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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신확인, 차별이 내게로 왔다 - 평범하지 않지만 평범한 소수자들의 이야기 ㅣ 대한민국을 생각한다 11
인권운동사랑방 엮음 / 오월의봄 / 2013년 4월
평점 :
‘삶이란 놀라우리만치 짧다. 이제 기억 속에서 삶은 내게 다름과 같은 정도로 응축된다. 예를 들어 평범한 삶이 예기치 않은 불행한 사건 하나 없이 행복하게 흘러간다고 치자. 그렇더라도 나는 어떻게 한 젊은이가 시간이 턱없이 부족할 거라는 염려 없이 말을 타고 이웃마을로 가겠노라 결심할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을 정도다,’
‘삶은 왜 이렇게 끔찍하단 말인가? 삶이란 머리카락이 둥둥 떠다니는 수프와 같다. 그렇지만 여러분은 그 수프를 마셔야 한다.’ -플로베르의 앵무새 중에서-
‘대부분의 젊은 사람들이 그렇듯 나도 젊었을 때는 젊은 나이에 죽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슬픈 짐승 중에서-
‘가슴에 상처를 안고 사는 사람은 아름답다. 그대 내면이 아픔으로 꽉 차서 바람이 불어오는 쪽으로 선 사람이여!' -시인 이시영의 <비밀>중에서-
내가 좋아하는 글들이다. 이 글들을 좋아하는 이유는 단지 이 글에서 삶의 얼굴을 보기 때문이다. 그런데 참 이상한 것은 삶의 이중성, 머리카락이 둥둥 떠다니는 스프라는 얼굴을 본 순간, 나는 삶을 긍정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내면에 아픔이 가득 찼을 때 비로소 바람을 맞설 수 있는 용기가 생기듯이 삶의 맨얼굴의 이름을 우리는 이해해야만 한다.《수신확인, 차별이 내게로 왔다》를 읽으면서 역시나 눈물이 마르지 않는다. 비혼모, 트랜스젠더, 레즈비언, 게이, 이주자, 이민자, 장애인 등 세상에서 차별이라는 잣대로 고통 받고 있는 이들의 이야기는 읽는 내내 가슴이 저릿했다. 차별이라는 것이 이토록 사람을 가슴 아프게 하는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오히려 나는 다른 관점에서 차별을 말해주고 싶다.
비혼모 승민의 이야기에서도 여전히 비혼모에 대한 인식의 벽이 높으며 사회적 보장제도도 턱없이 낮다는 것은 인정한다. 성별정체성을 가지고 있는 트랜스젠더 혜숙의 지난한 삶을 마주하는 기분은 더욱 그렇다. 부모에게도 버림 받고 사회에서도 언제나 아웃사이더로 주변을 맴돌다가 감옥에서 자살시도까지 하게 되는 삶의 모습은 연민보다 더한 동정이 가슴에 남는다. 이주자 한나 엄마 역시 한국인 할아버지를 찾기 위해 자신보다 스무 살이나 많은 한국 남자와 결혼을 감행하지만, 베트남인이라는 이유로 차별과 학대를 견뎌가며 어린 한나를 위해 희생하는 모습은 여느 한국어머니보다 강하다. 그러나, 이주민 인권을 위한 보호는 미약하기만 한 현실이다. 게이인 정현은 그래도 사정이 나은 편이었다. 정현은 자신이 게이이기 때문에 자신을 사랑한다고 한다. 그렇기에 조금은 희망적인, 소수자였다.
‘문제는 결핍 그 자체가 아니라 어떤 특정한 결핍만이 사회적 낙인과 연관되고 그래서 차별과 배제가 작동한다는 사실이다.‘
이주민 타파의 이야기는 더욱 가슴 아픈 우리의 문화수준을 보여주는 이야기였다. 한국 사회에서 이주노동자들은 노동과 차별에 따른 빈곤의 생활을 전전하다가 쓸쓸히 죽어가는 삶의 모습을 가지고 있다. 시각장애인인 이숙의 삶에서도 차별과 빈곤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마찬가지다. 그 중 가장 밝고 명랑한 캐릭터의 민우는 소수자 중에서 정말 보기 힘든 캐릭터인지도 모르겠다. 시종일관 수다스러운 에이즈환자라니, 게다가 민우는 차별이라는 시선에 두려움이나 자격지심조차 보이지 않아 너무 평범해 보이기 까지 했다.
