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사과
김경욱 지음 / 문학동네 / 200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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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황금사과는 중의적인 표현이다. 황금이 불사불멸의 물질을 뜻한다면 사과는 에덴의 하와가 영원한 생명을 선택하기 보다는 선악과(지식)를 선택한 것처럼 지식, 즉 앎을 의미한다. 그러나, 불사불멸의 지식은 다다를 수 없는 꿈이자, 헛된 욕망일 뿐이라는 것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는 진리이다.  그렇다면 황금사과의 참된 의미는 이룰 수 없는, 현실에서 존재하지 않는 불사불멸의 꿈이자 이룰 수 없는 인간의 욕망이라는 뜻이 된다.

 

 

  소설은 주인공 화자가 우연히 들어가게 된 도서관에서의 하룻밤 이야기이다. 마감 전 들어간 도서관이 화자만을 남겨두고 모두 집에 돌아가게 되자 출구를 찾기 위해 헤맨 고()문헌실에서 우연히 프란체스코 회의 윌리엄 수도사가 남긴 독특한 이름의 서책 프랑스를 비롯한 전 세계에서 가장 고귀하고 가장 괴물 같은 일들에 관한 기록을 발견하게 되면서 소설은 과거 페쇄 된 사회 인 중세시대로 순간이동 한다.

 

영원의 도시라는 영예롭고 고귀한 명칭에 어울리지 않게 이단의 온상인 베르송. 때는 교황과 프랑스 왕과의 갈등이 극에 달한 시기로서, 지리상 여건으로 인하여 프랑스 안의 이탈리아였던 베르송은 프랑스의 뜨거운 감자이다. 교황과 황제 사이 주도권을 두고 치열한 싸움을 벌이고 있는 소리없는 전장터인 베르송의 베네딕트 수도원. 그곳에서 날아온 한 통의 편지로 윌리엄은 알프스 산맥을 넘어 가게 되었다. <장미의 이름>에서 교황의 절대 권력과 맞서 싸우는 정의로운 수도사였던 윌리엄 수도사는 <황금 사과>에서도 정의로운, 신앙심 깊고 아직 어떠한 욕망에도 물들지 않은 순수한 모습이다. 반면, 지나치게 지식을 맹신하고 있는 제롬 사제는 장미의 이름에서 세상의 모든 지식을 장서관에 억류하였던 호르혜 수도사와 겹쳐진다.  윌리엄은 제롬의 박학다식과 탁월한 논리와 교리를 보며 궁극의 형체를 붙잡을 수 없는 완전한 무를 지향하고 있는이라고 표현하는데 마치 호르혜 수도사가 장서관에 맹목적이던  모습처럼 지식천착에 광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윌리엄이 도착하였을 때는 피에르 주교가 의문의 죽음을,  그를 수행하던 시종의  실종 , 갑작스러운 페스트의 창궐과 식인파이 사건 등 이미  영원의 도시는  음모와 의혹과 암투로 점철된 지옥도 地獄道로 변하여 있었다. 

 

오래 전 읽었던 장미의 이름도 마지막 장면이 화염이었다. 소란과 소요 속에서 불타오르던 장서관의 장엄한 불길. 그때 그 불길은 불멸과 지식을 향한 인간의 욕망에 대한 신의 경고처럼 느껴졌었다. ‘신이 그것을 바라신다라는 미명하에 일어난 십자군 전쟁이 인류 역사에 남겨준 진실은 맹목적'무조건적인믿음의 결과를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이다. 결국 인류사에서  맹신의 끝은 파멸이다. 맹신은 신을 향한 믿음만이 아니라 그 안에 인간의 욕망을 정당화하는 무기가 숨겨져 있다. 황금을 찾기 위해 이교도의 시신의 배를 가르고 창자를 꺼내는 것조차 신의 뜻이라면 가능했던 것은 폐쇄 된 사회성인 중세 시대 즉, ’신의 시대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런 폐쇄 된 사회에서는 욕망 그 자체의 직접성이 잘 드러난다. 영원할 수 없기에 멸하지 않는, 불멸을 꿈꾸는 인간의 욕망의 덧없음처럼  제롬 수사의 황금사과( 불사불멸의 꿈)역시도 화염과 함께 사라진다.  

 

무지의 천국을 택하느니, 차라리 앎의 지옥을 택하겠노라 !

 

당연히 , 이것은 작품이 아니라 텍스트다. 《황금 사과》의 첫 장에 쓰여진 글이다. 책을 다 읽고서 작가가 왜 이런 말을 남겼는지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었다. 솔직히 작품이 아니라 텍스트라는 말에서 나는 머리 한 대 세게 맞은 기분이었다. 반전의 반전이라고 할까. 겨우 하룻밤이야기임에도 며칠 밤의 이야기처럼 중세 사회의 종교와  역사등의 다양한 텍스트들에 추리의 묘미까지 더한 방대한 이야기들이 결국 장미의 이름 텍스트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은 그야말로 맥빠지는 표현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사멸의 멍에를 지고 태어난 우리가 도달할 수 있는 경지가 가르키고 있는 경지는 바로 텍스트라는 말이 머리를 스치고 난 뒤에라야 소설을 절반 이해했다.   사사키 아타루가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에서 텍스트를 읽고 쓰고, 다시 읽고, 다시 쓰고, 하는 것이 인류의 근원적인 힘이라고 하였던 것처럼, 멸하는 운명을 가진 인간에게 불멸이란, 결국은 텍스트(이야기) 밖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 유명한 소설 <장미의 이름>을 패러디하여 보여주고 싶어했던 소설가의 염원念願을 담은 소설이 아닐까.

 

오래 전, 김경욱 작가의 <동화처럼>을 읽은 적이 있다. 그래서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한 <황금사과>는 전작의 가벼움과는 전혀 다른 무게감으로 읽혀진다. 움베르토 에코의 그 유명한 소설 <장미의 이름> 텍스트로서의 시도라는 다소 거창한 주제를 가지고 있는 이 소설은 시간여행의 소설처럼 과거와 현재, 환상과 현실의 경계선에서 진실과 허구의 환상적인 텍스트의 시도이며 문학으로서도  새 지평을 열어 주고 있는 매우 독특한 소설이다. 장미의 이름만큼이나 재미있는 소설이었다.

 

어쩌면 이야기야말로 멸을 감당하도록 운명지어진 인간의 불사불멸을 향한 희원이 낳은 열매가 아닐까. 생을 연장하기 위해 매일 밤 이야기를 지어내야만 했던 <세헤라자데>가 그러했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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