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피부, 하얀 가면 - 전면개정판
프란츠 파농 지음, 이석호 옮김 / 인간사랑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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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세계 부자 503위, 전세계 영향력 있는 여성 13위에 해당하는 한 여성이 4천만원짜리 스위스 명품백을 사기 위해 샾에 갔다. 그러나, 그녀는 매장 직원으로부터 ‘ 당신이 사기에는 너무 비싼 가방이예요.’라며 거절당했다. 단지 흑인이라는 이유로 차별당한 그녀는 전세계 언론에 억울함을 호소했다.  그녀의 이름은 바로 오프라 윈프리. 흑인 대통령시대에도 흑인에 대한 차별은 여전함을 보여주는 뉴스였다. 흑인에 대한 차별, 우리나라도 식민지 시대를 겪으면서 여전히 잔재하고 있는 식민 국가의 의존 콤플렉스로 인하여 주체성이 점점 사라지고 있는 포스트 식민시대를 살아내고 있다. 프란츠 파농의 《검은 피부 하얀 가면》은 포스트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기보다는 ‘흑인’ 으로서, 흑인의, 흑인을 위한 아프리카 문학을 대표하는 고전중의 고전이며 <식민주의 심리학>이라 불리기도 한다.

 

인간은 무엇을 원할까?

흑인은 무엇을 원할까?

나는 흑인은 인간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차별, 차별을 받아보았는가? 세상은 불평등한 곳이다. 여자라는 이유로 차별을 받을 수 있고, 장애인이라 차별을 받을 수 있고, 식민지 국가에서는 지배하는 자에게 차별을 받을 수 있다. 만약,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은 없었는데) 피부색이 검다는 이유로 인간이 아니라 태어날 때부터 노예라는 운명이 주어졌다면, 이것은 차별일까?

 

 

 

 

 

프란츠 파농은 유태인과 흑인의 다른 점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기차여행을 하던 중 파농을 가르켜 한 아이가 ‘저 검둥이 좀 봐!’ 라는 손가락질을 했다. 처음에는 아무렇지도 않았던 그 말은 파농의 가슴에 비수가 되어 후벼파는 듯한 느낌에 사로잡힌다. 파농이 살던 마을의 이웃들은 모두 백인들이었는데 처음으로 자신이 검둥이라는 자각을 하게 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게다가 파농은 사회적인 명성을 얻고 있었다. 그러나,  타인들이 말하였던, 검둥이는 짐승이고, 검둥이는 사악하고, 추하고, 무서운 존재였을 때, 자신을 가르키며 누군가가 외친 ‘검동이!’ 가 바로 자신이었다는 충격으로 프란츠 파농이 쌓아올린 자신의 세계가 깨지는 것을 느끼게 된 것이다. 파농은 여기서 유태인과 검둥이의 근본적인 차이점을 깨닫게 된다.  유태인들 역시 흑인처럼 가슴아픈, 존재를 박탈당하는 역사를 가졌지만 본질적인 차이는 타인에게 부여된 이름이란 사실이다. 유태인을 창조한 사람은 , 명백히 인종차별주의자인 반유대주의자이지만, 흑인은 다른 이들에게 부여되는 이름이 존재할 기회조차 없는 가치없는 존재인 흑인이란 사실을 말이다.

 

 

너무 늦고 말았다. 유태인과 나 사이엔 하나의 세계가 가로막고 있었다.

백인의 세계가 ....

 

 흑인이 자신의 세계 속에만 갇히게 되면, 몇 가지 예외적인 사소한 내적 갈등을 제외하고 타자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경험해 볼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할 수 없다.

 

 

 

세기의 천재, 팝의 황제이지만 흑인이었던  마이클 잭슨은 백인이 되고자 천문학적인 성형을 감행하기도 하였다. 프란츠 파농 역시도 같은 열망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흑인에게는 단 하나의 운명만이 존재한다. 그것은 백인이다. 이 결론을 받아들이기 고통스럽지만 어쩔 수 없이 나는 그것을 인정한다.‘ 라고...

 

 

언어는 하나의 세계와 문화를 반영한다. 백인이 되고자 하는 첫 번째 노력은 언어이다. 앤틸리스 흑인들이 ‘프랑스어’를 완벽하게 구사하는 것으로 백인들에게  문화적이나 백인성에 더욱 가깝게 되는 것을 느끼는 것처럼, 흑인들에게 백인들의 언어는 필수적이었다. 언어 다음에 이어지는 것은 유색인종과 백인의 사랑이다.  [나는 마르티니크 여자] 에는  ‘ 나는 오로지 백인하고만 결혼하고 싶었을 따름이다.’ 라고 쓰여있다. 이 글을 쓴 마요트라는 흑인 여자의 체험적 자서전을 통해 파농은 정신적인 분석을 하고 있는데 대체적으로 흑인들이 겪는 갈등과 비교 설명 되어진다.   파농은 마요트의 세계를  흑과 백이 영원한 갈등의 두 축을 이루는 양극화된 세계‘라고 하는데 이는 흑인이 ’나는 백인이다.‘ 라고 하는 말은 흑인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미와 덕을 가졌음을 의미하고, 반대로 ’나는 흑인이다‘ 라는 말은 이 세계와 완전한 혼연일체와 자아를 폐기해버린 화신임을 의미한다고 한다. 따라서,  흑인들이 가지고 있는 백인을 향한 열망, 집착, 백인에 대한 동경등은 흑인의 자아 존재와 소유를 결정하는 성분이자 내적 욕망에서 비롯되는 것임을 방증하는 것이다.

 

 

책의 맨 앞부분 들어가는 길에서부터 흑인으로서 살아간다는 절망이 느껴지고 있었다. 흑인이라는 것,  수많은 영화나 소설에서 흑인에 대한 차별을 볼 때마다 피부로 와닿지 않았기에 그다지 느껴보지 못했던 차별을 이 책을 통해 절절히 느끼게 되었다. 논리적이면서도 시처럼 유려한 프란츠 파농의 글은 아름답기도 하면서 비애감이 넘치고 거기에 장렬함이 서려있다. 세상의 차별은 흑인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말을 필두로 하여 흑인의 정체성과 흑인이 백인에 다다르려 하는 희망들이 처절하다면 처절하게 쓰여있다.파농이 흑인으로서 느끼는 정체성의 뿌리를 포스트식민주의의 정체성을 되찾는 것으로 보고 있는 책이기도 하지만 , 내가 느끼기에 이 책은 진정한 자유가 무엇인지를, 타인에 대한 사랑과 이해라는 말의 뜻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있는 책이었다.

 

"문제는 세계를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변화시키는 것'

"인간을 가두려는 시도는 반드시 중단해야 한다. 왜냐하면 자유가 인간의 운명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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