나는 이들의 이야기를 통해 ‘차별’이라는 기준이 매우 모호함을 알았다. 솔직히 나는 이들이 말하는 ‘차별’이라고 느끼는 부분들을 일종의 자격지심에서 비롯된 방어기제와 같은 것이라 여겼다. 이들의 삶에서 우리의 삶의 모습과 매우 같음을 느꼈기 때문이다. 우리라고 삶이 힘들지 않을까? 오죽하면 줄리언 반스는 ‘삶을 머리카락이 둥둥 떠다니는 스프라고’ 했겠는가 말이다. 소위 일반인 범주라고 하는 모든 사람들도 엄청난 삶의 무게를 지고 산다. 다만, 어떤 특정한 결핍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특별히 차별받는 것이 느껴지지 않을 뿐이다. 이렇게 삶이란 모두에게 힘들다. 삶은 모두에게 똑같은 크기로 배분 된다. 단지 소수자, 특정한 결핍을 가지고 있을 뿐인데 지나치게 자신을 비하하거나 타인에게 의지하려 하는 사람들을 나는 동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사회의 구조적 문제들은 개선해야 할 점이 많다는 것은 인정한다. 차별을 만들어내는 사회의 구조들이 서로 긴요하게 연결되어 있어 삶의 궤적들에 녹아들어 우리들의 삶을 불행으로 이끌어가는 것이다. 추천사에 홍성수 숙명여대 법학부 교수의 ‘차별을 철폐하려면 소수자들의 집단적 연대’ 이전에 소수자들이 ‘개별적 주체’로서 다시 등장해야 한다는 말이 있다. 나는 이 말이 굉장한 희망적인 연대의 의미로 들렸다.
한때 구족 화가 '앨리슨 래퍼'의 다큐를 보면서 그녀의 삶이 내게 선물처럼 느낀 적이 있었다. 정상적인 범주에서 그녀는 절대 아름다울 수 없었다. 생각해보라. 팔도 없고 가진 거라곤 기형적인 다리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그녀가 아름다울 수 있는가 말이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이 비장애인과 다르다는 ‘차이의 다름’을 인정하게 되면서 삶이 바뀌었다고 한다. 비장애인처럼 살기 위해 발버둥치는 것을 그만두고 나서야 자신이 비너스처럼 아름답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하는 그녀의 말을 듣고는 나도 모르게 그녀가 아름답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소수자들이 저마다 가지고 있는 ‘다름의 차이’를 먼저 인정하라고 말해주고 싶다. 그리고 당당하게 자신의 삶을 써가길 바란다. 소수자들이 ‘개별적 주체’로 존재하게 될 때 사회적 연대도 가능하다. 그리고 모두 아름다운 삶을 쓰는 주인공이 될 수 있다. 나는 이들이 아웃사이더이자, 소수자이자 소외된 이들이라 눈물이 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들이 자신의 삶을 아름답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점이 가슴 아팠다. 비혼모, 에이즈환자, 게이, 레즈비언이나 이주민이나 이민자들에게 드리워진 '다름의 차이'를 자신 스스로가 이겨내기 시작할 때 인권의 평등은 시작된다. 이들을 보는 시선 역시 ‘너무 붙이지도 않고 너무 떨어트리지도 않게’ 이들을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너무 붙이지도 않고 너무 떨어트리지도 않게’라는 전략은 정체성이 살아가는 데 힘이 되면서도 삶 자체를 정체성의 문제로 환원시키지 않도록 하는 데에도 도움이 될 수 있다. 우리가 단지 생존해 있는 상태에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정당하고 평등한 방법과 다른 사람 혹은 집단과의 관계, 사회적 구조 차원에서의 차별을 고민한다면, 어떤 사람의 목소리와 권리를 하나의 정체성으로 한정하고 그것을 통해서만 인정하려고 하는 것 또한 차별적이기 때문이다.
*소수자와의 '소통'이라는 아름다운 책을 만들어주신 인권운동사랑방에 감사를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