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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랍어 시간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한강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11월
평점 :
막 열일곱 살이 되던 겨울이었다.
수천 개의 바늘로 짠 옷처럼 그녀를 가두며 찌르던 언어가 갑자기 사라졌다.
한 여자가 있습니다. 그녀는 어느 날, 말을 잃었습니다. 말을 잊는다는 것은, 존재를 잃었다는 말과 같습니다. 세상에서 자신이 돋을새김처럼 드러나는 것을 싫어했던 그녀는 스스로를 음각 intaglio 하여 존재하지 않길 원했습니다. 그녀가 보는 것은 내면에 흘러들어가 고여만 있습니다. 번역되지 않는 말, 소통하지 않는 언어를 사용하던 그녀, 그렇게 세상에서 움푹 패여 침묵과 함께 침잠해 들어가던 그녀를 깨운 언어가 있었습니다. 모국어는 그녀에게 ‘그것은 선명하고 완전한 고통,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자신이 입을 열어 내뱉는 한마디 한마디의 말이 소름끼칠 만큼 분명하게 들린다는 것이었다. 아무리 하찮은 하나의 문장도 완전함과 불완전함, 진실과 거짓, 아름다움과 추함을 얼음처럼 선명하여’ 고통이었지만, 희랍어는 고통없이 ‘주어도 없이 어순을 지킬 필요 없이 간명하게 의사전달이 가능한 언어’ 라는 점이 잠든 그녀를 깨웁니다. 침묵과 상실과 고독으로 점철된 그녀의 삶을 희랍어로 가득 채우고 싶었던 그녀, 희랍어는 그녀에게 ‘인간의 모든 언어가 압축된 하나의 단어’ 이상의 구원의 언어가 됩니다. 말을 잃고, 사랑을 잃고, 사랑하는 아이조차 떠나보내야 했던 그녀는 그녀와 똑같은 모습의 '죽어가는','소통되지 않는' 언어였던 '희랍어 시간'이라는 가느다란 실만이 생명줄처럼 연결되어 있습니다.
한 남자가 있습니다. 남자는 빛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눈을 감는 것과 뜨는 것이 거의 다르지 않은, 먹보다 진한 ’ 시력을 잃어가고 있는 이 남자는 세상을 찬란한 것, 어슴푸레하게 밝은 것, 그늘진 것으로만 식별이 가능합니다. 색채가 없는 음양만이 볼 수 있던 이 남자는 희랍어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학원에서 희랍어를 가르치는 시간 외에는 플라톤의 희랍어 원전읽기를 강의합니다. 희랍어와 플라톤, 그리고 이 남자에게는 하나의 공통분모가 있습니다. 바로 빛을 잃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플라톤의 국가를 소멸되어가는 희랍어로 구사한 것처럼 희랍국가 역시 언어와 함께 쇠망하였듯이 남자도 소멸되어 가고 있었으니까요. 희랍어가 이제는 아무도 사용하지 않는 ‘오래 전 죽은 말’이 되어 ‘소통되지 않는 말’이 되었듯이 남자의 희랍어시간은 소통하기 위한 시간이 아닌, 소멸해가는 시간이라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플라톤과 이 남자는 덤덤히 자신에게 주어진 소멸과 몰락이라는 삶의 수순을 조용히 밟고 있는 중입니다.
말語을 잃어가는 한 여자와 눈眼을 잃어가는 한 남자가 ‘희랍어 시간’이라는 같은 공간에서 만납니다. 남자는 오랫동안 여자를 사랑해왔습니다. 밝음과 어두움만을 구별할 수 있기에 남자는 당연히 여자를 알아보지 못합니다. 여자는 남자를 알지만, 말해줄 수 없습니다. 말을 잃었기에.... 둘 사이에는 오로지 오래 전 죽은 언어 , 희랍어 문자만 떠돌아다닙니다. 생生을 타오르는 불꽃이라 한다면, 그 불꽃들 사이로 고통과 집착, 슬픔과 후회가 명멸해 가고 있는 가운데 조용히 끓어오르는 사랑을 보며 전 이제까지 소멸은 끝을 의미한다고 생각해왔습니다. 그러나, 소멸은 새로운 시작을 의미하고 있다는 것을 조금 이해하게 됩니다. 거기에 소멸과 생명의 이야기를 번복하는 신산스러운 우리의 삶에서 유일하게 반짝이는 하나의 명제는 사랑이라는 것 외에는 없다는 것도 하나 덤으로 알게 되었습니다. 눈으로 보고 입으로 말하는 것만이 존재한다는 통념을 깨고 ‘그 너머’의 것을 보게 해주는 아름다운 사랑이 말語을 잃어가는 한 여자와 눈眼을 잃어가는 한 남자의 몸짓으로 쓰여 있습니다. 어쩌면 보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사랑,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사랑은 소멸된 빛과 존재의 결핍이라는 대지大地에서만 자랄 수 있는 사랑이 아닐까요. 삶에 불어오는 바람이 데시벨을 높이기 전에 만나보시길 바랍니다. 소멸안에서 반짝이는 생의 불꽃이 사라지기 전에 말이죠.
세상은 환이고, 산다는 것은 꿈꾸는 것입니다.
그 꿈이 이렇게 이토록 생생한가.
피가 흐르고 뜨거운 눈물이 솟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