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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는 잠들지 않는다
임종욱 지음 / 북인 / 2012년 11월
평점 :
절판
이번 여름 휴가를 남해로 다녀왔다. 조용하고 아름다운 풍광의 남해는 북적거리지 않아 좋았고 시시각각 변하는 바다가 지루하지 않아 좋았다. 우연히 지나치는 길에 <남해유배문학관>을 보고는 꼭 들려봐야겠다고 생각만 하고는 올 해를 넘기고 있다. 꿩대신 닭이라고 <제3회 김만중문학상 대상>을 수상한 《남해는 잠들지 않는다》를 읽어보는 것으로도 김만중의 삶과 문학에 가까워지는 기분이다.
당쟁으로 얼룩진 조선시대의 역사를 들여다보면 벼슬아치 네 명 가운데 한 명 꼴로 유배를 갈 정도로 유배란 형벌은 흔한 형벌이었다. 짧게는 이십여일이었지만, 길게는 평생 절해고도의 섬에서 살아야했던 유배객들의 삶이란 고독과 절망이 주는 시간들을 견뎌내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래도 이 형벌에 감사하게 되는 것은 유배객들로 인하여 조선시대의 학문이 꽃을 피웠기 때문이다. 이렇게 그들에게 닥친 고독과 절망은 학문으로 승화되어 우리나라의 값진 문화유산이 되었다. 조선 시대 한글문학의 효시라고 볼 수 있는 구운몽의 저자 서포 김만중 또한 이런 유배시절의 산물이었다. <남해는 잠들지 않는다>는 서포 김만중의 유배시절로 <구운몽>과 <사씨남정기>가 잉태하는 과정의 김만중의 삶을 따라가는 작품이다.

인현왕후와 장희빈의 대립이 극에 달하였던 시기에 당쟁에 휘말려 남해로 유배를 떠난 김만중은 남해에서 처음으로 생생하고도 역동적인 초야의 삶과 마주한다. 부인과의 첫 편지에 남해땅을 밟을 소감에 대해 유배의 땅이라 척박하고 강팍할 것 같다는 세간의 말과는 달리 남해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바람을 맞으며 흙을 밟고 풀밭에 누워 자는 소탈함과 풋풋함을 보며 그들의 지난한 삶을 마주한 첫 느낌의 충격을 무척 담담하고도 담백하게 전해주고 있다. 가족과 떨어져 지내는 동안 부인과의 서신만이 김만중에게 위로와 의지가 되고 있음은 말할 것도 없고 떨어져 있는 가족과 자식에 대한 애정은 부인과의 편지에 차고도 넘친다. 편지를 통해 김만중이 글을 쓰게 되는 동기를 알 수 있는데 오로지 어머니 때문이라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김만중이 가장 먼저 쓴 글은 다름아닌 어머니를 위한 글이었다. 과거 어머니를 위해 <행장>이라는 글을 썼을 때 어머니는 다른 어떤 말도 아닌 아녀자들도 읽을 수 있는 쉬운 글을 쓰라는 말만을 남기었다. 유배시절을 보내며 아녀자들도 읽을 수 있는 글을 쓰기 위한 노력은 바로 이런 어머니의 충고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김만중은 어머니를 위한 글을 쓰며 어머니의 삶 또한 자연스레 떠올리지만, 어머니의 삶은 늘 궁금증으로 귀결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자식을 위해 헌신과 인고의 삶을 사시는 동안 자신의 삶을 지우고 어머니란 이름만이 남은 삶을 사셨던 어머니. 김만중은 그런 어머니를 위해 <구운몽>을 지어드리는데 비록 김만중의 유배기간 중에 어머니가 돌아가셨지만, 구운몽을 통해 인생의 무상함을 대신 말씀드리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한다. 총명하고 아들을 위해 모든 희생을 짊어지고 평생을 산 어머니께서 아들의 유배생활을 걱정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기에 아마도 김만중은 어머니께 인생은 한낱 꿈에 불과하다는 소설로 어머니의 근심을 덜어주려 한 것일 터이다.
이어 남해에서 만난 이들은 김만중이 어머니를 위한 글을 쓰고 있던 중 삶의 생생함을 더해주는 역할을 해주고 있다. 남해를 떠나기 위해 악착같이 재물을 모으고 있는 포교 박태수와 기생 옥진의 애닯은 사랑이야기와 야망으로 아들을 훈육시켜 달라고 찾아 온 나참판의 욕망과 마주하며 핏덩어리 때 거두어 가족과 다름없는 종 호우와 아미와의 충실함과 그런 아미를 사랑하는 나참판의 아들 나정언과 장선달 댁의 며느리 아씨와 이룰 수 없는 꿈을 꾸고 있는 양설규, 마지막으로 탐욕과 재물에 눈이 멀어 타락의 길을 걸어가는 파락호 홍길찬의 삶들 모두 김만중에게 삶의 무상함을 느끼기에는 충분하였으며 이들이 김만중에게 문학의 자양분이 되어주었다.
삶의 무상함은 관념이 아니다. 그것은 현실이었다.-p24
이들과의 만남으로 인해 오로지 가족의 화폭이었던 김만중의 시야는 남해의 풍광 속으로 옮겨갔다. 이런 남해의 풍광은 김만중에게 현실을 오롯이 담을 수 있는 글로서 다가오게 하였고 김만중 문학이 탄생할 수 있는 삶의 터전이 되어주었다. (장선달 댁의 아씨 이야기는 바로 사씨남정기의 모태가 되었고, 꿈을 꾸듯 살아가는 양설규는 구운몽의 주인공이다.) 이렇듯 문학은 현실을 마주할 때야 다가오는 이데아이다. 양설규가 이루지 못한 꿈을 꾸며 괴로움을 시로 토해내듯이 현실의 고독과 절망을 마주할 때 삶의 진정성을 담은 문학이 탄생하게 되는 것이다. 김만중은 조선시대에 찾아 볼 수 없던 소설문학을 선보이며 유배지에서 깨달았던 삶의 무상함을 문학으로 승화시켜 조선시대의 초야의 삶을 담아내게 되었다. 《남해는 잠들지 않는다》를 통해 자신을 외면했던 세상을 끌어안고 사랑하는 방법을 김만중의 문학을 통해 보게 된다. 삶 속에서 절로 터져나오는 글이 주는 가치와 초야의 삶이 주는 의미를 소설 김만중의 삶을 따라가다보니 , 삶이 곧 문학이요 문학의 이데아는 곧 삶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김만중 문학의 진정성을 엿볼 수 있는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