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수의 고독
파올로 조르다노 지음, 한리나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이르든 늦든 언젠가는 삶이 그 균열을 통해 굳게 닫힌 자물쇠를 열어젖힐 것이다. -p268

 

그렇다. 어느 날 찾아온 작은 균열은 그동안 봉합되어 있던 생生을 조각조각 갈라놓는다. 나비의 작은 날갯짓이 커다란 토네이도로 변신하는 것처럼  삶의 작은 균열은 우리가 예상하지 못하는 순간에 시작되어 서서히 뻗어나간다. 어린 소녀에 불과하였던 알리체에게 불어닥친 삶의 바람은 작은 균열로 시작하여 틈새를 벌리고 그 틈새 사이로 빨려 들어가 더욱 커다란 소용돌이를 일으키며 삶을 산산조각 내었다. 삶은 그렇게 불가항력적으로 다가온다. 행복하고 아름다웠던 소녀 알리체의 삶의 첫 균열은  어이없게도 우유 한 잔으로 시작되었고 우유 한잔의 균열은 그녀의 한쪽 다리를 부러뜨리고 '거식증'환자라는 꼬리표를 달게 하였으며 그 옆에 덤으로 고독이 남겨졌다. 

 

쌍둥이로 태어난 마티아에게 불어온 삶의 첫 균열은 쌍둥이 여동생을 공원에서 잃어버리게 되면서부터이다. 동생을 잃어버린 후, 무표정하고 마티아를 끔찍히 여기는 부모님에게서 마티아가 견뎌낼 수 있는 방법은 칼로 피부를 뚫을 때뿐이다. 날카롭게 죄어오는 아픔은 동생을 잃은 죄책감을 상쇄시켜 주었고 점점 자해에 길들여지며 상처투성이의 나날들을 견뎌내는 것이 전부인 삶.  그런 마티아를 사랑하는 또 하나의 성소수자 小數 데니스에게도 상처투성이의 시절임은 같았다. 이렇게 서로 상처를 간직한채, 시간의 터널을 지나고 있던 이들은 학교의 유명인사 비올라의 생일파티에서 만나게 되면서 서로의 운명을 알아본다. 세상을 거부하는 알리체와 세상에서 거부당한  마티아에게 풍기는 극한의 외로움과 진한 고독의 향은 쌍둥이 소수만이 알아볼 수 있는 삶의 향기였기에...

알리체와 마티아가 오랜 세월이 지나서야 알게 된 것을 다른 아이들은 첫눈에 알아보았다, 손을 잡고 주방에 들어선 두 사람은 웃음기 없이 제각기 다른 방향을 보고 있었지만, 맞닿은 팔과 손가락을 통해 하나의 몸이 다른 몸으로 이어져 흐르는 것처럼 보였다.

소수素數는 오직 1과 자기 자신으로만 나누어진다. 수학 천재 마티아는 소수의 성질인 의심 많고 고독한 숫자의 모습에 매력을 느끼고, 수많은 소수 가운데 존재하는 쌍둥이 소수는 마티아에게 더욱 커다란 의미를 지니게 된다. 서로 붙어있는 한쌍의 소수이면서 가깝지만 서로 닿지 못하는 소수. 소수에 관한 논문으로 유수한 성적으로 대학을 졸업한 그에게 북유럽 유명대학에서 초청장이 날라오자, 마티아는 이별 한마디 없이 알리체를 떠나간다. 떠난 마티아 자리를 의사 파비오가 함께 하지만, 마티아를 사랑하는 알리체에게 파비오의 공간이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거식증에 점점 야위어가는 알리체를 보던 파비오는 지쳐 떠나가고 남겨진 알리체는 9년동안 침묵하던 마티아에게 편지 한장 띄우는 것이 전부였지만, 편지 한 장으로 수천킬로를 날라온 마티아는 의심할 여지없는 사랑하는 사람의 모습이었다.

