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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한 번의 연애
성석제 지음 / 휴먼앤북스(Human&Books) / 2012년 12월
평점 :
고래잡이였던 포수의 딸 민현을 사랑한 해녀의 아들 세길의 단 한번의 연애사.
여덟 살 초등학교 입학식에서 둘의 첫 만남은 운명이었다. 그 뒤 고래가 쫓아오면 늘 삼지창을 들고 고래를 무찔러주는 여전사 민현이 나타나는 꿈을 꾸게 된다. 세길은 언제나 자신의 구원자로서 민현을 기억하곤 한다. 민현을 기억하기 위해서는 일제강점기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고래잡이 포수였던 아버지와 일본인 집에서 심부름꾼이었던 어머니 ‘나나’와의 만남도 운명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고래잡이였던 민현의 아버지가 고래를 잡지 않고 아내와 딸에게 삼지창을 던지게 되면서 엄마는 집을 나가고 아버지의 폭력을 홀로 견뎌야 했던 민현의 상처를 본 후 세길은 민현을 사랑하게 된다.
나는 민현을 영원히 기억할 운명, 종속될 운명이었다. 그녀를 보면서 몰입이 뭔지 배웠다.-p35
아버지가 고래를 잡으러 나갔다가 바다에서 실종되자 의지가지 없던 민현은 무당딸로 입양된다. 포항항구 조그만 마을에서 빼어나게 아름다웠던 민현은 모든 남자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는데 학년이 올라갈수록 민현을 짝사랑하는 남자들 때문에 괴로웠던 세길은 사촌형을 따라 서울로 상경하여 공부한다. 서울에서 민현에게 매일밤 편지를 쓰며 민현과 같은 대학을 가기 위해 공부하는 동안에도 민현의 소문은 끊이지 않지만 세길은 한결같은 믿음으로 민현을 꿈꾼다. 서울 국립대학의 장학생으로 합격한 날, 민현과 세길은 밤을 지새우며 지난 날의 아픔을 들어주고 위로해주는 시간을 가지게 되고 아마 세길에게는 이 순간이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을 것이다. 이후 민현은 학생운동에 세길은 전경을 가게 되면서 서로 다른 길을 걸어가게 되고 학생운동의 주모자로 민현이 지목되면서 형사들에게 고문을 받는 순간의 짧은 만남이 민현과의 마지막 만남이 되버린다.
소설의 배경은 식민지시대부터 시작하여 70년대 산업화, 80년대 군부독재와 민주화혁명, 90년대 본격 자본주의 시대를 배경으로 파란만장하게 펼쳐지고 있는데 시대가 바뀌고 둘의 운명이 엇갈리는 순간에도 세길의 한결같고 맹목적인 사랑은 한편으로는 바보스러워 보이기까지 한다.
노인 요양소에 일하는 분이 이런 말을 해 주신 적이 있다. 거동이 불편하신 할머니를 지극 정성으로 보살피는 할아버지는 종종 보게 되는데 이상하게 할아버지를 정성껏 간호하는 할머니는 보기 힘들다고 한다. 이 책의 중간에 고래이야기가 나오는데 아마도 세길의 사랑이 고래의 습성과 비슷하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암수가 짝을 지어 가는 두 마리의 고래가 있으면 수놈을 먼저 잡지 않는다고 한다. 수놈이 죽으면 암놈은 도망쳐 버리기 때문인데 반대로 암놈을 먼저 잡으면 수놈은 도망가지 않아서 함께 잡을 수 있다는 것이다. 세길도 고래처럼 절대 민현을 떠나지 않을 것이다. 민현이 그를 떠날지라도...
향유 고래 다큐멘타리를 보며 어머어마한 덩치에 유유자적하게 바다를 헤엄치는 모습을 경이롭게 바라본 적이 있다. 이 책을 읽는 내내 느릿느릿한 고래의 몸짓이 떠오르고 바닷가 특유의 비릿함이 느껴지는 착각이 들 정도로 바다에서 사는 사람들의 삶의 이야기가 가득하다. 오래 전 읽은 《모비딕 :백경》에서 에브힐 선장이 고래에 가졌던 강한 애착과 집착을 고래잡이 민현의 아버지에게서 보게 되며 어쩔 수 없는 바닷사람의 숙명 같은 모습이 아닐까 하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바다와 연맹하여 근근히 먹고 살아야 하는 바닷가 사람들의 삶의 애환을 통해 섬사람들의 애닲음 또한 느낄 수 있었다. 암놈이 죽으면 꺼이꺼이 울며 도망가지 않는 고래의 미련스러움이 고스란히 세길의 단 한번의 연애사에 담겨져 애잔함이 더한다. 격동하는 현대사의 격렬한 물결의 잔랑에 휩쓸리게 되어도 자신의 사랑을 포기하지 않는 세길에게서 위대한 사랑의 힘을 느낀다.
생각해보니 내게 행복은 기억이 아니라 경험이었다.
나는 멋진 인생을 살았어
, 너 때문에. 당신 덕분에. 고마워. 고마워요 너는 나를 기억하겠지, 클레멘타인, 나의 사랑 클레멘타인, 민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