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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도 너에게도 상처로 기억될 시간이 지나간다
나서영 지음 / 젊은작가들의모임 / 2013년 11월
평점 :
품절
글을 쓰는 일이란, 꽃씨는 심는 일이예요. 라고 다산 정약용 선생님처럼 이쁜 언어로 말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글을 쓴다는 일이 꽃씨를 심는 일이라는 것을 깨닫기까지에는 얼마나 많은 인고의 시간들을 견뎌내야 하는가. 리뷰를 쓴다는 일도 그렇다. 누구에게는 하찮게 보이는 이 일조차도 누군가에게는 (주체) 최선의, 최고의 공을 들이는 시간이 된다. 밥 먹듯 책 읽고 리뷰 쓰는 나에게 밥 먹듯 소설을 쓰는 친구가 있다. 작년부터 귀찮을 정도로 메일을 보내며 소설을 읽어달라는 친구, 그랬다. 귀찮았다. 나는 그다지 쓴다는 것에 미련이 있거나, 집착을 가지고 있지 않다. 가끔은 귀차니즘으로 막 써내려간 리뷰를 블로그에 올려놓고 한다. 다음 날 수많은 오타와 비문을 발견할 때마다 어이없을지라도 고치면 그만이다는 가벼움을 지니고 있던 나에게 글쓰기는 그저 보통 그 이상의 의미는 아니었다. 책을 읽는 것이 내게는 더 중요한 일이었기에 ... 물론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나도 글을 잘 쓰고 싶다는 욕망은 있다. 그러나, 좋은 글을 알아볼 줄 아는 심미안은 애초부터 지니고 있지 않았기에 소설을 보내오는 친구에게 항상 답장을 보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저 친구의 열정을 단순한 집착이라고만 여기고 있었더랬다. 내가 책에 집착하듯 말이다. 그러나, 서영이에게 소설의 의미는 책 이상의 의미였다는 것을 이 책을 통해 이해하고는 글쓰기에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을 달고 살았던 나를 무진장 부끄럽게 하였다. 그리고 경이로웠다. 책이 누군가에는 생명의 의미가 될 수 있구나..
《나에게도 너에게도 상처로 기억될 시간이 지나간다》 의 구성은 서영이의 자전적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다. 네 번째 소설이후, 서영이는 나름 바쁜 시간들을 보내고 있었다. 젊은 작가들의 대표로 대학에서 강연하는 일도 많았고, 소설을 판돈으로 아픈 아이들을 위해 늘 병원을 오갔다. 정신없이 지나가는 시간 가운데 써낸 소설이지만, 소설을 읽으면서 서영이 스스로가 자신의 몸에 가시를 뽑아내는 일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서영이는 자신을 들여다보는 일을 하고 있었다. 아니 실로 서영이의 글에는 가시가 잔뜩 돋쳐 있었다. 다섯 살 서영이가, 일곱 살의 서영이가, 아홉 살의 서영이가, 열 두 살의 서영이가, 열 세 살의 서영이가, 스물 네 살에서 스물 다섯 살의 서영이가, 말을 한다. 자신을 버리고 떠나간 엄마를 , 자신을 구하려다가 꺾어진 꽃이 된 깐난이를, 짝사랑에 죽어가던 난쟁이의 불행한 죽음이 서영이를 향해 가시를 빳빳이 돋치우다가 이내 순하게 가라앉는다.
글쓰기는 비겁한 도망이다. 문득 글을 쓰고 있던, 글을 쓰는 게 행복했던 나, 내가 썼던 글들이 가시를 뽀족하게 세운다. 그 가시에 찔릴까 두려워 도망을 치려 한다.
그의 길지 않은 생에 깊게 패인 상처들 사이로 비춰지는 삶의 진실들은 응고되지 않은 채 바람의 화살처럼 지나간다. 그렇게 서영이는 시간의 흐름 한 가운데에 서서 삶을 세고 있었다. 자신의 소설이 날카로운 송곳이 되어 누군가를 찔렀다는 사실에 가슴 아파하며 글쓰기의 의미를 반추해 나가기도 한 기록이다. 글쓰기가 때로는 삶에서의 도망이 된다는 순간을 깨닫는 순간 두번 다시 글을 쓰지 않겠다고 했던 그는 또다시 글을 쓰고 있다. 글쓰기는 이미 서영이에게는 숙명이 되었기에..
나의 글쓰기는 무엇을 쓸 것인가를 고민하고 쓰면서 괴로운 그런 것이 아니다. 머리카락이 길고 손톱이 자라는 것처럼 가슴속에 글이 응어리진다. 그 응어리를 무시할 수 있지만 한 번도 이겨본 적이 없다. 응어리를 토해내지 않으면 가슴이 꽉 막힌 듯 답답하다.
며칠 전 읽었던 주디스 버틀러의 <윤리적 폭력 비판>에서는 우리의 생각을 표현하는 언어안에는 말하는 순간 나,너,우리의 의미가 함의되어 있음을 말한다. 말을 한다는 것과 글을 쓴다는 것, 이 모든 언어들 안에는 나,너 우리의 의미가 담겨 있다. 누군가 자신의 이야기를 할 때는 이미 타인을 향한 몸짓이 내재되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서영이의 이야기는 곧 우리를 향한 이야기가 된다. 글쓰기가 때론 현실에서 비겁한 도망이 될 수도 있고 또는 의도하지 않게 누군가의 상처를 건드리는 아픔의 행위가 되기도 하지만, 그것으로 우리는 투명하게 내 안의 '자아'를 들여다볼 수 있는 순간을 경험하게 된다. 그렇기에 글쓰기의 언어는 상처를 치유해가는 행위가 된다. 결정적으로 우리들에게 글쓰기(언어)는 인간이 슬퍼하고 기침하는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