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시작하는 철학
로제 폴 드르와 지음, 박언주 옮김 / 시공사 / 2013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정의를 고민하는 것은 곧 최선의 삶을 고민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마이클 샌델이 한 말이다. 정의를 고민하는 것이야말로 철학의 본질이다. 프랑스 철학자 로제 폴 드르와는 《일상에서 철학하기》에서 이미 우리 주위에 있는 모든 것을 왜? 라고 바라보기 시작할 때 철학이 시작되었다고 하였다. 상상 더하기 why? 가 만나면 철학이 된다. 그럼에도 철학이란 일반적인들에게는 진부한 말이다. 최근에 읽은 <모든 것은 빛난다>의 공저자들은 현재의 시스템이 ‘개인’에게 떠안긴 감당하기 어려운 ‘책임과 선택의 짐’ 으로 인해 인간 본연의 ‘실존적이며 자율적인 존재로서의 인간’에서 멀어지고 있다고 한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 주위 모든 사물들이 우리를 위해 '반짝반짝 빛나고 있으며 '실존'하는 현재의 순간들을 느낄 수 있도록 사유하여야 한다고 한다. 그럼 사유란 무엇일까?

 

《처음 시작하는 철학》의 저자 로제 폴 드르와는 철학, 즉 사유한다는 것을 이렇게 말한다.‘ 사유란 숱한 무관심과 모략, 어리석음에 맞서 싸워야 했던 특정 시대, 특정 지역 사람들의 삶으로 엮어낸 옷감 같은 것’ 이라고, 한마디로 사유는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문화이자 삶의 총체를 말한다. 그렇기에 저자는 철학자들을 이론가로 볼 것이 아니라, 문화와 삶을 이끌어간 역사의 주역자로서 철학자들을 바라보아야 한다는 지론으로 개성 있는 철학서를 선보인다. 우리가 기존에 알고 있던 이원론, 일원론의 이론서 철학이 아닌, ‘ 자신의 삶과 생각’들을 통해 시대에 어떠한 생각의 움직임(자기 반성성)의 행보를 하였는지에 대한 철학을 개론하여 어려운 철학이 아닌 쉬운 철학으로서 독자들을 안내하고 있다.

 

철학이란 진리를 우리 마음속에 들어오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을 진리 쪽으로 돌려놓는 것이다.

 

고대의 철학은 앎과 지혜는 같은 선상에서 출발한다. 플라톤은 높은 곳에서의 선을 추구하는 것이고 아리스토텔레스는 현재의 삶에서 진리를 찾는다. 이들에게서 아는 것은 곧 삶과의 일치였다. 이러한 사상은  논리학과 물리학과 심리학을 결합하여 더 오래 지속되었던 스토아 학파에게 이어져 실천적 지혜로 나아가는 완벽한 철학 체계를 이루게 된다. 두번째 철학사의 흐름은 고대 그리스 철학과 하느님의 진리와의 역사적 만남이 어떻게 이루어졌으며 이 두 흐름의 결합은 다양하고 복합적이며 때로는 뜻밖의 모습으로 수백 년에 걸쳐 이러져 내려오는 사상이 된다. (고대 그리스 -로마와 기독교의 충돌에서 비롯한 일종의 교배와 변종의 형성이 이후의 유럽 사상을 구성하기 때문에 철학사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세번째 큰 사상적 전환은  진리가 인간 내면의 문제로 변화하게 되는 점이다. 진리의 내재성을 내세우는 철학은 아우구스티누스에 이어 이후 마키아벨리로 이어지고 다시 몽테뉴에게로 이어지게 되면서 고대 철학과 결별하는 것으로 서양 철학사는 다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며 네번째 흐름인 파스칼 , 스피노자, 라이프니츠로 이어지는 철학사는 인간의 이성과 신의 영역에 대한 문제를 끊임없이 제기하며 그에 대한 성찰을 체계화하게 된다. 이런 성찰은 계몽주의로 이어지게 되고 볼테르와 디드로, 흄과 루소로  바통이 이어지는데 이들은 ‘인간의 진리는 보편적이어야 하고 자유롭게 해야 한다’ 는 것을 추구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진리에 대한 생각차이로 인하여 모든 진리를 의심하게 되는 현대 철학을 탄생하게 하였고  이러한 의심은 칸트와 마르크스, 니체에 이르게 되고 결국  진리는 수많은 극단적 모험들 속에 내던져지게 되었다.

 

단언컨대, 《처음 시작하는 철학》은  서양 철학 입문서로서는 최고인 책이다. 저자는 언제나 어려운 철학은 의미없다는 지론을 펼쳐왔는데 그의 장담처럼 매우 쉽고 어려운 철학용어 없이도 서양철학사의 흐름을 한 눈에 꿸 수 있도록 배려한 흔적들이 돋보인다. 서양의 굶직한 철학의 대가들은 연대기 순으로 나열하였고 시대의 흐름과 함께 20명의 철학자들을 배치하여 개인 신상들에 대해서도 매우 자세하게 기술하고 있다. 한편으로 철학자들의 끊임없는 진리 탐구의 사유체계들을 보면서 시대를 막론하고 진리에 대한 사유를 갈구하는 모습이 매우 흥미롭게 다가왔다. 그리고 나는 그것이 우리를 생존케하는 근원적인 힘의 원천이라 생각한다. 진리란 무엇인가? 대답은 간단하다. 바로 진리에 대하여 끊임없이 고민하고 생각하는 것이다. 철학자처럼 ~ ^^ 

 

미래의 그 어느 날보다 오늘날 여러분들이 제일 똑똑합니다.  

