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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계단 - 제47회 에도가와 란포상 수상작 ㅣ 밀리언셀러 클럽 29
다카노 가즈아키 지음 / 황금가지 / 2005년 12월
평점 :
추리소설을 좋아하지 않음에도 최근 반한 작가가 있다. 바로《제노사이드》의 다카노 가즈아키이다. 방대한 스케일과 정교한 짜임새에 감탄을 금치 못했던 다카노 가즈아키의 전작과의 만남은 자연적으로 <13계단>으로 이끌었다. 이 책은 제노사이드 한참 전의 작품이라 《13계단》을 다 읽고 나서 《제노사이드》를 다시 펼쳐보게 되었다. 두 가지 책에서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공통된 뜻을 조금 알 수 있을 것 같았다.작가들은 한 작품만으로 자신의 뜻을 피력하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한 작가의 작품이 마음에 들면 다른 작품도 부러 찾아서 읽어보게 된다. 작가가 작품에서 말하고자 하는 뜻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작가의 다른 책(작품)은 필수라는 생각이 든다. 제노사이드를 읽고 다카노 가즈아키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13계단은 나에게 그런 과정과도 같았다. 두 가지 책에서 다카노 가즈아키가 말하고자 하는 문제의식은 '보편적인 선'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이란 생각이 든다. 작가는 인간의 선에 대해 사회에 뚜렷한 문제의식을 제기하고 있으며, 우리가 선이라고 말하는 법이란 진정한 선인가?에 대한 것과 , 우리가 악이라고 규정하고 있는 범죄자들이 진정한 악인가? 에 대하여 인간에게 보편적인 선이란 얼마나 이루기 힘든 것인지를 간접적으로 깨닫게 하고 있었다. 《13계단》은 제노사이드의 한참 전의 작품이지만,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보편적인 선'에 대한 물음이라는 맥락에서 작가의 색깔이 잘 드러나고 있다.
<13계단> 은 사형수의 계단을 뜻한다. 마지막 사형수가 오르는 계단. 그 계단을 걸어가는 동안 주마등처럼 스쳐가는 자신의 마지막을 기억하는 그 순간의 공포와 긴장은 충분히 짐작되어 진다. 그러나, 나는 언제나 사형수보다는 그 사형을 집행하는 교도관들의 고통이 더 클 것이라 여겨진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양심(선)과 일이 부딪히는 일은 종종 있기에 자신의 일이지만 누군가의 죽음을 집행해야 하는 것이 일이라면, 심적인 부담감은 더욱 크리라 여겨진다. 일과 양심(선)이라는 두 가지 고통에서 싸워야 하는 교도관은 특히나 그런 심적 부담감이 더하리라 여겨진다. 더군다나 살인범이 어느 면으로 보나 죄가 없는 경우에는 더욱 그런 고통은 심하리라 .... 제노사이드에서는 가장 이상적이고도 인간적인 보편적인 선善을 보여주고 있는 인물로서 예거라는 주인공이 등장하지만 이 소설속에서 가장 이상적이고 보편적인 선을 그리고 있는 인물은 교도관 난고이다. 난고는 이런 양심(선)과 자신의 일(직업)과의 대립에서 갈등하며 심적 부담을 덜기 위해 사형집행자 사카키바라 료의 무죄를 입증하라는 익명의 독지가를 돕게 된다.
3개월 뒤 사형이 집행되는 사카키바라 료는 자신에게 일어난 극도의 공포와 긴장감으로 사건당일의 일을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 그가 기억하는 것은 단 하나 ‘계단’이 있었다는 것. 사카키바라 료는 오토바이를 타고 가다가 사고를 내고 그 자리에서 기절하였는데 깨어나보니 살인범이 되어 있었다. 인근 지역에 우헤이 부부가 살해당하였으며 옷에 이 부부의 혈흔이 묻어 있어 살인범으로 지목된 것이다. 사카키바라 료가 기억하는 단 하나의 단서 ‘계단’ 만을 가지고 무죄를 입증해야 하는 상황. 그러나, 우헤이 부부의 집에는 계단도 없었다.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교도관 난고는 성실하고 착했던 준이치가 가석방 되자 조사를 같이 할 것을 부탁한다.
여기서 가석방 된 준이치는 사형집행을 받는 사카키바라 료와 대립된다. 모든 정황이 사카키바라 료가 무죄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지만 료에게 사형집행이 내려진 직접적인 이유는 살인자가 죄를 뉘우치면 형량을 줄여 주는 ‘개전의 정’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억상실증이었던 사카키바라 료는 자신이 뉘우쳐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있었다. 반면 준이치는 교도 기간 내내 성실하고 착했으며 ‘개전의 정’으로 가석방되었다. 이런 구조적인 모순을 통해서 작가는 '인간의 보편적인 선'이라는 문제에 다가가고 있다. 또한 피해자의 가족이 범인을 용서해도 그것은 형 집행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한다는 모순에서도 같은 접근을 하고 있다. 여기서 교도관인 난도가 말하는 범죄 관리 시스템 또한 모순덩어리이다. 가석방자를 감시하는 보호사가 가석방자를 협박하거나 금품을 갈취하는 행위가 비일비재하며 작은 범죄로 확대해석하여 오히려 사회에서 그들을 고립시키는 모습을 보며 법의 사각지대를 리얼하게 재현해주는 동시에 작가의 뜻은 더욱 확실해진다.
사형집행 제도에 대해 여전히 갑론을박이 오가고 있지만, 우리나라는 1997년 이후로 사형이 집행되지 않은 '실질적 사형 폐지국'이다. 최근에 울산 자매를 살해한 김홍일에게 사형 집행이 선고되자 대부분이 사형폐지는 시기상조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희대의 연쇄살인범 오원춘이 무기징역을 선고 받자 네티즌들은 비분강개했고 형이 낮다며 서명운동을 벌이기까지 했다. 바로 이 부분은 나 역시도 이해가 가지 않은 부분이었는데 이 책을 통해서 그 이유를 알 수 있게 되었다. 한두 명을 살해한 살인범은 간단한 재판 과정을 거쳐 먼저 처형되고 살해한 사람의 수가 많을수록 거쳐 가는 행정절차도 늘어가며 사형 집행 시기도 연장되는 법의 구조적인 모순점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뿐 아니라 사형 집행을 결정하는 법무부 장관이 범죄의 여부가 아닌 개각 등의 정치적 고려나 여론의 향방에 따라 결정하게 되는 것은 법의 사각지대임을 보여주고 있다. 다카노 가즈아키는 <13계단>에서 사형 제도에 대해 냉철하고 다각적으로 분석하여 사건과 밀접하게 극을 진행하는 동시에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폭로하고 있다. 이런 생생한 사회적 구조적 모순을 파헤치는 것이 사회파 추리소설의 가장 큰 장점이지만 사형제도에 대한 문제의식을 적확하게 인지할 수 있도록 하는 다카노 가즈아키의 추리소설은 사회파 추리소설의 완성을 이룬 작품으로 사형집행제도가 이땅에서 사라지지 않는 한 두고두고 회자될 책이 되지 않을까 한다.
법률은 옳습니까? 진정 평등합니까? 지위가 있는 사람이나 없는 사람이나, 머리가 좋은 사람이나 나쁜 사람이나, 돈이 있는 사람이나 없는 사람이나, 나쁜 인간은 범한 죄에 걸맞게 올바르게 심판받고 있는 것입니까? 제가 사무라 교스케를 죽인 행위는 죄일까요? 그런 것도 깨닫지 못하는 저는 구제 불능의 극악인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