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나 카레니나 2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박형규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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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에 내려와 농사일에 전념하는 레빈.

2권의 시작은 레빈이 농사일에 전념하면서 느끼는 노동에 대한 신성함을 최근 읽은 체벤구르의 주인공 자하르와 동일하게 느껴진다. 체벤구르의 자하르가 노동이 가진 진정한 가치가 사라졌을 때 ‘사심 없고 대가를 바라지 않는 기질에서 나오는 노동이 언젠가 오직 돈 하나만을 위한 것이 될 때, 그때 세계의 종말이 오리라 하는 믿음과 같이, 레빈은 노동을 신성시한다. 귀족인 레빈에게 시골은 그래서 좋은 것이었지만 배다른 형 세르게이 이바노비치에게 시골은 도시와 달리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 있고 또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에서 좋은 곳이다. 이것은 달리 말해 도시에 사는 귀족 세르게이에게 시골의 노동이란 레빈이 농민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과는 달리 세르게이(귀족)는 농민과 결코 밀접할 수 없는 관계라는 뜻이다. 그런 세르게이를 보며 레빈은 ’생명력의 결함, 또는 정이라는 것의 결함, 인간으로 하여금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자주 맞닥뜨리는 인생 행로 가운데서 하나를 선택하여 거기에 전념하게 하는 충동의 결함‘을 느낀다.

 

 레빈에게 시골에서 노동이란 '자연과 무아경에 빠지는 가장 행복한 순간'이다. (소설 전반에 흐르는 레빈의 사고는 러시아의 진정한 공산주의가 변질되기 전의 가장 완벽한 사상을 보여주고 있다) 레빈은 귀족들이 농사일을 천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과는 달리 노동이 주는 진정한 가치를 이해하고 사랑했다. 레빈이 시골노동을 통해 무아지경에 빠졌을 때 전신에 땀이 흐르는 것을 ’자기를 의식하고 있는 생명에 찬 육체‘라고 말하는 것에서 노동 그자체가 생명이라고 느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러시아 문학을 읽다보면 노동을 신성시하는 책들을 만나고는 하는데 아마도 그 이유가 마르크스사상이 변질 되기 전의 신성함이 그대로 문학에 투영되어 보여 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레빈이 걱정하고 있는 모든 러시아의 농부 및 지주 들에게 그들이 가진 몇백만의 손과 땅을 가지고 사회 전체의 행복을 위해 가능한 한 생산적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고뇌가 19세기 후반 러시아가 직면하고 있는 위기의식을 생생하게 전해주고 있다.

 

‘아마 이런 것은 농노 시대에는 필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또 영국에서는 지금도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말하자면 이 두 경우에는 조건 자체가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 모든 것들이 뒤죽박죽이었다가 겨우 모습을 갖추어가고 있는 오늘의 러시아에서는 이러한 조건들이 어떻게 수습될 것인가가 유일한 중대 문제인 것이다.’

 

 

‘빈곤 대신에 만인의 부와 만족, 적대감 대신에 이해의 조화와 일치, 한마디로 말하자면 피를 흘리지 않는 혁명인 것이다.’

 

 

 

안나와 안나의 남편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 그리고 브론스키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는 완전무결한 사람이다. 그는 고관대작이었으며 책임감도 강했고 또한 의무감도 강했으며 신실한 기독교인으로서 신앙도 깊었다. 그에게 약점이 있다면 어린애나 여자의 눈물을 보면 혼란 상태에 빠져 완전히 판단력을 잃어버린다는 것이다. 브론스키가 경주 도중 낙마하자, 모든 사람 앞에서 대놓고 브론스키를 걱정하는 모습을 본 순간, 알렉세이는 안나와 브론스키의 사랑을 알게 된다. 그리고 경주에 참여한 모든 사람들도....   이후 알렉세이는 마음속으로 아내에 대해 완전히 경멸적인 무관심 상태에 있으나 오로지 하나의 걱정, 안나가 아무런 장애도 없이 브론스키와 결합하는 것을 상상하기도 싫었으며 이혼이 안나에게는 유리하지만 자신에게는 불리한 것임을 깨닫는다. 결국 자신의 품위를 떨어뜨리지 않으면서 소란은 최소화하고 자신의 지위를 지키는 것을 선택하는데 그것이 바로 이혼하지 않는 것이다.

 

그녀는 결코 사랑의 자유를 경험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리고 영원히 생활을 같이 할 수 없는, 각자 따로 생활하는 외간 남자와의 수치스러운 관계를 위하여 남편을 속이는 죄 많은 아내로서 끊임없이 폭로의 위협 아래 남을 것이다.

