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리적 폭력 비판 - 자기 자신을 설명하기
주디스 버틀러 지음, 양효실 옮김 / 인간사랑 / 2013년 8월
평점 :
품절


꽃/김춘수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 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누군가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존재의 의미를 인식하는 일이다. 타인에게 말을 건 순간 타인은  ‘몸짓’에 불과한 '나'를 존재하게 한다. 바로 타자의 관계를 통해 의미가 부여되는 것이다.  타인의 말걸기(언어) 를 통해 통해 ‘나’가 된다는 것은 주디스 버틀러 철학의 핵심사유이다. 위의 시에서처럼  ‘그’가 ‘너’로, ‘나’와 ‘너’와의 관계 맺기를 통해 맺어진 '나'란 의미는 전근대적 인식의 실패와 어깨를 나란히 한다. 폭력과 절멸을 목표로 한 국가주의와 종교적 근본주의에 접합되면서 현대 전지구적인 폭력에 침묵하거나 그에 동조하는 데 인신론적 전제로 동원되고 있는 '나'의 존재의 의미를 《윤리적 폭력 비판》을 통해 재정비하는 시도를 보여주는 책이다. 이처럼 우리가 인식하고 있던  서로에게 ‘무엇’이 되어야 한다는 존재론적 의미가 아닌  ‘윤리적 폭력 비판’ 으로서의 '나' 는 이 책을 관통하는 철학이다. 

나는 타자의 인정이 나를 바꾸는 바로 그 정도만큼 타자의 인정을 받는 나 자신을 인정할 수 있다. 그것이 욕망이고, 욕망 안에서 전율하는 것이다.-장-뤽 낭시[부정적인 것의 초조함]

이 책의 원제는 Givingan Account of Oneself 자기 자신을 설명하기 이다. 이 안에는 말하기(언어)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데 주디스 버틀러가 말하고자 하는 가장 중요한 사유의 철학은 '말하는 존재로서의 인간은 규범으로서의 언어의 욕망에 완전히 종속될 수 없다'는 것이다. 주디스 버틀러는 그 이유를 밝히기 위해 헤겔과 아도르노의 집단적 에토스, 니체와  푸코, 구조주의자들, 도덕적 니할리즘과 비교하여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철학들의 귀착점은 자아는 서술될 수 없다는 것이다. 저자는 자아는 서술되어야 하고, 오직 서술된 자아만이 이해가능하고 생존할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렇게 말하는 것은 우리는 무의식과 함께 생존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과 같으며 '나' 안에 존재하는 무의식은 지지할 수 없는 이해불가능성으로 우리를 위협하고 있으며 그런 이유에서 우리는 무의식에 대항해야 한다고 말한다. 아이러니 한 것은 제목이 '자기 자신을 설명하기'이지만, 주디스 버틀러의 사유의 천착은 자앞에서 우리는 줄곧 설명하려고 해왔던 ‘나’를 설명할 수 없다는 점에 머무른다는 것이다. 주디스 버틀러는 '나'라는 존재의 앎 역시도 어쩌면 알려질 것으로 존재하는 것의 한계와 관련된 '앎' 이란 점을 명시하고 있다. 

 

그럼 누군가가 나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존재'의 의미를 갖는 '나' 의 주체는 무엇일까? 저자는 타인에게 말걸기라는 표현을 통해 자기 자신을 설명하기의 구조안에 이미 '너'를 전제로 하는 말걸기의 구조가 성립되어 있으며 내가 나라고 말하는 순간 , 나는 대명사인 ’나‘를 언어로 인용하고 있을 뿐 아니라 일차적인 충돌을 입증하면서 일차적 충돌로부터 거리를 두고 있다고 한다. 그런 일차적 충돌, 아니 일차적 방식을 통해 나란 존재는 ’나‘를 획득하기에 앞서, 품에 안기고, 여기저기로 옮겨지고, 먹여지고, 옷을 갈아 입혀지고, 잠재워지는 주체이자, 목적어로 확립된다. 이렇듯 내적 일관성이나 자율성, 초지일관한 의지를 외적 세계에서 실현하는 근대적 주체로서의 '나'란  사회성, 관계성 혹은 주체의 기원으로서의 타자가 된다. 버틀러가 보기에 인간은 처음부터 자율적인 내부가 보증되지 않는 , 말하자면 사회적 관계 안으로 태어나 그 사회적 관계로 인해 순수한 자기로서의 회귀가 불가능한 존재들이다. 나라는 존재는 이렇게 불완전하며, 기존에 알고 있던 '나'의 의미, 누군가가 이름을 부르면서 존재하는 '나'란 , 결국은 사회적 삶에서 대가를 치러야 하는 윤리학이나 다름이 없으며 폭력과 함께 한 타인의 언어임을 증명하고 있다. 난해하하기 이를 데 없는  버틀러만의 철학인 《윤리적 폭력 비판》철학은 다소 어렵지만, 인간 스스로의 존재, 그 자체를 사유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특별한 경험이다. 

 

나의 시작은 서술될 수 없는 타자의 자국 impression 이라는 사실로 인해 나에 대한 나의 설명은 부분적이고 불완전하다. 내가 나를 모른다는 것, 설명이 부분적이라는 것, 언어가 나의 것이 아니라는 것, 그럼에도 우리는 자신에 대해 설명할 수 없으면 이미 죽은 것이라는 등등의 이유로 인해 자기 자신에 대한 설명은 실패하게 된다. 버틀러는 바로 이런 설명불가능성의 슬픔에서 새로운 윤리, 어떤 희망 같을 것을 보려고 한다. 그런 슬픔이야말로 겸손과 굴욕과 무지를 “아는” 인간 존재의 진실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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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0-30 11:5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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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0-31 09:5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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