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문학의 맛있는 코드
석영중 지음 / 예담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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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도 빵 아니면 죽음을 달라고 외치던 시대가 있었다. 음식은 인간의 생존과 직결되기에 우리가 이루는 모든 문화의 얼굴을 담고 있다. 그래서 먹는다는 것은 성스러울 뿐 아니라 우리가 살아있다는 위대한 증거이다. 그렇다면 먹는 행위로 인간의 삶을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은 어불성설은 아니다. 문학이 현실의 삶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기에 문학은 음식과 더욱 긴밀한 관계가 형성 된다. 우리의 모든 삶에 음식이 있기 때문이다. 푸르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주인공이 마들렌 과자를 통해 어린 시절의 행복한 기억을 연상하듯이 음식과 개인의 기억은 긴요하게 연결되어 있다. 어린 시절 어머니가 나를 위해 만든 과자가 오로지 내 기억속에서 나만을 위해 존재하는 것과도 같이 음식은 개인의 역사와 함께 하며 오롯이 나만의 문화를 형성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 책은 음식을 통해 보는 러시아 문학 읽기 이다. 저자는 <뇌를 훔친 소설가>를 통해 한 번 만난 적이 있다. 문학에서 뇌가 작용된 순간들을 포착하여 색다른 문학읽기를 선보였던 저자의 첫 만남은 한마디로 써프라이즈였다. 문학에 대한 깊이는 물론이거니와 색다른 시각으로의 문학 읽기는 문학에 대한 외연을 넓혀주었을 뿐만 아니라 기존에 상상하지 못했던 문학의 비밀을 공유하는 기분이었다. 《러시아 문학의 맛있는 코드》또한 저자가 문학의 외연을 넓히기 위해서 야심차게 내놓는 또 하나의 시도이며 저자만이 보여줄 수 있는 문학 세계이다. 저자는 음식이 생존과 직결되는 만큼 문화를 읽기 위해서는 가장 필요한 코드라고 한다. 러시아 작가들은 문학 작품들에서 음식에 강한 집착을 보인다. 그렇기에 러시아문학에서 음식이라는 코드는 문화적인 기호로서 작품과 작가를 배출한 시대 상황을 조망하기에 탁월하다. 음식은 러시아 문학뿐이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 과학, 예술 등 인간의 모든 삶과 관련된 모든 영역에서 지속적인 고찰의 대상이 되어왔으며, 음식은 인간을 읽고 사회를 읽는 데 필요한 코드, 그리고 인간과 사회를 반영하는 문학작품을 읽는데 필요한 코드이다.

 

저자는 러시아 문학에 나타나는 음식의 특징을 세 가지로 요약한다.

 

 

 

첫째, 표트르 대제의 서구화는 고도로 정교한 문학에서 일상 행위에 이르기까지 문화의 모든 차원에서 ‘남의 것’과 ‘나의 것’의 대립을 유발했다. 이것은 음식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서구의 요리는 토종 러시아요리와 대립하는 가운데 다양한 이데올로기의 표출을 위한 창구가 되었다. 그 중에서도 표트르의 개혁은 러시아 식문화에 화려한 족적을 남긴다.  ‘남의 것’은 프랑스 요리로 서구의 문화영향을 말하며 ‘나의 것’은 러시아요리이다.  푸슈킨은 ‘간이 딱 맞게 끓인 양배추국’과 같은 소박한 음식을 좋아했다. 푸슈킨의 문학은 정확하고 간결한 문체로 써 내려간 작품들은 궁극적으로 소박함의 결정체로 응고되어 있는 것이 트레이드 마크이다. 프랑스 가정 교사와 러시아 유모는 푸슈킨에게 서구적인 것과 러시아적인 것을 차곡차곡 쌓이게 했고 이것은 가장 러시아적이면서도 가장 세계적인 작가로 성장하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따라서, 푸슈킨 문학의 가장 큰 특징은 서유럽의 문학적 전통을 받아들여 완벽하게 독창적인 러시아 문학으로 재창조했다는 데 있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앞에서 언급했던 러시아 문화의 특징, 즉 ‘남의 것’과 ‘나의 것’의 충돌과 융합을 대변해 주는 아이콘이라 할수 있다. [예브게니 오네긴]에서 푸슈킨은 18세기 귀족들이 프랑스 음식을 먹고 프랑스로 대화를 나누고 프랑스 문화에 매료되어 비프스테이크와 푸아그라와 샴페인을 즐겨 마시는 음식문화를 형성한 것에 대하여 이러한 것들은 “지루하고 번잡한 삶,내일도 어제와 다를 바 없는 삶‘이라 여겼다. (이 표현만으로도 푸슈킨의 문학이 한 눈에 다 들어온다)

 

곤차로프는 [오블로모프]에서 부동과 정체와 불변의 상징인 ‘고기파이’를 통해 ‘정체된 삶’을 문학에서 다루고 있다. 정체된 삶은 그 자체가 일종의 ‘죽음’이다. 죽음에 이르는 요리에 대한 문학에 대한 탐구는 식도락가 곤차로프의 지극히 비관적인 철학을 전달하고 있다. 결국 곤차로프는 비참하게 생을 맞이한다.

