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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레바퀴 아래서 (무선)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02
헤르만 헤세 지음, 한미희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1월
평점 :
젊은 시절 끝없이 내 존재의 의미를 찾고 싶어 방황했었다. 누구에게나 한번쯤은 찾아오는 존재에 대한 고뇌로 인해 늘 깊은 심연 속에 잠기어 살았던 그때, 불멸의 고전 《수레바퀴 아래서》의 한스는 미모사처럼 예민한 나를 고민하게 했다. 제목에서 주는 수레바퀴가 거대한 삶의 무게처럼 느껴졌을 정도로 한스의 죽음이후 나는 오히려 방황을 멈추었고 더욱 삶을 주시하게 되었다. 이후 나는 한스를 가끔 떠올리곤 한다. 내 기억속의 한스는 젊은 날의 모습 그대로 , 한치도 자라지 않은 채로 멈추어 있었다.
내가 기억하는 한스는 소심하고 말이 없는 조용한 아이였다. 한스는 “천재나 재능 있는 인물을 한 명도 배출하지 못한 오래된 작은 마을에 저 위에서 신비로운 불꽃 하나가 뚝 떨어진 듯” 태어난 아이가 바로 한스였다. 장래가 촉망되는 아이에게 늘 그렇듯이 한스의 아버지 요제프 기벤라트는 한스가 마을을 대표하는 유명한 관리가 되어주기를 바랬다. 그때보다 백년이 지난 지금의 부모들이 아이들이 커서 안정적인 직업을 가지기를 바라는 마음처럼 한스아버지도 그런 마음이었다. 한스가 살던 그때는 산업혁명이 막 시작될 무렵이었고 작은 돈벌이로 가난했던 수공업자들이 공장주로 변하게 되면서 갑자기 부유해지는 소상공인들이 많았다. 그렇게 갑자기 부유해진 시민들은 자신들이 많이 배우지 못한 것에 대한 보상처럼 더욱 공부에 집착하게 되었다. 부유해진 소시민들은 더 이상 관리들에게 잘 보일 필요가 없었지만, 부유해진 이들 모두가 자식들은 공부해서 관리가 되길 바라는 이율 배반적인 소망이 싹트고 있었다. 마치 우리나라의 베이비부머 세대들이 뼈빠지게 일하고 자식들은 좋은 대학에 가서 안정적인 직업을 꿈꾸는 것처럼, 예나 지금이나 이율 배반적인 형태는 변하지 않고 되풀이 되고 있다.
다행이도 그때 나는 한스 처럼 재능이 있는 아이는 아니었다. 그리고 부유한 아버지를 가지지도 못했기에 한스처럼 깊은 번뇌와 방황은 하지 못했다. 하지만 한스와 같이 무언가에 억눌려 있는 느낌을 가진 친구는 많이 있었다. 한스는 늘 말이 없었고 조용했지만, 또래와 같은 천진난만함이나 기분 좋은 웃음을 지을 줄 몰랐다. 게다가 또래 아이들이 만들어내는 얼토당토 않은 말장난조차 알지 못했다. 아이답지 않은 아이 한스를 걱정해주는 유일한 친구란, 구둣방 주인 플라이크이지만, 그저 어쩌다가 충고나 조언같은 말한마디 해주는 것이 다인 사이였다. 어쩌면 지금 나는 한스보다는 플라이크의 시선과 맞닿아 있는지도 모르겠다. 과거 한스를 만난 이후 나는 이미 많이 자랐고, 한스는 여전히 자라지 않은 채 그곳에 머물러 있기에 이제는 친구가 아니라 그저 걱정해주는 한 어른에 불과한 거리감과 시차로 한스를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내가 기억하는 그때의 한스는 부모가 만들어준 틀에서 한치의 오차도 없이 순종적으로 살았다. 아버지의 뜻이 바로 자기의 뜻이었고 교장선생님과 마을 사람들의 기대에 긴장하며 하라는 대로 따라가는 착한 아이였다. 그런 한스를 선생님들만 좋아했다. 규정화 된 아이, 천편일률적으로 찍어내는 사회 규범에 적합한 아이로서 한스는 정말 완벽한 아이였기에...
한스가 수재들만 가는 수도원에 합격하자, 아버지와 교장선생님은 더욱 기뻐했다. 수도원에 합격한 기쁨도 잠시 좋아하는 낚시를 뒤로 하고 교장선생님과 선행학습을 하면서도 한스는 싫은 내색조차 하지 않았다.
