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나 카레니나 3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3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박형규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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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티가 브론스키에 버림 받았을 때, 세상을 다르게 보는 시선과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배웠던 순수한 친구 바레니카가 키티와 레빈부부를 찾아오고 돌리 역시 소유지의 집이 완전히 쓰러지게 되자, 동생 키티의 집에 머물게 된다. 레빈의 배다른 형 세르게이도 레빈의 집에 머물고 키티와 레빈은 갑자기 일어난 대식구들의 뒷바라지를 하게 되어 분주한 나날을 보내게 된다. 레빈은 사랑하는 여인의 옆에 있다는 완전히 순결하고 고결한 기쁨에 취해 있으며 키티의 임신으로 더욱 행복한 날을 보내고 있었다. 키티는 사상이나 생각이 전혀 다른 세르게이 형에게조차 늘 겸손과 애정을 보내는 레빈의 모습을 존경하며 언제나 나아지려고 하는 레빈의 평소 삶의 자세에 존경을 보낸다.

 

세르게이는 이때 키티의 친구 바레니카를 사랑하게 되는데 바레니카가 가지고 있는 내면의 훌륭함 때문이었다. 상류사회의 예의범절을 잘 알고 있었고 종교적 신념으로 다져진 바레니카의 생활을 보며 모든 것이 자신의 이상형과 잘 맞았다. 그리고 바레니카에게 느껴지는 가난과 외로움 또한...

 

 

 

 

서로에 대한 신뢰가 깊었던 레빈과 키티 부부 앞에 나타난 단순하고 선량하며 지극히 쾌활한 청년 바세니카는 마치 안나 앞에 나타난 브론스키와 같은 느낌을 준다. 바세니카는 아름다운 키티에게 페로몬을 마구 뿌려대며 유혹 아닌 유혹을 하게 되는데 (본인이 꼭 흑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브론스키처럼 그냥 습관인 것이다.) 그런 행위가 레빈의 눈을 거슬리게 하지만, 레빈은 키티에 대한 자신의 믿음을 탓하며 애써 감정을 누른다. 그러나, 행동이 점점 지나치게 되자, 사냥을 위해 찾아 온 바세니카를 쫓아버린다. 여기서 작가가 레빈의 감정과 행동에 많은 부분을 할애하는 이유를 알 수 있다. 바로 알렉세이와 대조되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레빈도 알렉세이와 같은 상황, 같은 느낌이지만 알렉세이는 안나와 브론스키 사이에 어떤 이상한 기류를 감지하고도 안나에게 어떠한 질문도 하지 않았다. 대신 레빈은 키티에게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털어놓는다. 키티는 자신의 남편이 바세니카의 행동을 통해 자신에게 가진 관심자체에 감사하며 오히려 남편이 바세니카를 쫓아내는 것을 이해해주고 있다. 알렉세이가 조금이라도 자신의 감정을 안나에게 표현하고 대화로 풀었더라면 아마도 브론스키와 감정이 깊어지는 일은 없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 부분이다.

 

 

그리고 돌리에게서도 안나를 다른 시각으로 보게 해 주고 있다. 주인공은 안나지만, 톨스토이는 전혀 다른 이들을 통해 안나의 삶을 느끼고 생각하게 해 주고 있는데 같은 여자 입장에서 돌리는 안나를 비난하지 않는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안나를 비난하지만, 돌리가 안나를 부러워하는 이유는 딱 한 가지이다. 사랑하는 사람과 살고 있다는 것.

 

 

♣나는 그때 남편을 버리고 다시 한번 삶을 고쳐 시작했어야 했다. 그랬다면 나는 정말로 사랑하기도 하고 사랑을 받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지금 나에게 그녀보다 나은 데가 있는 것일까?

 

♣안나가 한 짓은 훌륭하다. 나는 이제 결코 그녀를 비난한다든가 하는 짓은 않겠다. 그녀는 행복하다. 그리고 상대방도 행복하게 해주고 있다. 나처럼 굴복당하고 있지 않고, 틀림없이 여느 때처럼 싱싱하고 영리하며 무엇에나 마음을 터놓고 있을 것이다.

