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그네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31
헤르타 뮐러 지음, 박경희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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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도 철이 있었다. 가을은 공원에 이별을 고했다. 나무는 맨몸이 되었다. -11쪽

그 밤의 세계가 얼마나 인정머리 없고 고요하던지, 서둘러 대소변을 보는 우리를 얼마나 웃음거리로 만들던지. 왼쪽에서 트루디 펠리칸이 종 모양의 외투를 겨드랑이까지 추어올리고 바지를 발목까지 내리던 모습, 그녀의 신발 사이에서 졸졸거리던 소리, 뒤에서 법무사 파울 가스트가 끙끙거리던 소리, 그의 아내 하이드룬 가스트의 배 속에서 설사병 난 장기들이 꾸르륵 거리던 소리. 지린내가 나는 뜨뜻한 김은 공중에서 삽시간에 말갛게 얼어붙었다. 눈밭은 우리를 어찌나 혹독하게 다루던지, 맨엉덩이를 드러낸 우리를 아랫도리에서 나는 소리와 함께 외롭게 버려두었다. 그 유대 속에서 우리의 오장육부가 얼마나 초라하던지-24쪽

명아주는 희한하게도 색이 변하고 먹을 수 없게 되어서야 아름다워진다. 아름다움으로 무장하고 길 가장자리에 서 있다. 명아주를 먹는 철이 지나도 제 몸뚱이보다 커져가는 배고픔은 떠나지 않는다-28쪽

시멘트와 배고픈 천사는 공범이다. 허기가 땀구멍을 열어젖히고 그 안으로 기어들어간다. 허기가 파고들면 시멘트가 땀구멍을 봉해버린다. 사람이 시멘트 상(像)이 된다-43쪽

배고픈 천사가 내 빰을 그의 턱 위에 맞춘다. 그리고 내 숨결을 그네 뛰게 한다. 숨그네는 무엇과도 견줄 수 없을 만큼 심한 착란 상태이다. 눈을 올려 뜨면 저 위로 조용한 여름솜, 구름의 뜨개질, 내 뇌는 바늘 끝에 꿰여 하을에 고정된 채 꿈틀거린다. 뇌는 오로지 바늘 끝 그 한 점만을 지배한다. 그 점은 음식을 그린다. 어느 새 흰 식탁보가 깔린 식탁이 보이고, 발밑에서 자갈돌 부딪치는 소리가 난다. 솔방울 샘 사이로 해가 환하게 비친다. 배고픈 천사가 저울을 보며 말한다.--98쪽

어디에 있든지 내가 하는 모든 일에 배고픔의 외연이 되었다. 하늘이라는 이불과 땅의 먼지 사이 모든 장소가 각기 다른 음식 냄새를 풍겼다. 수용소 부지는 캐러맬, 수용소 입구는 갓 구운 빵, 수용소를 가로질러 공장으로 향하는 길은 따뜻한 살구, 공장의 나무 울타리는 설탕 입힌 견과, 공장 입구는 오믈렛, 야마는 데친 파프리카, 폐석 더미의 슬래그는 토마토수프,냉각탑은 볶은 가지, 증기를 내뿜는 연통의 미로는 바닐라롤케이트 냄새를 풍겼다. 잡초 속의 송진 덩어리에서는 설탕에 절인 모과 냄새가, 코트스 가마에서는 맬론 냄새가 났다. 그것은 마법인 동시에 고통이었다. 바람조차 허기를 먹여 키웠다. 바람은 추상이 아닌, 눈에 보이는 음식들을 싣고 왔다. -179쪽

불변하는 것들은 저 자신을 소모하지 않는다. 세상과 영원히 똑같은 관계를 지속할 뿐이다. 세상과 스텝의 관계는 매복이고, 세상과 달의 관계는 밝힘이며, 들개는 도주, 풀은 흔들림이다. 세상과 나의 관계는 먹는 것이다.-221쪽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또다시 강제추방을 당한다면, 나는 알아야 했다. 어떤 처음들은 내가 원치 않아도 다음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그 이어짐 속으로 나를 밀어넣는 것은 무엇일까. 왜 나는 밤이면 다시 처참해질 권리를 가지려는 것일까. 왜 나는 자유로워질 수 없을까. 어째서 나는 수용소가 내 것이기를 강요할까. 향수. 마치 그것이 필요하다는 듯-266쪽

내 보물 중 가장 무거운 것은 노동강박이다. 그것은 강제노동으로의 귀환이고 구조바꿈이다. 배고픈 천사와 닮은, 경허함을 강요하는 누군가가 내 안에 있다. 그는 다른 보물들을 조련하는 방법을 안다. 그는 내가 자유를 두려워한다는 걸 알고 있으므로 내 뇌를 타고 올라가 강박이라는 마법을 건다. -33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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