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노 치는 여자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4
엘프리데 옐리네크 지음, 이병애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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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은 제목만으로 책을 선택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 경우가 딱 그러했다. 제목만 보고는 피아노 치는 여자가 주는 우아함이나 고결한  하이클래스의 이미지는 고사하고 여성으로서의 성장이 멈춰버린 유아기적 사고의 에리카 코후트는 사디즘과 마조히즘의 상징이다. 이 책은 가학증과 피학증에 대한  탐구로도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사디즘과 마조히즘 성향의 주인공의 심리변화가 탁월하다.  오스트리아의 여성 작가 엘프리데 엘리네크는 페미니즘을 대표하는 문학가이지만 그녀의 작품은 언제나 논란의 중심에 있었다고 한다. 나 역시 처음 접하는 작가이지만, 작품 전체에 흐르는 언어 유희들은  알듯 모를 듯 , 구체적인 설명이 없이 피아노 소나타가 흐르듯이  , 표표히 건반위를  떠다닌다. 이런  언어의 유희는 즐거우나, 묘사가 잘 되지는 않는 묘한 경험을 하는 기분이다. 게다가 노골적인 성의 묘사도 노골적인 건 맞지만 정확한 이해는 불가능한 언어표현들이다.

 

 

프로이트에 의하면 마조히즘(피학증)을 가진 사람은 유아처럼 다루어지길 원하며 입에 재갈을 물리고,묶이고 , 맞고, 더럽혀지고 , 무시당하는 복종을 갖는 환상을 가진다고 한다. 또한 이런 마조히즘을 가진 사람은 가학증(사디즘)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경향이 있으며 마조히즘과 사디즘은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한다. 뜬금없이 사디즘과 마조히즘에 대해 말하는 것은, 이 책의 주인공 에리카가 가진 성향이기 때문이다. 마흔이 되어서도 엄마의 품을 벗어나지 못한 여전히 유아기에 머물러 있는 에리카는 여전히 엄마가 없으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반경 50미터조차 엄마의 손에서 벗어날 수 없다. 아버지가 정신병원에서 죽는 순간, 아버지의 역할의 바통을 이어 에리카는 엄마에게 남성의 역할을 하게 된다. 에리카는 딸이자 부양자라는 짐과 더불어 엄마에게 남성의 위치까지 떠맡게 된 것이다. 엄마는 에리카를 천재라는 독단적인 이유로 사람들과의 관계를 맺지 못하게 하였으며 여자로서 꾸미는 일조차 천박한 일로 가르쳐왔다. 이쁜 여자가 꾸미고 다녀서 사람들의 이목을 끌 필요는 없다는 엄마의 독선적인 논리로 에리카를 대중속에서 철저히 외톨이로 훈육시킨다. 이런 엄마의 지나친 간섭과 지배는 에리카에게 비뚤어진 욕망의 표현인 사디즘과 마조히즘의 성향을 갖게 하는데 어렸을 때부터 지나치게 욕망을 억제시키고 적절한 또는 적당한 욕망표출이 되지 않자, 폭력적인 성향을 가지게 되는 듯 하다.  에리카는 이유없이 학생들에게 가혹하게 하고, 학생들의 물건을 훔쳐다 부시거나, 의도적으로 학생을 모욕하는 것을 만족해하고 점점 가혹함에 익숙해지자  어느 날, 아버지의 면도칼로 자신의 몸을 그으며 자해를 한다. 이런 행위가 주는 자신 스스로의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가 되는 것을 즐긴다. 이것은 달리 말해 자해를 할때는 지배적인 남성의 발현이 되지만 학대를 당할 때에는 엄마의 종속을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에리카는 자해를 할때 자신의 지배적이자 종속적인 자신의 위치를 확인하게 되며, 희열을 느낀다. 

 

 세상에 무언가 도저히 대체될 수 없는 존재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에리카라고 사람들은 말한다.