 

 

레빈 또한 안나를 처음 만난 감상을 ' 지혜와 우아와 아름다움 외에 그녀의 마음속에 깊은 진실성이 있다는 것에 감명을 받았다'고, 이렇게 가장 고지식하고 가장 큰 비난을 보냈던 레빈마저 안나를 아름답고 슬기롭고 솔직함과 성실함에 넋을 잃었다고 하며 오히려 브론스키가 그녀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을까 걱정을 하는 장면은 안나에게 동정심을 유발시킨다.

 

 

레빈의 우려대로 안나가 관심 있어 하는 ‘여성교육’ 이라는 문제로 인해 안나와 브론스키는 심하게 다투게 되는데 여성으로서의 우월과 자신감, 아름다움 뿐 아니라 교육에도 관심이 많았던 안나에게 여성교육에 경멸을 표하는 브론스키의 말은 안나에게 커다란 상처를 남긴다. 그리고 이러한 생각은 안나 자신이 사랑한 브론스키에 대한 기질과 감정의 차이점을 느끼게 하면서 둘의 사랑이 점점 어긋나는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나는 일반적으로 연인이 상대방의 성격과 감정을 이해하여줄 수 있는 것만큼 당신이 나의 기질과 감정을 이해해줄 수 있으리라고는 바라지도 않았어요. 그래도 최소한 품위만은 가져줄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어요.”

 

“내 사랑은 차츰 열정적이고 이기적으로 되어가는데 그이의 사랑은 점점 식어가고 있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들의 마음이 멀어지는 원인이다.”

 

 

안나는 처음 브론스키를 만난 기차역 플랫폼에서 자신의 짧고 격정적인 사랑이 남긴 괴로움을 떠안은 체 그리고 연인 브론스키에게 벌을 주기 위하여 기차에 몸을 던진다. 죽음만이 안나를 구원해 줄 것이라며...

 

 결론적으로 나는 안나가 가여웠다. 19세기 러시아에 지배적인 여성차별에서 가장 자유로웠던 여인이었지만, 결국에는 여성이라는 벽을 넘지 못한 채 사랑에 희생당하는 불운의 아름다움을 가진 탓이다. 19세기의 불륜으로 유명한 여인으로 <마담 보바리>와 늘 비견되어지는 간통한 여인 안나가 보바리와 결정적으로 틀린 점을 발견했다. 에마 보바리는 자신의 삶의 주인이었던 적이 한번도 없는 여인이다. 늘 남처럼, 마치 ~ 처럼, 사랑을 꿈꾸고 갈구하고 찾아다니며 여러 명의 남자들의 정부가 된 여인이지만, 안나는 자신의 삶을 온전히 사랑할 줄 아는 여인이었다. 그런 여인에게 감당할 수 없었던 것은 사랑이 없는 삶이었을 것이다. (돌리가 남편의 바람을 이해하면서 어쩔 수 없이 살아가며 자신의 남은 인생을 슬퍼하며 안나를 부러워하는 모습에서 안나가 자신의 삶에 매우 충실한 여인이라는 믿음이 느껴지는 부분이었다.)

 

연애소설치고는 꽤나 방대한 분량이라 느껴졌지만, 읽다보니 결혼을 둘러싸고 한 번 쯤 배우자에게 했을 법한 고민이나, 사랑에 대해서 , 그리고 삶에 대해서 , 그리고 우리를 둘러 싼 타인에 대한 선입견들에 대해서 심도 깊은 내면을 들여다 볼 수 있도록 해주고 있다.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틀려지곤 하는데 한 때 불륜의 여인으로만 느꼈던 안나가 세월이 지나 자신의 삶에 충실하기 위해 몸부림친 한 여인으로 다가오는 느낌처럼 나는 톨스토이를 통해 삶을 관조하는 방법을 다시 한번 배운다.

 

 

그리고 삶의 모든 순간은 이전처럼 무의미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내가 나의 삶에 부여하는 의심할 나위 없는 선의 의미를 지니게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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