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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러워야 사람이다 - 고전으로부터 배운다 ㅣ 한국국학진흥원 교양총서 오래된 질문을 다시 던지다 4
윤천근 지음, 한국국학진흥원 기획 / 글항아리 / 2012년 8월
평점 :
우리는 부끄러움을 모르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나 스스로 부끄러움을 말하는 것이 사실 부끄럽다. 과거 선인들에 비해서 우리가 아무리 인격수양을 하고 고전을 읽는다 한들, 선인들이 닦던 인격수양에 따라가려면 아마 발톱의 때에도 끼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 때문이다. 나는 한편으로는 너무 착한 것에서 오는 부끄러움은 피하고 싶다. 지금은 너무 착한 것도 죄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기 때문이다. 그럼 언제부터 우리 사회에는 부끄러움이 미덕이 아닌 심지어는 죄악처럼 인식되기 시작했을까? 아마도 일일 시스템이 자본(돈)또는 물질(이)을 중심으로 움직이기 시작하면서 부터일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자본의 무제한적인 이윤 추구를 방치한 결과이다. 맹자가 "온 나라가 이를 추구하면 그 이 때문에 산산조각이 날 것이요, 온 집안이 이를 추구하면 그 이 때문에 부모와 자식이 서로를 내팽개칠 것이다.‘ 라고 한 것처럼, 우리 사회는 인정하기 싫지만, 맹자가 경고하였던 사회의 그 모습 그대로이다.
이 책 『부끄러워야 사람이다』 는 한국국학진흥원이 펴내는 ‘오래된 질문을 다시 던지다’ 시리즈로 제4권에 해당한다. 사실 부끄러움이란 아주 오래된 미덕이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는 부끄러움이란 저 멀리 던져야 하는 것이 경쟁사회에서 살아남는 법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저자는 부끄러움을 불러일으키는 잣대는 도덕적인 것이며 도덕이야말로 인간의 양식과 연결되어 있고, 이것에 거리낌이 없을 때 인간의 행복감이 크게 향유될 수 있다고 한다.
부끄러움이란 이상의 눈을 가지고 현실의 자신을 솔직하게 바라보는 자의 마음속에 자리를 잡는 감정이다. 이 감정을 갖지 않는 사람은 스스로의 현실에 만족하고 있거나 혹은 내 기적을 만들어가기에 아무 관심이 없거나, 둘 중 하나다.
책의 구성은 3부로 나누어져있고, 1부는 부끄러움에 관한 저자의 인문학적인 철학적 사색을 들을 수 있으며, 2부에서는 『논어』 『맹자』 『대학·중용』부터 『근사록』과 『주자어류』,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등 원전과 함께 밝히는 ‘부끄러움’을 통한 자아 성찰의 시간을, 3부에는 원전을 실어놓았다.
군자는 자신에게서 구하고, 소인은 다른 사람들에게서 구한다. -논어 6-
이상하게 사람이라는 종자는 ‘나’를 볼 수 없고 남을 보게 되어 있나보다.하루의 반 이상이 남을 비난하는 것으로 시간을 보내고 남에게 무언가를 기대하다가 실망하면 남탓만을 하게 된다. 하지만, 이 구절 하나로 진정한 부끄러움이 무엇인지를 알게 하는 기분이다. 모름지기 치열한 자기 성찰이란 자기 자신을 고민하고, 자기 자신을 완성시켜 나가며 타인을 가르침을 주는 존재로, 부끄러움을 촉발시키는 존재로, 간접적인 작용으로 생각해야 하는 것임에도 남이 잘못으로 치부하곤 한다. 위 구절에서처럼 군자는 부끄러워하는 것도 자기의 존재성의 어떤 부분을, 자랑스러워 하는 것도 자기 존재 속에서 자랑스러워해야 하는 것임을 생각해보게 되었다.
공자가 말했다. “현자를 보면 바르게 할 일을 걱정하고 현명하지 못한 사람을 보면 안으로 스스로를 반성한다.” -논어 1-
타인의 시선에 기대서 위안을 찾고, 진실한 자아는 돌아보지 않는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저자는 군자가 타인의 시선 앞에 자신을 놓고 있다면 그는 진실한 자신으로부터 도피하는 것이며, 가장과 허위로 자신을 꾸며서 보여주고 있다면, 그에게 도덕의 길은 절대 열리지 않을 것이라 한다. 군자는 타인에게서 부끄러운 것을 찾아서 그 자신의 부끄러움으로 돌아가고, 타인에게서 자랑스러운 것을 찾아서 그 자신의 자랑스러운 것으로 환원시켜내며 진실한 자기 자신과 대면하면서 스스로의 이상을 목적지로 삼아나가는 사람에게는 '부끄러움'이 언제나 절실하게 다가온다고 한다.
부끄러움(의)이 없으면 인간이 아니고, 사양하는 마음(예)이 없으면 인간이 아니고, 시비를 따지는 마음(지)이 없으면 인간이 아니다.
가끔 흔들릴 때가 있다. 그것은 밥벌이의 지겨움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냥 그러고 싶을 때가 찾아 올 때면 고전이 주는 말들이 이 흔들림을 잡아줄 때가 있다. 고전은 우리가 알지 못했던 내면의 자아를 투명하게 반추하여 준다. 모든 문제는 결국 '나'로서 비롯된다. 고전은 타인을 이해하게 해주고 사람의 본성에 대한 깨달음을 주지만 . 그 모든 것은 바로 ‘나’를 가르키고 있다. 그래서 옛 성인들이 스스로를 닦기 위해 공부하고 배우는 것을 멈추지 않았던 게 아닐까? 대학의 모든 가르침의 기본은 수신修身이다. 나라를 다스리기 위해서는 수신(자신의 몸을 닦는 일)이 먼저이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 . <이주현목사의 대학중용 읽기>에서는 수신이라는 기둥에 격물,치지,성의,정심이라는 뿌리가 있고 그 위에 제가 , 치국, 평천하라는 가지와 열매가 대학이라는 나무라고 하였다. 나무의 깊은 중심이 수신인 것처럼 모든 것은 중심인 '나'의 문제이다. 결국 오늘 남으로 인해 흔들리던 나를 다잡으며, 치를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