 

그런 에리카를 보고 제자 클래머는 일종의 도전의식을 가진다. 자신보다 더 늙은 에리카를 , 어딘가 개성있어 보이면서도 모순덩어리인 에리카를 보며 젊은 남성이 가진  패기만만하고 자신감 넘쳤던 클래머는  에리카를 사랑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에리카와 벌이는 성적행위에서 번번히 남성으로서의 우월감이 좌절되며 에리카가 요구하는 비정상적인 행위에 상처를 받는다. 에리카가 성행위에서 남성적인 역할,즉 주도권을 잡으려하는 것에 대한 반항감과 모욕감을 느끼게 된다. 에리카는 성행위조차 자신이 규정해 놓은 틀 안에서 하길 원했으며 항상 편지로 요구사항을 전하는데 피가 나도록 채찍질 해달라거나 학대해달라는 요구들이었다. 클래머는 번번히 좌절되는 성적관계에서 에리카가 요구하는 비정상적인 요구들에 남성으로서 자존심에 상처를 입고 모욕감을 엄마앞에서 에리카를 폭행과 학대를 하는 것으로 복수한다. 다음 날, 눈을 뜬 에리카는 복수를 하기 위해 칼을 들고 클래머의 학교를 찾아가지만,  군중속에서 에리카는 자신의 어깨를 찌를 뿐이다. 유행이 지난 미니스커트를 입고 어깨에 피흘리는 여자, 그런 에리카를 사람들은 조롱하고 비웃는다. 에리카는 어깨에 피를 흘리며 집으로 돌아간다. 사랑을 할 줄도 모르고 사랑하는 방법을 배우지 못한 어리숙한 여인의 사랑의 완성은 다시 엄마품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2004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오스트리아의 여성작가 엘프리데 옐리네크의 대표작. 2001년, 칸 영화제 사상 최초로 그랑프리와 남녀 주연상을 모두 석권한 영화, '피아니스트(미카엘 하네케 감독)'의 원작소설이다. (참고로 2차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한 로만 폴란스키 감독의 '피아니스트'와는 전혀 다른 영화이다.) 유능한 피아니스트인 에리카 앞에 나타난 금발의 공대생 클레메. 아름다운 제자를 사랑하는 여자 선생님의 이야기가 충격적인 영상으로 그려졌으며, 국내 개봉 당시, 화장실 바닥에 앉아 키스하는 남녀의 사진이 실린 영화 포스터만으로도 큰 화제를 불러 일으켰던 작품이다.

 

참 묘하다. 작가는 감정이입을 하지 않은 채 무척 냉정하게 주변을 바라보고 있다. 주인공 에리카에게도 어떠한 애정어린 시선이 느껴지지 않는다. 에리카 자체가 감정을 배제한 인간이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지만, 시종일관 차분하고 무언가 알듯 모를 듯한 심연속에 잠겨있는 기분이 든다. 여자로서의 욕망을 거세당한 채 살아가는 에리카는 옷에 집착하지만 착용하지는 못한 채, 늘 옷장에 쑤셔박는다. 자신의 성을 옷장안에 가두는 모습은 에리카의 성을 대변한다. 이렇듯 방치된 옷은 지나치게 강요된 엄마의 지배는 여성인 에리카를 옷장에 가두고 거세당한 채 남성으로 살아가고 있는 에리카의 여성성이다. 클래머에게 당한 폭행에 한번도 입어본 적 없는 미니스커트를 꺼내 입고 칼을 들고 찾아가는 에리카의 모습은 다소 엽기적면서도 한편으로는 복합적인 모습이다. 폭행에 복수하고 싶으면서도 사랑받고 싶어하는 이중적인 모습인지도 모르겠다. 이런 모습의 에리카는 위에 말하였듯이 사디즘과 마조히즘이 교차하며 만들어낸, 지배와 종속에 길들여진 모습이지만 내면에서는 사랑을 갈구하는 거세당한 여자가 보여줄 수 있는 자신만의 사랑의 모습이 아닐까 생각해보았다. 이렇듯 사람과의 모든 관계,심지어는 엄마와 딸의 관계에서도 지배와 종속적인 관계는 적용된다. 태어나면서 자연적으로 맺게 되는 사회의 일차적인 관계에서 어긋난 사랑은 이렇게 비뚤어진 욕망의 표출로 자라지 못한채 유아기에 머물러 있게 한다.대부분의 사디즘과 마조히즘의 원인은 이런 1차적 관계에서 비롯된다는 말을 들었는데 억눌러진 욕망위로 표출되는 에리카의 비뚤어진 욕망에 진한 연민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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