이후 수도원에서 보내는 몇 해 사이 한스는 많이 변해있었다. 어쩌면 그때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 하일너를 만난 것이 한스에게는 운명이라면 운명과도 같은 만남인지도 모르겠다. 하일너는 자신만의 생각과 말을 가지고 있었고, 남들보다 더 뜨겁고 더 자유롭게 사는 친구였다. 한눈에 봐도 수도원에서 두꺼운 안경을 쓰고 공부밖에 모르는 아이들과는 다른 차원의 아이였다. 다른 아이들은 수도원의 규율을 어기지 않으려고 노력하였지만, 하일너는 반항하기 좋아하였고 혼자 무언가 고민을 하는 모습을 종종 보이곤 하였다. 하일너가 다른 아이들과 더욱 달랐던 다른 하나는 자연을 사랑하며 예찬할 줄 아는 감성이 있었다는 것이었다. 친구가 없던 한스가 보는 하일너는 마치 소중한 보물을 간직한 사람이 가질 수 있는 자신감과 기분 좋은 무언가가 스며있는 그런 친구였다. 하일너를 만나게 되면서 한스에게는 행복한 시간이 늘었지만, 대신 공부와는 점점 멀어지게 되었고, 이후 한스는 선생들에게 장래가 촉망되던 아이에서 문제아로 전락하게 된다. 결국 하일너는 수도원의 엄한 규율에 끊임없이 반항하며 자유를 찾아 일탈을 꿈꾸고 그런 하일러와 단지 친했다는 이유로 한스는 선생들로부터 투명인간 취급을 당하는 지경에 이르르자, 신경쇠약과 두통에 시달리게 되었다.
깊어가는 가을

조용히 떨어지는 낙엽,
갈색으로 변하는 풀밭,
짙은 아침안개,
기력이 다해 죽어가는 식물들.
그런 것들을 보면서
그는 모든 병자가 그렇듯 무겁고 절망적인 기분에 빠져 슬퍼졌다.
그는 그것들과 같이 스러지고,
같이 잠들고,
함께 죽고 싶었다.
하지만 그의 젊음이 그것을 거부하고 조용하고 끈질기게
삶에 매달려서 마음이 괴로웠다.
수도원 생활에서 신경쇠약으로 돌아온 한스에게 펼쳐진 절망이 그대로 느껴질 정도로 한스는 매일 죽음을 생각한다. 그러나, 젊음이란 녀석이 매달리고 또 매달려서 바퀴를 돌릴 수 밖에없는 삶의 연속으로 한스는 겨우 겨우 생명을 유지해 나간다. 그 사이 사랑이라는 이름의 여인 애마와의 잠깐의 황홀함이 있었고 공장에서 톱니바퀴의 이를 맞추는 노동이 주는 찰나의 기쁨도 잠시 맛보지만, 결국 한스는 모든 것을 극복하지 못한다. 자신의 생각과 말을 가지고 있던 하일너와 단 한번도 자신의 생각과 말을 표현한 적이 없던 한스와 가장 대조적인 부분이다. 하일너는 비록 수도원에서 쫓겨났지만, 자신의 삶을 살았고, 한스는 한번도 자신의 삶의 주인공으로 살아보지 못하였기에 결국 삶이라는 거대한 수레바퀴 아래에 깔려버린다.
나는 지금도 한스를 생각하면 강한 연민에 사로잡힌다. 한순간도 당당하게 자신의 의견을 말하지 못했던 친구 한스. 아버지에게 강요된 삶과 학교가 주는 틀에서 규범화되는 학교의 비극을 재현한 수도원에서 그런 억압적인 것들에 길들여진채 살아가야 했던 한스의 모습은 백년이 지나도 여전히 되풀이 되고 있는 이 사회의 이율 배반적인 모습이다. 어쩌면 헤르만 헤세는 자신의 삶에서 자신을 억누르던 모든 것들을 위해서 그리고 계속 이어질 이 땅의 수많은 '한스'를 위해 《수레바퀴 아래서》를 집필한 것이 아닐까 한다. 우리의 삶에 주어진 운명의 수레바퀴에 깔리지 않기 위해서 매일 돌려야 하는 이 ‘거대한 삶의 바퀴'가 여전히 계속되는 한 우리 곁에 자신의 정체성을 잃은 '한스'는 언제나 존재한다. 과거에는 친구로서 지금은 한스를 지켜보는 어른으로서 삶의 수레를 매일 끌어야하는 우리들의 삶을 위해서 내 안에 잠들어있던 한스를 다시 한번 깨웠다. 나는 내 삶의 주인공인지를 ...
“그럼, 그래야지. 친구, 아무튼 지치면 안 되네. 그렇지 않으면 수레바퀴 아래 깔리고 말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