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짐승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9
모니카 마론 지음, 김미선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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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젊은 사람들이 그렇듯 나도 젊었을 때는 젊은 나이에 죽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소설의 첫 시작이다. 주인공은 백 살이다. 그리고 혼자 산다. 혼자 사는 백 살의 노인이 지구상에 아직 살아있다는 증거는 오로지 ‘사랑’을 기억한다는 것이다. 소설의 시작은 이렇게 사랑을 추억하는 여자로만 비춰진다. 나는 사랑에 목숨 거는 여자들을 볼 때마다 아직도 그런 감성이 남아있다는 사실과 누군가를 온전히 사랑한다는 것이 가능할까하는 의심이 든다.  불혹이라는 나이에도 누군가를 오롯이 사랑한다는 감정은 불가능하다. 하물며 백살이 되어서도 사랑이라는 감정을 기억하는 사람이라니, 이 여자의 사랑에 문득 호기심이 들었다. 그런데 이 여자 , 너무 불쌍하다. 아무도 이 여자를 기억해주는 사람도 없고, 찾아주는 사람도 없고,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상대가 유일하게 은행 창구 직원이 전부인 인생이라니 너무 서글픈 인생 아닌가.. 그렇다. 이 여자의 존재는 은행 외에는 아무도 모른다. 

 

세월이 흐르는 동안 나는 잊고 싶은 것을 기억하지 않는 법을 배웠다.

 

사실 책을 다 읽기 전까지는 단순하게 이 여자를 '사랑으로 삶을 기억하는 여자' 로 생각했다. 책을 다 덮고 나서야 이 여인에게 남은 것이 '사랑'밖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는 사실을 이해했다. 여자는 자기가 잊고 싶은 것을 기억하지 않으려, 어떤 불행한, 잊어야만 하는 일을 사랑의 포장지로  포장하는 작업이었던 것이다.  그제서야 이 여자의 집착을 이해할 수 있었다. 여자는 일반적이라 하기에는 사랑에 중독된 여자같았다. 지구상에서 연금을 찾으러 갈 때만 들리는 은행창구 직원을 제외하고는 어디에서도 존재하지 않는 여자의 유일한 행위란, 사랑했던, 오래 전에 떠났던 남자가 남겨 둔 안경이라는 이유로 같은 것을 본다는 착각을 하며 시력을 잃어가고 남자와 함께 뒹글었던  침대시트에 남아있는 체취를 기억하기 위해 수십년을 빨지 않고 시시때때로 냄새를 맡는 행위만 보아도 여자는 사랑에 집착과 강박증을 보인다. 여자가 남자를 만난 건,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던 해였다. 동독에 살던 여자가 서독에 사는 남자를 만난 것이 사랑의 시작이다.

 

베를린 자연사박물관에서 동물뼈대를 연구하던 동독 여자는 통일 후, 개미 학자 서독 남자를 박물관에서 만난다.  동독 여자와 서독 남자는 만나자마자 사랑에 빠진다. 서독남자를 만나기 전 동독 여자는 지극히 평범한 남자와 결혼하여 자식도 낳은 매우  보통의 삶의 모습이었다. 어느 날  동독 여자에게 찾아 온 심장마비는 ‘죽음을 가상 실험한’ 경험을 하게 했고, 이후 ‘인생에서 놓쳐서 아쉬운 것은 사랑밖에 없다.’는 문장을 가슴에 깊이 새긴다. 이후 여자는 마치 사랑만을 자신의 인생에 남겨둘 것처럼, 서독남자 프란츠만을 남겨두고 주위의 모든 것들을 지웠다.

 

태어나는 날부터 시작하여 내 인생 전체를 프란츠에 대한 오랜 기다림이라고 이해할 때만 내 인생의 의미를 갖는 것 같다. 가끔 나는 베를린 장벽도 프란츠가 마침내 나를 발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무너졌던 것이라고 생각한다.

