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2 - 스완네 집 쪽으로 2
마르셀 프루스트 지음, 김희영 옮김 / 민음사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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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콩브레의 회상과 이어 2부 스완의 사랑은 1인칭 화자에서 3인칭으로 시점이 바뀌어 진행된다. 유년기를 회상하며 존재하였던 두 길은 화자에게 의미있는 길로 자리잡고, 콩브레에서 떠올린 유년시절의 기억이 홍차에 적신 마들렌이 깨워주듯 어머니의 냄새와 더불어 맛은 기억을 되살아나게 하는 역할을 해준다.  이것은 마들렌의 모양이 주름처럼 펼쳐지는 것처럼 새롭게 떠오르는 기억이 펼쳐지는 것을 의미한다. 유년시절에 손님으로 들리던 스완에 대한 화자의 동경은 후에 스완의 딸 질베르트를 사랑하면서 끊임없이 이어지는 사랑의 모습으로서  2부는 스완의 사랑에 대한 고찰처럼 무척 세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스완은 화류계에 독보적인 존재로 책에서 스완을 표현하기를 스완은 자신의 사회 관계라는 건물 안에 갇히지 않고, 오히려 그 건물을 마음에 든 여인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새 터에 다시 지을 수 있도록 탐험가들이 휴대하는 조립식 텐트 같은 것으로 만들었다.” 고 한다. 스완은 관계에 집착하는 사람이 아니었으며 언제나 사교계가 주는 쾌락과 향락을 모두 즐길 줄 아는 부류였다.시대상으로 그 시대의 낭만이나 예술이나 소위 지성이라 하는 것에 심취해 있던 상류층 사람들의 동경대상이었던 스완은 어느 날 삶에 어떤 소설보다 더 흥미롭고 더 소설적인 상황을 갈구하곤 하였다. 그런 소설적 상상력 때문인지 모르지만, 스완은  화류계출신인 줄 알면서도 자신의 이상형이 전혀 아닌 오데트를  보티첼리의 그림에 나오는 여인과 흡사하다고 생각하는 순간 사랑에 빠진다.

 

 

<스완의 사랑>에서는 다소 의외의 전개이다. 아마도 이 장의 주제는 사랑에 관한 성찰의 장으로 보여진다. 스완이 오데트에게 느끼는 감정의 변화를 무척 섬세하고 깊이 있게 묘사하였는데 사랑에 빠진 남자, 특히 스완이 어떤 예술작품을 통해 사랑을 만들어가는 과정 자체를 예술가들이 흔히 그러하듯 예술작품으로서 사랑을 만들어 가는 과정처럼, <스완의 사랑>자체가 하나의 소설이다. ( 마지막 작품설명에도 소설속의 소설이라고 부르는 것을 보니 내 짐작이 틀리지 않은 듯 하다.)

 

 

스완이 오데트를 보며 첫 인상을 묘사한 부분은 스완이 얼마나 오데트에게 실망했는지를 알 수 있다. 그러나, 스완이 집에 돌아와서 책상 위에 올려놓은 그림 속 여인에게서 오데트를 동일시하며 단점을 모두 장점으로 변형시키는 과정의 묘사에서 스완에게서 사랑이 막 시작되고 있음을 느끼게 되고, 마치 스완은  소설처럼 사랑에 빠진다.  사랑에 빠진 스완에게 오데트가 창녀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첩일지도 모른다는 무수한 소문, 소설가들이 부여해주는 상상력처럼 자신이 알고 있는 오데트의 진실을 애써 모른척하려 할 때마다 찾아드는 의심과 질투심은 스완을 이전의 삶의 모습과는 완전히 다른 스완으로 만들어버린다. 오데트만을 생각하다 오데트에 갇혀버린 셈이 되어버린 스완은 오데트를 완전히 지배하고 싶은 욕구와 싸워야했고, 그녀를 더 사랑하지 못해 죽을 때까지 괴로워해야 했다.

 

내 마음에 들지도 않고 내 스타일도 아닌 여자 때문에 내 인생의 여러 해를 망치고 죽을 생각까지 하고 가장 커다란 사랑을 하다니 !”

 

 <고장의 이름-이름>

며칠 전 <일상에서 철학하기>에서 자신의 이름이나 우리가 알고 있던 이름들을 반복해서 불러 보다 보면 이름이 가진 의미가 무용지물이 되는 것을 깨닫게 되며 사물의 본체에 접근하게 되는 과정을 한 번 따라해 본 적이 있다. 프루스트는 이름에 대해서 무척 집착을 했다고 하는데 이름에 관련된 사유의 단순화가 아마 철학의 첫 시작이 아닐까 생각해보았다. 이 장은 특히나 철학적인 사유가 넘쳐나는 장으로 이름이 주는 의미를 천천히 곱씹을 수 있는 철학이 돋보인다. 2<스완의 사랑>에서 3인칭이던 시점은 3<고장의 이름>에서 1인칭 화자의 시점으로 진행되며 화자는 드디어 샹젤리제에서 질베르트를 만나 사랑에 빠지기 시작한다.

 

화자는 이미지와 이름사이에 대해 이미지가 어쩔 수 없이 단순화 되었기 때문인데, 어쩌면 내 상상력이 열만하고, 내 감각들이 불완전하고도 즉각적인 기쁨없이 지각한 것을 이름이라는 은신처에 가두었으며, 어쩌면 내가 그 이름에 꿈을 쌓아 놓아, 그 이름들이 이제 내 욕망에 자기 磁氣를 띠게 하였기 때문인지 모른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덮으면서 문학이 주는 삶의 의미가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사실 며칠 전부터 문학과 삶을 뇌에서 철저히 분리하는 작업을 하고 있었던 나로서는 이 책을 읽으며 또 다른 삶의 의미를 배운 기분이 든다. 어떤 누군가가 소설이 도달할 수 있는 극한라는 표현을 한 것을 보며 대체 어떤 소설에 저런 찬사를 붙일까 하였는데 역시 문학이 보여줄 수 있는 극한의 방점을 찍는 소설이다. 프루스트가 문학을 통해 보여주고자 했던 진정한 삶, 마침내 발견되고 밝혀진 삶, 따라서 우리가 진정으로 체험하는 유일한 삶은 바로 문학이다.” 라고 말한 것처럼,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는 우리의 모든 삶이자, 미지의 삶, 체험할 수 있는 모든 삶이 담겨져 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사색할 수 있는 삶의 모든 부분을 아마도 프루스트의 문학을 통해 배우게 될 것이다.

 

오타 352 p 두 번째 줄 얼굴 하는 없는 얼굴 하나 없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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