 

접힌 부분 펼치기 ▼ (철학자들의 사상 본문글)

 

플라톤에게 진리란, 늘 변화무쌍하고 개인마다 다른 감각 세계 속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영원불변의 진리는 이데아의 세계 속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영원불변의 진리는 이데아의 세계 속에 존재하며, 그 속에서 철학자는 참된 형상을 바라볼 수 있다. 따라서 철학자의 임무는 사회가 이 이상적 모델과 일치할 수 있도록 사회를 변화시키는 데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진리란, 딴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물질적 대상의 형상 자체 속에, 그 형상과 우리 사고와의 관계 속에 있다. 정의와 정치 또는 개인의 행복이 문제시되는 인간사에서는 우연적 변형을 감수하는 시행착오, 절대가 아닌 근사치, 상대적 확실성들을 인정해야 한다.

 

에피쿠로스와 루크레티우스에게 진리란 육체, 물질,원자의 결합 문제다. 행복의 비밀은 헛된 두려움을 타파한 후 얻게 되는 긴장과 번민의 부재 상태에 있다. 이 진리는 사유의 대상이 아니라, 삶으로 체험해야 하는 것이다.

 

스토아학파의 특성은 자연이라는 토대 위에 덕의 윤리학을 세웠다는 것이다. 이들에게는 이성이 이끄는 대로 살아가는 것, 진리 및 선에 부합하여 판단을 내리는 것. 어떤 상황에서도 의지에 절대 우선권을 부여하는 것이야말로 합리성이라는 우리의 본성에 부합하는 삶이다.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진리란, 각자의 마음속에서 추구해야 하는 것이다. 신이란 어찌 보면 우리 마음속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기 자신을 탐구하는 것은 단순히 개인으로서의 자신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정신 속에 숨어 있는 신성과 조우하기 위해 떠나는 여행이기도 하다.

 

몽테뉴에게 진리란, 존재 그 자체와 마찬가지로 불확실하면서 동시에 즐거운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의심과 살아가고자 하는 단순한 용기를 최대한으로 발휘했고, 또한 최고의 가치로 평가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우리 자신 속으로 들어가면 갈수록, 우리가 만나게 되는 것은 변화무쌍한 풍경들과 시시각각 변화하는 우리의 기분과 성향들이다.

 

데카르트에게 있어 진리 추구란 방법론의 문제, 즉 진리와 거짓의 판별 능력이 있는 우리 이성에 대한 효율적 사용의 문제다. 인간은 누구나 열심히 훈련하면서 동시에 섣부른 판단은 피하고, 자기가 확실하게 이해한 것에 대해서만 동의한다면 똑같은 결과에 이를 수 있다.

 

파스칼은 지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질리가 우리 마음의 평정을 보장해준다는 사고를 배제한다. 인간의 두려움과 고독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는 유일한 진리는 그리스도의 탄생을 통해 계시된 진리뿐이라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따라서 파스칼은 자신들만이 유일한 이성이라고 자처하는 다양한 철학적 분파들의 확신을 지속적으로 뒤흔든다.

 

스피노자가 설명하는 현자의 지복은 근대 초입에 고대의 이상, 즉 이성의 노력을 통해 얻어지는 완벽한 평정심을 부활시킨다. 이러한 사유를 통해 다시금 발견한 진리는 영원한 행복을 보장하는 데 충분해 보인다. 하지만 이것을 깨닫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스피노자의 저작은 오랫동안 너무도 많은 오해를 받아왔기 때문이다.

 

볼테르는 효과적 투쟁을 날카롭고 신랄한 풍자를 자처한다. 그래서 개념이 아닌 우스갯소리를 더 좋아하는다는 비난을 받기도 한다. 요컨대 그는 새로운 진리를 만들어냈다기보다는, 오류와 허위적 사고에 맞서 싸웠다.

 

계몽주의 사상의 아들인 루소는 계몽주의의 적이기도 하다. 그는 과학과 이성의 진리가 인류에게 일정하고 유익한 진보를 보장해준다고 믿지 않는다. 오히려 과학과 역사의 폐해들을 고발하면서, 그것을 바로잡음으로써 자연의 진리와 사회의 진리가 새롭게 일치할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칸트가 타당한 진리의 영역을 제한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래도 칸트에게는 움직일 수 없는 고정점들과 영원한 기득권들이 존재한다. 그가 역사를 염두에 두었다 하더라도, 칸트의 역사는 진리라는 개념 자체에 있어 근본적 역할을 담당하지 못한다.

 

마르크스는 진리의 혁명적 힘을 믿었다. 경제의 기능에 대해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다면, 역사를 바꾸는 것도 가능해진다는 것이 그의 시각이었다. 니체 마르크스의 이러한 확신과 엄청난 거리가 있으면서도 동시에 아주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엄청난 거리가 있다는 것은, 니체가 과학이란 속세의 종교이고, 진리란 지고의 환상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이고, 아주 가깝다고 할 수 있는 것은, 그가 '세상의 역사를 둘로 나누어버리고자'했기 때문이다.

 

 

펼친 부분 접기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