 

 

 

둘째, 988년에 러시아 토양에 이식된 동방 그리스도교는 모순적인 러시아적 정신을 탄생시켰다.

 

 

러시아 정교의 영향으로 일 년 중 반이 넘는 기간을 금식의 날로 지켜야 했던 러시아인들은 금식과 폭식을 번갈아가며 위장을 혹사시켰다. 이러한 영향을 가장 많이 받은 소설가는 고골이었다. 고골은 러시아 문학 전체를 통틀어서 가장 유명한 대식가이자 식도락가였다. 그러나, 고골은 자신의 식욕을 ‘악마’라고 부를 정도로 음식에 대해 냉혹하였는데 타고나길 대식가이자 미식가이자 식도락가였던 고골은 결국 영혼의 양식을 위해 육체의 양식을 끊어버리면서 문자 그대로 굶어 죽었다. 고골과 체호프에게는 음식이 범속한 현실을 전달하는 언어였다면 톨스토이에게서는 도덕을 설교하는 언어로 작용한다.

 

톨스토이는 그리스도교의 가장 큰 영향을 받은 작가로 톨스토이의 모든 작품에서 도덕적으로 완벽한 삶을 영위하는 소망을 읽을 수 있듯이 그리스도교의 삶을 위해 음식을 절제했고, 쾌락으로서의 식사를 중단하였다. 그리스도교의 영향은 톨스토이 뿐만 아니라 도스토예프스키에게도 같은 영향을 주었다. 그들에게 빵이란 성체성사 때의 ‘그리스도의 몸‘처럼 삶과 죽음을 연결해 주고 살아 있는 모든 생명을 하나로 묶어주는 개념이다.

 

 

 

 

 

셋째, 1917년 혁명은 ‘옛 음식’과 ‘새 음식’의 대립을 파생시켰다.


소비에트 시대 음식을 특징짓는 가장 중요한 두 요소는 식량부족과 식생활의 집단화라 할 수 있다. 그 중에서도 식량 부족은 소비에트 시대 전체에 걸쳐 나타난 아주 끈질긴 특성이었다. 혁명기 러시아에서는 더 이상 음식은 영혼의 양식이나 육체의 양식, 또는 절제의 미덕이란 있을 수 없는 일이 되었다. 굶주림 앞에서 음식은 그 어떤 이념도 설명도 관념도 다 사치가 된다. 존재의 근원을 지지해 주는 일종의 생명의 양식‘과도 같은 개념이다.

 

 

 

음식은 -한조각의 빵이건, 아니면 진수성찬이건-소비에트 문학에서 생명과 인간의 존엄성과 영원히 사라질지도 모르는 인간의 근본적인 가치들을 상징하는 가운데 ‘영혼의 양식’으로 승화된다. 요컨대 소비에트 시대의 음식은 그 원래의 기능, 즉 ‘일용할 양식’의 기능을 회복함으로써 오히려 고도로 정신적인 차원으로 올라간다. 불가코프에서 파스테르나크와 솔제니친에 이르기까지 러시아의 문인들에게 당장의 허기를 채워줄 한 끼 식사와 예술적인 영감은 동의어였다.

 

음식으로 문학 읽기는 문학이라는 스펙트럼의 다양성을 느끼게 한다. 이 느낌은 뇌과학으로 읽었던 문학읽기와 비슷한 느낌이다. 문학이 삶의 본질을 추구하며 삶의 모든 것에 의미를 담아 두었다면  그 모든 것 중의 하나인 음식을 쏘옥 빼내어 그림을 그려나가는 작업이 바로 이 책이 아닐까 한다. 아이러니 한 것은 작가의 생과 음식이 맞닿아 있는 부분이다. 그 부분에서는 음식은 개인의 역사를 담고 있는 아주 작은 개인의 문화이기도 하다는 생각에 미치게 했다. 한편으로는  문학을 뇌과학의 작용으로 보든 음식으로 문화의 코드를 읽어내든 그러한 작업들조차 문학이라는 거대한 스펙트럼의 일부분이라는 사실은 '문학' 그자체에 경외감을 느끼게 한다. 문학의 외연을 넓혀주며 다양한 책 읽기의 즐거움을 주는 저자의 다음 시도는 무엇일까를 기대하며 책을 덮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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