 

한번도 사람을 미워한 적이 없고 독실한 기독교인이자 고관대작이었던 그에게 안나의 불륜은 알렉세이를 더욱 격한 미움과 원망을 만들어내고 알렉세이를 끊임없이 괴롭힌다. (안나 카레니나에서 가장 불행한 캐릭터는 아마도 알렉세이 ^^;; ) 그렇게 미운 안나가 자신의 자식도 아닌 브론스키의 딸을 낳은 후 산욕열로 죽음 앞에 다다르자 알렉세이는 또 한번 안나를 용서한다. 마치 안나의 죽음이 알렉세이의 저주로 인해 닥치게 된 것처럼 알렉세이는 죽어가는 안나 앞에 브론스키를 직접 데려오는 수고를 아끼지 않을 정도이다. 의사의 열중 아홉은 안나가 죽을 것이라고 하였기에, 브론스키 앞에서 고해성사를 하는 알렉세이. 이 모습은 매우 고결해보이기까지 한다. 바람 난 아내와 같이 바람이 난 젊은 남자에게 ‘그동안 그녀에게 복수하고 싶은 욕구에 쫓기고 있었다.’ 고 ‘ 나는 그녀를 버리지 않겠습니다.’ 라고 말하는 안나의 남편을 오히려 이해하지 못하는 브론스키. 그리고 그런 알렉세이의 모습에 충격을 받은 것은 오히려 브론스키였다.

 

브론스키는 군직에서 물러나는 것은 자신이 타고 있는 배에 불을 지르는 짓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실제로 안나를 사랑하지만 안나와 결혼함으로 모든 것을 포기하는 행동따위는 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브론스키는 자신이 군대에 머물러 있는 한 아무것도 잃지 않으며 안나도 현재 상황을 바꾸지 않아도 되는 상황을 오히려 마음에 들어한다.

 그랬던 브론스키에게 죽어가는 안나의 앞에서 남편 알렉세이의 고백은 브론스키에게 사랑의 의미를 다시 일깨우는 계기가 되어주는데 안나의 남편을 심술궂고 위선적이고 우스꽝스러운 사람으로 생각하며 조롱해왔던 자신을 부끄럽게 하는 것과도 같았다. 결국 알렉세이는 고백을 통해 순식간에 그를 선량하고 솔직하고 위대한 인물로 느끼게 하는 것이다. 자신에게 찾아온 위기, 모든 위선, 자신의 비열을 마주한 그는 부지불식간 권총자살을 시도하지만 총알이 빗나가고 브론스키는 다시 살게 된다.

 

 

브론스키는 그의 고결과 자기의 비열을, 그의 올바름과 자기의 부정을 통감했다.

 

브론스키의 자살시도를 듣게 된 안나는 건강이 회복되자 바로 남편을 떠난다. 오히려 남편의 선행이 그녀를 불행하게 만들었다는 그녀는 자신의 아들마저 버린다. 브론스키도 군에서 준 임명을 거부한 채 안나와 외국으로 떠난다. 둘의 사랑을 위해서...

 

2권에서는 주인공들이 최고의 갈등을 이루며 전개되는 심리변화를 바라보는 것만으로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 두근거림이 어쩌면 안나를 이해하지 못하고 브론스키를 이해하지 못하지만, 삶이라는 하나의 측면으로서는 충분히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다. 결혼이라는 제도가 만들어준 갈등의 최고봉을 경험할 수 있는 최고의 책이 아닐까 한다. 남자와 여자가 가지고 있는 복잡미묘한 심리부분까지도 놓치지 않고 표현되어지는 섬세함에 한글자도 놓치지 않으려고 애쓰며 읽게 되었다. 사회격변기에 휩쓸리지 않는 유일한 지성인이자 매우 도덕적인 인품의 레빈은 톨스토이의 전신과 같이 느껴진다.  레빈과 키티의 아름다운 결혼식을 통해 매우 이상적인 결혼생활을 보여주고 있지만, 안나의 불행한 결혼을 통해서는 서로 다른 둘이 하나의 삶(즉,결혼)을 완성하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노력이 필요한 것인지를 보게 되기도 한다. 사랑만으로 살 수 있다고 믿는 안나에게 닥친 불행은 2권의 마지막 "당신이 다 나쁜 거예요." 라는 절규로 예고되어 있다.(3권에 계속)


 

카테리니행 기차는 8시에 떠나네

11월은 내게 영원히 기억 속에 남으리

 내 기억 속에 남으리

 카테리니행 기차는 영원히 내게 남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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