밤을 고비로 이제는 외로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외롭다는 것은 누구가 자기 이야기를 들어주길 간절히 바라는 기분일지도 모른다고 유이치는 생각했다. 지금까지는 누군가에게 하고 싶은 얘기 같은 건 없었다. 그러나 지금 자기에게는 그런 이야기가 있다. 그 이야기를 할 수 있는 누군가를 만나고 싶었다.

 

 

이후, 유이치는 만남사이트에서 또 다른 여성 미쓰요를 만나게 되는데, 올해 서른 살이 된 쌍둥이 자매와 한 아파트에 살면서 외로운 삶을 위태롭게 이어가고 있던 미쓰요는 유이치에게 처음으로 사랑이라는 감정을 알게 해주는 사람이 된다. 사랑을 섹스로 이해했던 유이치는 미쓰요로부터 부모에게도 받아보지 못한 사랑을 배우게 되고, 순수하고 아름다운 사랑에 눈을 뜨게 되며 살인범으로 지명수배가 된 상태에서 미쓰이와의 사랑을 지키기 위해 희생을 감행하는데...

 

이야기의 시작부터 범인을 밝히고 써나갔기에 첫 시작부터 마음속으로는 유이치를 단죄한 채 시작하였다. 아마도 내 마음에서도 유이치는 살인범이니 나쁜 사람 내지 사이코패쓰일 것이라는 단죄말이다. 대부분 '악인'에 대하여 우리가 늘 생각하는 '단죄'처럼 ........ 그러나, 사람을 죽인 유이치보다 더한 악인의 모습은 오히려 피부가 뽀얗고 하얀 얼굴을 한 마스오였다. 요시노를 미쓰이 고개에 버려두고 와도 일말의 동정은커녕 친구들에게 자랑삼아 험담을 일삼고 (요시노의 죽음이 자신에게도 책임이 있었음에도) 요시노 아버지를 향한 경멸과 조소는 더욱 마스오를 더 악하게 만든다. 책 후반부로 들어갈 수록 악인에 대한 상想은 유이치에서 마스오로 변해간다. 거기에  유이치와 미쓰이와의 사랑이 천박함을 넘어 순수하고 진실된 사랑으로 그려짐에 따라 유이치에 대한 단죄는 한 인간으로서의 사랑과 이해로 차차 희석되어 가며 내면에서 알 수 없는 변화가 일어난다.

눈 내리는 거리를 보고 있자니, 누군가를 기억한다는 것이 저 내리는 눈처럼 얼마나 허무한 일인가싶다. 태양이 얼굴을 비추면 다 녹아 없어질 눈조차도 세상을 다 덮을 기세로 맹렬하게 퍼붓듯이 누구나 현재가 전부인 것 같은 삶을 살지만, 내리는 눈처럼 자취도 없이 사라지는 것이 삶의 본질이다. 그럼에도  누구나 현재만을 기억한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이 전부인 것처럼 사람을 판단하고 단죄하고 평가한다.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잔인한 일이지 모르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 사람과의 만남이 모두 현재에 머물러있듯이 우리는 현재만을 기억하고 왜곡하고 상상한다. 그러나 누군가를 안다는 것은 현재의 잔상을 기억하는 의미일 뿐이다. 누군가를 안다는 것은 이해한다는 말이 아닌 그저 현재를 기억한다는 말이 된다. 그렇기에 당신을 이해한다는 말처럼 불가사의한 말은 없는 것이다. 그러니 단죄하지 말 것, 그러나 사랑할 것. ! 

우리는 누구나 일생에 한 번쯤은 사랑하는 사람이 불행에 처한 걸 보고 이렇게 기도합니다.

 `기꺼이 돕겠습니다. 주님.’ 그러나 필요할 때,

사실 우리는 가장 가까운 사람을 거의 돕지 못합니다.

 무엇을 도와야 할지도 모르고 있으며, 때로는 그들이 원치 않는 도움을 줍니다.

 이렇게 서로 이해 못하는 사람과 산다는 걸 알아야 합니다.

그렇다 해도 우린 사랑할 수는 있습니다.

완전한 이해 없이도 우리는 완벽하게 사랑할 수 있습니다.”

-영화 [흐르는 강물처럼]에서 아들 폴의 죽음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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