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의 연인들 - 김선우 장편소설
김선우 지음 / 민음사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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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김선우 시집을 읽고 당혹스러움을 감출 수가 없었다. 너무도 적나라한 여성성의 날 것 그대로의 농밀함이 배여 있기 때문이었다.  이상하게도 그 단어들은 태초에 하나였지만, 무언가에 의해서 분리되어 있던 단어들처럼 모호하지만 친숙한 것들이다그렇게 다시 탄생되는 언어들은 원초적인 생명의 시작으로 거슬러 올라 간다. 마치 강을 거슬러 오르는 연어의 힘찬 모습처럼...

 

물로 빚어진 사람

 

월경 때가 가까워오면

내 몸에서 바다 냄새가 나네

 

깊은 우물 속에서 계수나무가 흘러나오고

사랑을 나눈 달팽이 한쌍이 흘러나오고

재 될 날개 굽이치며 불새가 흘러나오고

내 속에서 흘러나온 것들의 발등엔

늘 조금씩 바다 비린내가 묻어 있네

 

 

무릎베개를 괴어주던 엄마의 몸냄새가

유독 물큰한 갯내음이던 밤마다

왜 그토록 조갈증을 내며 뒷산 아카시아

희디흰 꽃타래들이 흔들리곤 했는지

푸른 등을 반짝이던 사막의 물고기떼가

폭풍처럼 밤하늘로 헤험쳐 오곤 했는지

 

알 것 같네 어머니는 물로 빚어진 사람

가뭄이 심한 해가 오면 흰 무명에 붉은,

월경 자국 선명한 개짐으로 깃발을 만들어

기우제를 올렸다는 옛이야기를 알 것 같네

저의 몸에서 퍼올린 즙으로 비를 만든

어머니의 어머니의 어머니들의 이야기

 

월경 때가 가까워오면

바다 냄새로 달이 가득해지네

 

물의 연인들이전에 작가의 모든 시에서는 이미 물로써 생명의 시작을 말하고 있었다. 마치 소설을 그린 시처럼, 이 시와 소설은 데칼코마니로 찍어낸 것처럼 똑같은 생명의 흐름을 느끼게 한다.  작가의 생명의 서사는 ' 흘러나오고.. 흘러나오고... 흘러나오는'  자연의 서사를 따라 거대한 생명의 고리로 연결되어 '어머니의 어머니들'로 이어져 내려온다소설에 등장하는 와이강또한 그러한 생명의 서사를 가지고 있다. 와이강에 버려진 한 소년 연우는 스웨덴에 입양된 후 스웨덴에서 유경을 만나는 것으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와이강에서 나고 자란 유경과 다른 인연으로 만나게 되는 당골네의 손녀딸 수린과 해울이라는 소년과의 만남이 있다.

 

유경의 생명의 시작은 어머니의 희생으로 가능했다. 한 남자가 문학소녀를 강간하고 임신시키며 문학소녀의 인생은 전혀 다른 길을 걷게 된다. 늘 매 맞는 엄마를 보고 살아야 했던 유경의 마음은 언제나 분노와 절망과 고통으로 물들어간다. 끝나지 않을 것 같은 폭행은 엄마로 인해 막을 내리게 되지만, 대신 엄마는 교도소에 가야했다. 엄마의 출소를 앞두고 새로운 출발로 들떠 있던 유경에게 날아 온 엄마의 자살은 유경을 다시 침잠하게 한다. 삶에서 도망치듯 엄마가 평소 가고 싶어 하던 위드그리실로 떠난 유경에게 찾아 온 눈부신 사랑은 엄마의 선물처럼 느낄 정도로 유경의 삶에 처음으로 드리운 햇살처럼 눈부시고도 밝은 세계를 선사하지만 찰나에 불과한 반짝임이었다. 연인의 죽음 이후 유경은 지독한 상실감에 빠져 히스테리성 기억상실증에 걸려 연인의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하지만 몸의 기억은 너무도 선명하게 요나스를 추억하고 있다.

 

잃어버렸다. 내가 그를 잃어버린 것인지 그가 나를 잃어버린 것인지 모르겠다. 아무튼 자기 걸 그렇게 잃어버리다니

 

죽어가는 유경에게 담쟁이를 돌보는 일은 엄마와 연인을 기억하게 해주는 유일한 연대이다. 담쟁이에게 물을 주면서 엄마를 기억해내고, 연인을 기억한다. 또한 담쟁이는 유경과 동일시 되기도 한다. 물을 공급받을 수 없는 상황에서 신진대사를 최소화하여, 거의 죽은 것에 가까운, 이를테면 죽은 척하는 상태의 담쟁이의 모습은 바로 유경의 모습이기도 하다. 그렇게 세상에서 오로지 담쟁이라는 연대만을 지닌 채 살아가고 있던 유경에게 와이강에서 날아 온 절박한 통의 편지

 

나는 살인을 저지를 것 같아요,

수린이 죽어 가요. 우리는 유령이 되고 있는 중이에요.

모두 죽어 가요. 제발 와 주세요

 

 엄마를 품고 있던 와이강에서 유경은 언제나 생명을 느껴왔다. 무수한 생명을 담고 흐르던 강은 댐 공사로 인해 흐름이 멈춘 상태였고 ,  강은  더 이상 생명을 품고 있지 않았다. 죽어 가는 와이강과 한 몸이라도 되는 양 온 몸이 나무껍질처럼 변해가며 죽음의 향기를 뿜는 수린을 보며 유경은 고통에 전율하며 그동안 잠들어있던 모든 감각들을 깨운다수린을 사랑하는 해울은 수린을 살리기 위해 댐 공사를 필사적으로 막으려 하지만, 거대 권력 앞에서 해울은 무너질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오히려  와이강의 비극적인 서사는 죽은 척하는 상태의 유경을 일깨워준다. 한 번도 타인의 삶에 관여한 적도, 깊은 인연을 맺은 적도 없던 유경의 삶에서 처음으로 누군가를 위해 무언가를 할 수 있다는 책임감은 담쟁이와 같은 삶으로부터 구원이다. 그렇게 타인과의 연대는 유경을 더이상 담쟁이처럼 살게 두지 않는다. 이후 유경은  생명이 흐르는 강에서 어머니의 어머니의 어머니들과 함께 하는 원초적 욕구이자 관능의 몸짓을 맘껏 누리게 된다. 김선우 작가의 '여성성'과 '생명의 서사'는 모호함으로 가득한 은유로 시작되지만, 그녀가 보여주고 있는 소설의 언어들은 생명을 잉태하고 있다.  소설이 시처럼 보이는 , 현재와 과거의 경계가 없는, 김선우만의 독특한 수사를 맘껏 누릴 수 있는 아름다움이 있다. 

 

이렇게 아파서 어떻게 해.. 사랑이... 요나스, 도와줘, 저 애를 좀, 도와줘, 이래도, 사랑이, 이런, 사랑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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