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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고양이를 데리고 노는 것일까, 고양이가 나를 데리고 노는 것일까? - 내가 나를 쓴 최초의 철학자 몽테뉴의 12가지 고민들
솔 프램튼 지음, 김유신 옮김 / 책읽는수요일 / 2012년 12월
평점 :
절판
평온한 삶을 이어가다보면 타인의 슬픔에 무감각해진다. 그 무감각을 깨운 것은 다름 아닌 타인의 고통이다. 오늘과 다를 바 없는 내일이 온다할 지라도 희망을 품으라는 말은 바보 같은 말이다. 작년 무감각했던 나를 깨웠던 것은 다름 아닌 타인의 고통이었다. 행복한 삶을 살아가던 친구에게 닥친 불행의 그림자는 너무도 깊고 암울하여 내가 끼어들 틈이 없었다. 방어막 너머로 친구를 바라보며 타인의 불행이 때로는 무감각하였던 나의 모든 감각들을 깨워주는 일침과 같은 역할을 하게 된다는 것을 처음으로 깨달았다. 친구의 고통으로 나는 처음으로 살아가야 하는 이유를 생각하게 되었고 삶의 의미를 무던히도 찾으려고 애썼다. 그렇게 가끔은 타인의 고통이 무뎌진 감각을 깨워주는 역할을 해주기도 한다.
몽테뉴의 저서 《수상록 또는 에세》 는 몽테뉴의 개인적인 사색과 성찰이 담겨져 있는 성찰집이다. 오래 전 톨스토이의 <인생이란 무엇인가>와 세익스피어의 <세상을 보는 지혜>는 젊었을 때 내 삶을 지탱해주던 철학서이자 인생지침서였다. 지금은 자기계발서들이 잘 사는 것이 성공이라는 관점이지만 과거 철학자들이 말하는 인생에서의 성공은 인간과 삶에 대한 이해가 먼저였다. 아마도 이것이 요즘의 자기계발서와의 가장 큰 차이점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은 몽테뉴의 수상집이 나오게 된 배경을 추적하며 그의 삶에 대한 이야기이다. 위대한 철학자이자 세계적인 저작 <에세>가 나오게 몽테뉴는 어떻게 만들어진 것일까하는 호기심과 같은 책인데 아마도 멋진 책을 만났을 때 그 책을 쓴 저자의 마음을 더 가까이 들여다보고 싶은 마음과 같지 않을까? 이런 관심으로 탄생하게 된 책이 바로 《내가 고양이를 데리고 노는 것일까 고양이가 나를 데리고 노는 것일까》 이다.
몽테뉴의 수상집이 위대한 이유를 저자는 서양 문학사 최초로 인간의 의식을 일관된 관점에서 보여주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몽테뉴는 일상생활에서 실제로 얻은 경험을 통하여 살아가는 이유를 찾았던 최초의 철학자이였던 것이다. 금욕과 절제가 미덕이었던 시대에 인생의 참된 의미와 삶 그 자체의 체험을 일상에서 찾으며 주위의 모든 것이 인생의 의미가 되었다. 그러나, 몽테뉴가 처음부터 일상에서 인생의 의미를 찾는 철학자가 아니었다. 그는 태어나기도 부유하게 태어났고 이후 법관직을 하면서 상류층 사회에 익숙했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에게 닥친 불행의 그림자는 몽테뉴에게 인생을 다시 보는 눈을 선사하게 되었던 것이다. ‘내가 완전한 사랑을 나눈 사람’이라고 말했던 친구 라 보에시의 죽음에 잇달은 아버지와 네 딸들의 죽음을 통해 몽테뉴는 삶을 새롭게 볼 수 있는 경험을 하게 된다.
이전에 “더 오래 살아봤자 새롭게 얻을 낙은 없다” 했던 그가 일상의 모든 것에서 인생의 의미를 발견하게 된 것이다. 이후 몽테뉴의 <에세>는 후대 문학가와 사상가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 책은 몽테뉴의 정신세계를 12가지(우정,죽음,회의,전쟁,여행,고통,섹스,관계,친구,자아)라는프레임으로 추적하고 있다. 몽테뉴를 추적하는 과정을 따라가다 보면 이 12가지의 프레임을 일상으로 끌어와 삶에 적용하려는 무던한 노력을 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심지어 몽테뉴는 귀의 고통에서조차 또는 여행하는 동안 만나는 모든 것들, 고양이를 통해서조차 인생을 이해하려고 한다. 그리고 그런 이해는 다시 인간을 새로운 측면에서 다시 이해하려고 하는 노력으로 변모하고 있다. 마치 동물을 보고 “한 인간과 다른 인간의 차이가 동물과 인간의 차이보다 더 큰 것처럼,” 인간 사회가 여러 파벌로 분열되어 있지만 이 분열을 극복하기 위한 작업으로 인생을 이해하려 하는 것이다.
몽테뉴는 “훌륭한 지성인이란 마음을 활짝 열고 모든 것을 수용할 태세가 되어 있는 사람” 이라고 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진정한 지성인의 면모라는 것을 몽테뉴를 통해 볼 수 있었다. 몽테뉴의 이런 면모는 데카르트가 정신과 육체를 분리하는 동시에 자기 자신을 타인과 분리시키면서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고 주장한 것과는 달리 정신과 육체와의 관계가 “인간의 보편적인 유형”으로 들어가는 관문을 열어주고 결과적으로는 사회 전체로 이어준다고 생각하였다. 이것은 최근에 읽은 부뤼노 나르노의 <과학인문학 편지>에서 말하는 코기카무스의 사고와 같다. 이런 자아 인식은 우리를 자기 자신으로 인도하지만, 나아가 타인들에게도 인도해주는 것이다. 따라서, 몽테뉴는 “생각하므로 나는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므로 나는 생각한다 " 라고 한다. 일상의 모든 체험에서 '인간'을 이해하려고 치열하게 사색하는 과정의 《내가 고양이를 데리고 노는 것일까,고양이가 나를 데리고 노는 것일까?》 는 어려운 철학이 아닌 일상의 철학을 담고 있다. 때론 불행이 일생일대의 전환점을 가져오는 기회를 제공하듯이 불행을 통해 인간과 삶에 깊숙이 다가간 몽테뉴의 철학을 만난다는 것은 다시한번 무뎌진 감각을 일깨워주는 경험이었다. 존재하기에 생각한다.. 너무 멋진 말 아닌가..
서로 공감하고 잘 어울리는 친구로부터 얻는 달콤함은 아무리 비싼 대가를 치르더라도 전혀 아깝지 않기 때문이다. 오 친구여 !
우리의 삶을 올바르게 즐기는 법을 아는 것, 그것이 절대적으로 완벽하고 실질적으로 완벽하고 실질적으로 신성한 삶의 경지이다. 자기 자신의 용도를 모르기 때문에 다른 환경을 찾아 헤매고, 자신의 내면이 어떻게 생겼는지 모르기 때문에 자아 밖에서 떠도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