 

소수중의 ‘쌍둥이 소수’에게서 근접한, 거의  근접한 두 수가 한 쌍을 이루고 그 사이엔 항상 둘의 만남을 방해하는 짝수가 있다. 11과 13이라든가 17과 19, 또는 41과 43 같은 수들이 그렇다. 인내심 있게 계속 세어나가면, 이 쌍둥이 소수들이 점점 희소해지는 걸 발견하게 된다. 오직 기호로만 이루어진 고요하고 규칙적인 세계에서 길을 잃은 채 더욱 고립된 소수들을 만나게 된다. 그러면 그때까지 만난 쌍둥이 소수들은 우연의 산물이며, 결국 그들의 진정한 운명은 홀로 존재하는 것이라는 불길한 예감이 밀려온다, 그래서 더 세어볼 마음이 들지 않아 그만두려는 찰나 서로 꼭 붙어있는 한 쌍의 소수를 만나게 된다.

 

 

마티아는 자신과 알리체가 꼭 그런 사이라고 생각했다. 외로이 방황하는 두 소수, 가깝지만 실제로 서로 닿기에는 충분하지 않은 쌍둥이 소수.

 

알리체와 마티아 , 이 쌍둥이 소수의 사랑은 평행선을 달리며 닿지 않는 사랑의 모습이다. 이들이 닿지 않음에도 사랑할 수 있는 것은 외면으로 발산되는 욕망의 일부가 아닌 내면에 침잠하여 쌓여가는 고독의 본질과도 같기 때문이다. 내면의 고독이 쌓이고 쌓여 한 층위를 만들어가며 서로에게 삶의 일부가 흘러가는 것처럼 이들은 서로를 향한 침묵과 고독을  내면안에서  묵히고 삭히며 서로의 사랑을 완성해가고 있다. 서서히 수면위에 퍼지는 잔물결들이 바람이 부는대로 흔들리며 그리는 파문처럼 적요하고 잔잔하다. 사랑이 소유와 욕망의 모습에 익숙한 우리의 삶에서 이들의 사랑은 낯설게 다가오기도 한다. 소유와 욕망이 아닌, 이들은 서로의 공간을 절대 침해하지 않으면서도 서로를 존중해주는 숭고함이 깃들어 있는 평행선 사랑이다. 한편으로는 마티아가 끝까지 알리체를 사랑한다는 것을 머릿속에서 이해하면서도 세면대에 튀긴 자신의 물방울마저 닦아버리는 모습을 보며 소수素數 자 -1과 자기자신-의 사랑이란, 끊임없이 무거운 바위를 들고 산을 오르는 시시프스의 절대고독과도 같은 처절함과 닮았다는 사실을 깨닫곤 하였다. 마티아에게는 미켈라가 무거운 바위였고, 알리체에게는 아버지가 준 우유 한잔이 바위였고, 데니스에게는 성정체성이 무거운 바위가 되었다. 그러나,  알리체와 마티아, 데니스 그 누구도 자신의 짐을 다른 누구에게도 떠넘기지 않는다. 쌍둥이 소수素數와 성소수小數자 데니스의 사랑은 평행선을 그리지만, 언제나 한 공간안에 머문다. 이들은 오히려 세상에 자신의 흔적이 남길까봐 두려워 하는 모습을 지니고 있다.  마치 마티아가 세상에 자신의 흔적을 남기지 않기 위해 소리내지 않고 걷는 방법을 터득한 것처럼, 알리체가 세상의 모든 음식을 거부하는 것처럼, 이들은 모두가 철저하게 세상으로부터 분리되어 자신의 길을 걸어간다. 그것은 강물이 역류하여 흐르지 않는 것처럼 세상에서 소외된 이들의 운명 또한 그러하다.  소수자라는 궁극의 고독을 나타내는 숫자와 소외된 이들의 아픔을 지면위에 유려하게, 수면위의 잔물결처럼 흔들리지만 은은하게, 느리지만 묵직하게, 슬프지만 아프지 않게, 소외된 이들의 아픔을 어루만져주는 치유의 소설이었다. 이 짧은 소설안에 이 모든 것을 담아낸 작가에게 경이로움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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