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조건 - 꽃게잡이 배에서 돼지 농장까지, 대한민국 워킹 푸어 잔혹사
한승태 지음 / 시대의창 / 2013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가장 먼저 한 일이 주유소 아르바이트였다. 등록금 걱정을 하시는 부모님의 짐을 덜어드리고 싶어서 졸업식도 하기 전에 돈을 벌기 위해 구한 일자리였다. 주유소 사장님은 면접 첫날부터 ‘하루만 나오고 말 거면 시작도 하지 말라’고 하셨는데 일하게 된 날에도 눈만 마주치면 ‘할 수 있겠어?’ 를 수십 번도 더 물어보셨다. 사장님은 첫날 나오고 안 나오는 학생들이 워낙 많아서 노파심에 자꾸 확인하게 된다고 하였는데 그땐 뭐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던 의지가 결연했던지라 그런 일은 절대 없다고 하였지만, 결국 나는 하루만 나가고 나가지 않게 되었다. 우선 추워도 너무 추웠고, 하루 종일 서서 일하는 중노동에 비해 보수가 너무 작았다. 게다가 주유소에 오는 손님들이 모두 착했다면 좋겠지만, 사회생활도 해본적 없는 내게는 손님들이 마귀 같았다. 자신보다 어리다고 무조건 반말도 견딜 수 없었지만, 더 견디기 힘들었던 것은 주유소에 일한다고 깔보는 눈빛이었다. 그것만으로도 돈을 번다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배우기엔 충분하였다.

 

 

 이후 많은 아르바이트를 했지만, 가장 힘들었던 일 하면 주유소에서 일했던 기억만 떠오른다. 대학 졸업 후 내 인생은 비교적 탄탄대로였는데 남편의 느닷없는 귀향의지로 본의 아니게 시골에서 식당을 개업하게 되었다. 남편은 젊었을 때 고생하고 싶다는 것 외에는 다른 이유가 없었고 내가 생각하기에도 자기 손으로 무언가를 해보고 싶다고 한다는 의지가 좋았기에 그저 아무 생각없이 당연하게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나, 식당 개업은 내 인생에서 두 번째로 힘들었던 일이었다. 부모님을 닮아 생활력 하나는 끝내주었던 나는 애 키우며 배달도 척척 잘해 시골사람들을 놀라게 하곤 하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떻게 그랬을까 싶은 그 일을 다시 하라고 하면 죽어도 못할 것 같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시골 사람들 대부분이 내가 일 년 안에 도망간다에 내기도 했다고 한다. 허나 육체적인 노동은 정직하다. 땀 흘려 일하는 것은 보람을 느끼게 해주지만, 정신적인 고통은 사람을 피폐하게 한다. 내가 도망가지 않았던 것은 식당일의 끊임없는 노동이 주는 보람 때문이었지만, 도망가고 싶었던 것은 정신적인 문제였었다.

 

《인간의 조건》 을 읽으면서 그때가 가장 많이 생각이 난다. 대한민국에서 시골에 산다는 것은 많은 것을 포기해야 하는 삶이란 것도 알았지만, 먹이 사슬 가장 아래에 위치한 워킹 푸어들에게 대한민국에서 산다는 것이 얼마나 처참한 것인지를 새삼 일깨워주고 있기 때문이다. 오래 전 <자본주의란 무엇인가?>라는 다큐에서 보았던 자본주의 구조에서 보여 주었듯이 대한민국에서  워킹 푸어의 삶이란  키순서로 나열된 오뚜기 인형들 중 가장 작은 오뚜기 인형의 도태되어진 모습과 매우 닮아 있다. 자본주의 사회는 정보에 약한 사람일수록 쉽게 도태된다. 가장 아래쪽에 위치한 인형들이 쓰러지는 이유도 이런 개념을 모르기 때문이었다.죽어라고 일하지만 정당한 몫을 받지 못하는 이유는 그들이 어리석어서도 아니고, 열심히 살지 않아서도 아니다. 이들을 가까이에서 본 결과 무지가 삶에 주는 영향이었다. 이 책의 저자는 이런 부분들 , 워킹 푸어들이 자신들의 삶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들을 매우 생생하고도 사실적인 묘사로 우리 사회의 한 단면들을 재현하고 있었다.

 

식당을 8년간 운영하면서 거쳐 간 주방장들도 수 십 명인데 이들의 공통점 역시 사회에 매우 무지하다는 것이었고 생활은 닥치는 대로 산다는 것이었다. 이들은 적은 월급이 아닌데도 돈을 모으는 방법을 전혀 몰랐다. 어떤 주방장은 급여의 반을 떼어서 저금을 들어주고 나중에 목돈을 만들어주자, 그렇게 큰 돈은 자기 인생에서 처음이라며 감격하기 까지 했다. 이들은 책의 첫 장에 나오는 꽃게잡이 선원들과 매우 흡사한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었다. 서울에서 직장생활만 했었기에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식의 단조로운 삶은 나 역시도 처음 접해보는 삶의 모습이었다. 처음에는 이들을 데리고 설득도 해보고 조언도 해보고 가족과 다름없이 지냈지만, 대부분 자신의 삶을 극복하지 못하고 고만고만하게 자신의 삶을 살아간다. 책을 읽으면서 옆에서 느끼고 보았던 그들의 삶을 다시 한번 들여다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어쩌면 그들은 자본주의 사회라는 구조에서 착취당하고 착취하는 먹이 사슬의 가장 큰 희생자가 아닐까하는 생각을 가져보게 된다. 저자가 6주동안 뼈빠지게 일하고 받은 댓가가 고작 40만원인 것처럼 자본주의 사회구조에서 가장 하단에 위치한 워킹 푸어의 삶이란 그런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내 인생에 가장 힘들었던 일 , 두 가지는 내 인생에서 가장 값진 경험이었다. 젊었을 때 고생은 사서 한다더니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때 그런 경험을 하지 못했더라면 나는 지금의 삶에 감사하지 못했을 것이고 살아가는 모습이 여러 가지 형태를 띤다는 것도 아마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책을 쓴 저자에게도 박수를 보내고 싶다. 경험이 왜 소중한지를 느끼게 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삶의 밑바닥을 경험한 사람은 인생에서 추구해야할 가장 소중한 가치를 이해할 수 있다. 그것이 간접적이든 직접적이든 내 삶이 아닌 다른 삶을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은 (이런 책을 읽을 수 있다는 것도 )분명 축복이다. 저자가 들려주는 대한민국의 워킹 푸어들의 삶은 그래서 눈물나게 아름답다.

 

 

나는 이 세상이 돌아가는 비밀을 엿본 기분이 들었다.

이 괴상망측한 사회가 비틀거리면서도 여전히 굴러갈 수 있는 이유는

수많은 사람들이 정당한 보상을 받지 못하고 있음에도

자신이 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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