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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톤엔젤
마가렛 로렌스 지음, 강수은 옮김 / 도서출판 삼화 / 2012년 10월
평점 :
절판
내 나이 마흔 , 어쩌다 나이를 헤아리면 깜짝 놀라곤 한다. 젊은 날, 나이와 성숙도는 같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래서 나이가 들면 삶의 혜안도 자연적으로 쌓이는 줄로 이해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전히 젊은 날과 비교하여 삶을 더 깊이 있게 느끼고 있다고는 자신있게 말하지 못하겠다. 단지, 삶이라는 것을 형성하기 위해서는 많은 것이 요구된다는 것을 나이가 들수록 깨달아가고 있는 중이다.
소설속의 주인공 헤이거는 이기적이고 고집스러운 여느 노인네와 다르지 않다. 늙음을 인정하고 싶지 않고 여성으로서의 위치를 확고하고 싶으나, 몸뚱이는 말을 듣지 않는, 그래서 늘 과거 속에 사는 노인이다. 현실을 부정하는 늙은 여인 헤이거,
이제 나는 걷잡을 수 없이 추억에 빠진다. 자주 이러지는 않는다. 아니, 어쨌든 그렇게 자주 하지는 않는다. 어떤 이들은 노인이 과거에서 산다고 말하지만, 허튼소리지. - p.10
그러나, 헤이거의 모습에서 내 어머니의 모습을 종종 발견하게 된다. 아니 비단 그것은 어머니의 모습만이 아니라 내 늙음의 모습인지도 모르겠다. 어머니는 총명하고 생활력이 강하여 남편과 일찍 사별 한 후 홀로 오남매를 키우셨다. 가난해도 삶의 지혜로 넘치고도 아름다우셨던 어머니는 자식들이 장성하여 사회에 나가 성공한 모습도 성에 차지 않아 하셨다. 오히려 자식들이 더 이상 당신께 기대지 않고 알아서 사회에서 인정받는 모습을 더 쓸쓸하게 느끼시는 듯 했다. 더 어머니를 슬프게 하였던 것은 아들의 결혼이였다. 내가 처음 어머니를 만났을 때, 어머니는 소유욕 강한 여자처럼 행동하셨다. 아들이 마치 자신의 것이라는 영역표시를 하려는 것처럼 밤이고 낮이고 불러 이야기를 하셨고, 당신 앞에서 다정한 모습을 몹시 불쾌하게 여기시는 듯하였다. 결혼 후 몇 년 동안의 시집살이는 내가 여성으로서 사회적 존재라는 사실을 깨달아가는 과정으로 충분하였다. 여성에게 주어진 사회적 존재로서의 위치는 엄마이자 아내이자, 며느리이자 자식이었다.
물론 나는 그런 어머니를 이해하지 못하였다.그러나, 한 살 한 살 나이를 먹을 때마다 어머니를 향한 이해도 깊어간다. 어쩌면 그런 이해는 한 해가 다르게 늙어가시는 어머니의 모습이 몇 년 뒤의 내 모습이란 사실을 인정해간다는 뜻일지도 모르겠다. 아마도 나 역시 그럴 것이다. 늙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나를 부정할 것이며, 자식에게 강한 집착을 보이지 않을 것이라고는 차마 장담하지 못한다.
소설 속의 헤이거도 언제나 자신의 현재를 부정하며 환갑이 넘은 아들 마빈만을 탓하며, 며느리의 행동을 비웃으며, 자신을 떠난 아들 존을 원망하며, 사별한 남편을 기억하고, 가부장적인 아버지에게 억압되었던 어린 시절을 떠올리는 것이 삶의 전부로 채웠다. 마치 모든 것이 죽어가는데 기억만이 살아 있는, 정신만이 살아 움직이는 그 무엇처럼 헤이거는 기억에 집착한다. 보바리 부인이 현실을 부정하기 위해 ‘마치 ~ 처럼’ 살아갔던 것처럼, 헤이거 역시 현실을 부정하기 위해 과거에 집착하는 모습이다.
우리가 거기서 살아간 삶은 기다리는 기간이요, 시간을 보낼 뿐인 정지된 삶이었다. 하지만 우리가 모르고 기다린 미래는 내가 상상한 미래와는 사뭇 달랐다.
그리고 그때와 꼭 같은 헤이거는, 이제 다른 집에서 다시금 기다리고 있다.
내게는 내 인생에서 일어난 일을 , 바꿀 힘이 없다. 그렇다고 해서 그걸 좋아하거나 받아들이거나, 그게 최선이었다고 믿을 수도 없다. 나는 그러지 못하겠고, 그 때문에 지옥에 가게 된다 해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그냥 침대에 앉아서 어둠이 내려앉아 나무가 사라지고 바다가 밤에 켜질 때까지 창밖을 바라보기만 한다. -p199
내가 조금만 젊었더라면, 헤이거 같은 노인네를 싫어했을 것이다. 이미 내 주위에는 너무 말이 많고 고집이 세고 과거의 영광에 집착해 늘 젊은이들만 보면 일장연설을 늘어놓는 노인네들이 너무 많다. 그러나, 그 이면에 깔려있는 진심이란, 얼마나 슬픈가. 헤이거는 자신의 늙음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 자식들에게 여전히 자신의 총명함을 보여주려 하지만 번번이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담배를 피다 잠들어서 며느리에게 혼나고 진통제 없이는 견딜 수 없는 병을 앓고 있으며 인생에서 아름다운 색을 뒤로 한 채 머리색이 회색으로 바랜 것처럼 자신에게도 남은 옷 또한 온통 회색뿐이다. (헤이거는 자신의 모든 것에서 살아있는 것이라고는 ‘눈’밖에 없다는 표현을 한다.) 이런 감정들이 시종일관 고집스러워 보였던 노인네들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늘 나이가 들면 다른 무엇인가로 인생이 가득해 질 것이라고 기대했던 것과는 달리 내가 그 늙음으로 향하고 있을지라도 한 살 한 살 나이를 먹어갈 수록 인생이 성숙하거나 삶에 능숙해지지는 않았다. 나이듦이란 어쩌면 정신은 또렸해지고 몸은 쉬이 퇴화의 과정을 밟아가는 진실을 마주하는 기분이다. 삶은 생각보다 길수도 짧을 수도 있다. 인간의 평균수명이 백세로 연장되었다는 것은 희소식인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내게 닥친 늙음의 현실이 끔찍하지 않기만을 바란다. 그리고 나는 어머니를 다시 한 번 이해하게 되었다.
《스톤엔젤》이 캐나다문학으로서 명실공히 여성 최고의 문학으로 찬사를 받는 이유를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90대 노년여성의 일생을 누가 이렇듯 실제감 있게 그려낼 수 있단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