 

동독 여자에게 프란츠를 만난 시점이 인생의  터닝 포인트였다면, 서독 남자 프란츠에게는 모든 것이 예전 그대로라는 점이 가장 큰 차이점이다. 사랑은 여자의 인생에서 모든 것을  휩쓸어 갔다.  순간의 열병은 남편과 딸을 사라지게 했고,  남자는 열 두시 반이 지나면 어김없이 돌아가야 할 집이 있다는 것이 동독 여자를 슬프게 했다. 백 살이 넘은 동독 여자가 기억하는 것은 오로지 서독 남자와 관련된 이야기들 뿐이다. 동독 여자는 서독 남자 집에 몰래 찾아가 부부 사이를 훔쳐보기도 하고, 둘이 여행을 떠나면 호텔까지 쫓아가는 집착을 보이며 프란츠의 아내와 끊임없이 자신을 비교한다. 

 

‘사랑이라는 것은 공룡과도 같아서, 모든 세상이 그들의 죽음을 즐긴다. 트리스탄과 이졸데, 로미오와 줄리엣, 아난 카레니나, 펜테질리아, 항상 죽음만이 있고, 항상 불가능한 것에 쾌락이 있다.’ 이렇게 여자는 비극의 주인공들과 죽어갔던 것들에 빗대어 자신의 사랑을 생각한다. 공룡이 멸종하였기에 영원히 아름답게 기억될 것이며, 트리스탄이 사랑을 아름답게 하기 위해서  장애물을 하나씩 설치했던 것이라고 , 오르페우스가 사실은 에우리디케를 구할 마음이 전혀 없었기에 일부러 뒤를 돌아보는 것으로, 로미오와 줄리엣은 파멸했기에 불멸의 사랑으로 남은 것을 떠올려보며 애써 자신의 슬프고 불행한 사랑을 포장하는 것이다.

 

백 살이 넘은, 아니 넘지 않은 여자는 인생을 '사랑'으로서 관조한다. 여자에게 시간이란 이미 무의미하다. 단지 남자가 떠오르는 기억의 순서가 곧 시간이 된다. 평탄한 삶에 시작된 작은 균열은 여자에게 죽을 때까지 회한처럼 남아있지만, 여자는 단 한번도 후회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인생에서 놓쳐서 아쉬운 것은 사랑뿐인 것처럼, 기억속의 남자를 사랑하는 일이 삶의 전부이다. 그러나, 처음부터 눈치챘어야 했다.  로미오와 줄리엣이, 트리스탄과 이졸데가,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가 비극이기에, 죽어갔기에 아름다운 것처럼, 여자의 사랑은 비극이었다는 것을 깨달았을 즈음에는 여자의 생이 너무 가혹하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여자의 사랑은 사회의 혼란스러움, 통일이 주는 혼란스러움을 잊고자 현실도피용의 피난처와 같은 것이다.  불안함이 있을때 한가지 집중할 상대를 찾아 헤매는 것처럼 , 여자에게는 집중할 그 무엇이 남자였을 뿐이다. 여자는 남자가 성경을 알고 자신은 스탈린의 노래를 알았다는 사소한 것조차도 불안해하는데 이는  소설에 등장하는 동독과 서독의 젊은이들 모두가 겪는 문화적 충돌이다.  오랜 친구 부부 앞에 나타난 젊은 서독여자라든지  동독과 서독을 넘나드는 이 시대의 사람들은 시대의 혼란스러움이 그대로 삶과 사랑으로 나타났다.  통일이라는시대의 변화는 다른 형태로 여자의 삶에 작은 균열을 만들었고 이어 사회 전체의 흔들림으로 퍼져 간다. 기이하게 흔들리고 있는 시대를 맞이하여 기이한 사랑을 한 여자의 기구한 이야기는 여자가 기이해서 기이한 사랑을 하는 것인지 기이한 시대라서 누구나 기이한 사랑을 하는 것인지 모호함을 남기지만, 여자가 기억하는 남자의 기억들만은 선명한 자국을 남긴다.  흑백 텔레비젼 안에 유일하게 빛깔을 띠고 있는 이유는 이미 남자가 오래 전에 죽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여자에 의해서...... 아, 너무 슬픈 사랑을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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