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신 무의식의 저널 Umbr(a)
서지 앙드레 외 지음, 강수영 옮김 / 인간사랑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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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가 무엇인지 아직도 모르겠다. 신의 존재를 믿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나라의 뿌리 깊게 내려 온 종교근본주의는 질색이다. 근본주의자들은 자신의 종교가 아닌 타종교에 지나치게 배타적이고 신비주의적 성향이 너무 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주위에는 언제나 종교인으로 넘쳐난다. 나는 때론 그들의 호의에 감사하면서도 대체 ‘나의 종교’는 무엇인가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해야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그렇다고 나는 무신론자 또한 될 수 없다. 언제나 마음 한 켠에 하나님께 향한 깊은 사랑과 감사가 넘쳐나고 있는 것을 볼 때, 나는 하나님을 떠나서는 살 수 없는 종교인인 것은 분명하다. 어쩌면 나는 현실의 종교와 타협점을 찾지 못해 늘 방황하는 가련한 생물에 불과한지도 모르겠다.

 

 

 

그럼 종교는 과학으로 설명되어질 수 있을까?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은 분명 과학의 영역이다. 그러나, 종교는 과학이 될 수 없다. 그것은 누구나 잘 아는 사실이다. 과학자들이 종교를 과학으로 설명하기 위한 접근은 때론 얼마나 눈물날 정도로 우스운지 과학자들이 고작 몇 억년전의 빅뱅이론을 찾아내고서는 ‘신은 태초에 존재하지 않았음을 증명하려고 ’ 할 때마다 인간의 유한한 삶이 차라리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유한하기에 단 하나의 사실을 ‘앎’에 대해서 마치 그것이 전부인양 치부해버리는 어리석음을 발견할 때마다 난 오히려 즐거웠다. 예를 들어, 야곱이 하나님과 씨름한 성경 구절의 한 장면을 과학으로 설명한다고 치자. 그것이 어떻게 과학적 이론으로 설명되어질 것인가 말이다. 뿐만 아니라, 모세가 가른 홍해바다의 기적은 또 어떻게 설명되어질 수 있을까.

 

 

프로이트는 어떤 행위가 종교적이라면 인간 존재의 덧없음을 해결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라고 했다. 절대적인 종교적 행위나 믿음이란 없다. 신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어떤 것이 있다면 정신분석에서는 대문자 타자이며 그것이 욕망이다. 라깡은 이를 “검은 신”이라고 부른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기존의 실증주의적 과학과는 달리, 이 책은 종교적 문제, 즉 기원과 신, 창조의 문제를 사유한다. 기존의 과학이 종교의 믿음 자체를 허상으로만 치부하여 비판했던 것과는 달리 종교가 전유하고 있던 창조, 주체의 기원, 믿음, 소외, 희생과 봉사, 예외, 신성성, 사랑 등의 철학적 사유에 대한 비판이다. 정신분석이론의 틀 안에서 종교를 사유함에 있어 일신교에 천착하여 정신분석으로 접근한 것이 이 책의 특징이다.

 

 

얼마 전 책에서 읽은 한 구절이 떠오른다. 기독교의 핵심은 인간의 보편적 유죄가능성이므로 이를 통한 공동체의식과 연민이 중요하다는 내용이다. 이를 세속적인 시각에서 풀어보면 너와 내가 여리고 불완전한 존재라는 인식이다. 정신분석에선 존재의 결여와 욕망의 불가피성이 바로 인간의 보편적 조건이라는 말이다.

 

 

라깡뿐만 아니라 프로이트에게도 종교는 다름 아닌 이 세상, 즉 현세와 이해관계를 갖고 있다. 현세는 근대 과학과 근대 과학이 낳은 주체가 설립된 이후, 그리고 그 관계 속에서만 적절성을 갖는다. 정신분석은 지속적으로 이 지점, 즉 대타자에 대한 질문-어떻게 완전히 텅 비었음에도 불구하고 신이라는 지위를 유지할 수 있는가-에 이론적 노력을 기울여왔다.

 

 

프로이트의 분석에서 신의 고유한 역할이란 인간의 법을 보증하는 것, 법의 금지적 성격에 과외의 힘을 부여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 라깡은 프로이트를 좇아서 법은 부정적일 뿐만 아니라 욕망을 구성함으로 긍정적이라고 답한다. 종교는 욕망을 단순히 억압하는 것이 아니다. 종교는 사실 욕망이 원하는 것을 주지 않는다. 왜냐하면 향유(쥬이상스)는 기표가 아니라는 전제 하에 의식적으로 주어질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종교는 우리가 향유를 갈망한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줌으로써 우리가 진정 누구인지를 이해하게 한다. 욕망을 억압하지 않고 우리 삶의 기본적 현실을 깨닫게 해준다. 하지만 이 라깡주의 시각은 근본적으로 종교의 개념과 종교 비판을 변형시킨다. (이는 라깡주의가 진리와 현실의 개념을 바꾼 것과 같은 개념이다. )

 

 

라깡의 이론에 의하면 승화는 근대성이 실재와 맺는 변형된 관계를 일컫는 이름이다. 비록 인간의 “욕망하는 기계”는 오로지 대상을 향해 있지만 욕망의 대상으로서 실재는 도달 불가능하다.

 

 

라깡은 “정신분석은 결코 종교를 이길 수 없다. 종교는 파괴 불가능하다. 정신분석은 결코 승리할 수 없다. 정신분석은 살아남거나 죽을 것이다.”

 

 

라깡은 “프로이드에게 돌아가라”며 엄격하게 욕망을 분석하는 ‘구조적 방식’을 유지하였다. 결국 라깡주의의 이론은 종교로 귀결되지 않으며 라깡의 입장에서 정신분석은 종교에 대한 대안을 제공해 주어야 하며, 이는 프로이트의 비판에 매우 근접한 것이다. 프로이트와는 달리 라깡은 종교에 미래가 있다고, 혹은 적어도 정신분석에서조차 일반적 지평으로 남아 있을 것이라고 인정하는 듯 보인다. 결국 종교가 갖는 의미는 인간존재가 실재에서 토대를 갖도록 보장해 줌으로써 인간과 인간의 삶에 진정한 의미를 부여해준다는 것에 의의가 있다. 라깡의 이론과 접목하여 종교에 대한 철학적 사유는 색다른 종교로서의 의미를 부각시켜주고 있다. 거울 이론과 같이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이 상상속의 환상과도 같은 종교가 되게 하지 않기 위해서는 이러한 종교적 배경을 끊임없이 사색해야 한다. 비판과 사색을 하다보면  언젠가는 종교의 본질에 닿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책을 덮는다.

 

 

p.s: 이 책은 여덟 편의 글이 실려 있는데 <윤리와 자본, 무에서부터>에서 갑자기 한 페이지에 두 면의 글이 실려 읽기에 매우 어려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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