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 - 스완네 집 쪽으로 1
마르셀 프루스트 지음, 김희영 옮김 / 민음사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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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부터 읽어보고 싶었으나, 사실 엄두가 나지 않을 정도로 대작이라 이번에 민음사에서 7편중의 1편 <스완네 집 쪽으로>1편이 프루스트의 전공자에 의해서 번역이 되었다는 소식은 환호성을 지를 만큼 기쁜 소식이었다. 누군가의 일생일대의 대작을 읽는다는 것은 그만큼의 부담이 있기도 하다. 프루스트에게 작가로서의 영광과 비참을 동시에 남겨준 일생일대의 대작《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우선 읽어내려가면서 독특한 서술방식과 세밀한 묘사에 감탄이 저절로 나온다. 개인적으로 화려한 미사여구 같은 기교를 마구 뿌려놓은 소설들을 좋아하지 않는데 그런 소설이 읽을 때는 좋지만, 책을 덮고 나면 묘사하는 반의 반도 기억에 남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르셀 프루스트의 묘사는 어떤 기분이냐면, 저자가 말하는 서술방식에 빠져 소설속에 등장하는 배경이 머릿속에 모두 그려진다는 것이다.

 

 

소설의 첫 시작은 콩브레를 회상하는 장면이다. 콩브레는 마르셀이 유년시절을 보낸 곳으로, 여기서 화자는 곧 마르셀의 분신이나 마찬가지로 보여진다. 마르셀이 어렸을 때부터 병약하여 천식을 앓은 것처럼 소설속의 화자도 몸이 병약하고 예민하여 엄마에게 무척이나 의존적인 모습이다. 엄마가 해주는 굿나잇  키스에 대한 욕망과 집착. 그리고 엄마와 함께하는 저녁시간이나 책 읽는 시간을 가장 감미롭고 행복한 시간으로 회상하는 것을 보며 화자의 어머니에 대한 집착에 의아함이 들었다가 그렇게 어머니의 사랑에 집착한 애정과 더불어 어머니가 선사해준 시간들이 화자에게 소설가가 되는 꿈을 심어주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 본다.

 

그리고 화자의 집에 자주 놀러오는 손님 스완에 대해서 화자는 비교적 많은 애정을 가지고 지면을 할애하고 있다. 그 이유는 후에 스완의 딸 질베르트가 화자의 첫사랑이기 때문이기도 하고 소설 속에서 스완이라는 인물에 내포되어 있는 의미가 아마도 가장 크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주식중개인이었던 아버지 스완과 화자의 할아버지는 친구사이이라 아들 스완이 놀러오는 것을 가족들이 반기지는 않았지만, 딱히 싫어하지도 않았다. 그 이유는 스완이 스스로 계급을 속이고 행동했기 때문인데  사실 스완은 상류사회에서 가장 환대받는 인물이자 부르주아 계급이었다. 중간계급이었던 화자의 집에서는 그저  스완을 아버지 스완처럼 중간계급으로 바라보았다.  프루스트는 사회란 폐쇄적인 카스트로 구성되어 있어, 각자는 태어나자마자 자기 부모의 계급을 이어받아 예외적인 일 아니고서는 계급에 지배받고 있다고 표현하고 있다.  이 작품에서 핵심적인 주제중 하나는 게르망트가로 표현되는 귀족 세계와 스완으로 표현되는 부르주아의 대립이다. 이것은 또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전편에 아우르는 주제이다.

 

그리고 사랑.

나는 그녀를 사랑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한 존재가 어떤 미지의 삶에 참여하고 있어서 사랑이 우리로 하여금 그 미지의 삶 속으로 뚫고 들어가게 해 줄 수 있다고 믿는 것. 바로 이것이 사랑이 생겨나기 위해 필요한 전부이며, 사랑이 가장 중요시 하는 것으로, 나머지는 중요하지 않다.

 

콩브레 주변에 산책을 하려면 길이 두개 나 있는데 이 두 '길'은 정 반대의 방향으로 한쪽은 메제글리즈라비뇌즈라고 하고 하나는 게르망트 쪽이다. 메제글리즈라비뇌즈를 지나려면 스완의 소유지를 지나야하기 때문에 스완네 집 쪽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책을 읽다보면 스완네집 쪽과 게르망트 쪽이라는 이 두길에 담겨있는 무수한 은유들이 무궁무진하게 숨겨져 있음을 느끼게 된다. 책의 각주에는 이 두 길이 잃어버린 시간을 구성하는 커다란 두 기둥이라는 역자의 보충설명이 있다. 아마도 이것이 어떤 계급을 의미할 수도 있고 기억에 대한 오류일수도 있고 연대기적 착오일 수도 있을 것 같다. 1편에서는 단지 두 길을 산책하며 아름다운 나무의 향연과 강가로 난 장면들을 눈으로 스케치할 뿐이다.

 

스완네 집 쪽은 가장 아름다운 평원의 풍경이며 게르망트 쪽은 전형적인 냇가 풍경으로 현실적이기보다는 관념적인 것으로 그 길의 종점과도 같은, 적도나 극지방, 혹은 동양처럼 일종의 추상적이고 지리적인 표현이었다. 나는 그 두 길중 어느 한 길의 작은 부분도 내게는 소중했고, 그 길의 특별한 우월성을 잘 보여주는 것 같았다. (중략) 그러나, 두 방향으로 동시에 간 적 없는 습관 때문에 더욱더 절대적인 것이 되어, 두 길은 멀리서 서로 알아보지 못한 채, 여러 다른 오후들을 소통이 안되는 밀폐된 항아리 안에 가두고 있었다.

 

1권에 등장하는 인물은 이 외에도 옛 피아노 선생 뱅퇴유가 딸에 대한 지나친 믿음이 오히려 화가 되어 슬픈 생을 마감하는 과정을 통해 믿음과 사실의 연계성을 떠올리고, 하녀 프랑수와즈가  레오니 아주머니를  섬기는 과정에서 레오니 아줌마가 보여주었던  증오와 의심, 노여움 이런 것들이 때론 한 사람에게는 존경과 사랑의 감정이 될 수 있기도 하다는 것을 회상한다. 1권 마지막에 화자가 두 길을 바라보면서  시사해주는 삶의 모습이 자신의 지적인 삶과 맞닿아있음을,  이 삶이 우리 안에서 서서히 진행되는 과정을 통해 새로운 길을 열어 주는 진리 발견을 위해 오래 전 부터 준비해 온 길이라는 말을 한다.  나는 이 말이 콩브레에서 보내는 유년시절을 회상하는 화자가 오래 전 부터 준비해온 길의 초입에서 나를 초대하는 기분이 든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그 길 입구에 서 있는 기분은 과히 환상적이다. <2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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