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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을 위한 우산 (무선)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55
빌헬름 게나치노 지음, 박교진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12월
평점 :
자신의 삶이 하염없이 비만 내리는 날일 뿐 이고 자신의 육체는 이런 날을 위한 우산일 뿐이라고 느끼는 그런 사람들이 저희를 찾아옵니다. -p117
잉여인간이라고 들어보셨나요?
<이 날을 위한 우산>에는 한 남자가 나옵니다. 이 남자는 스스로 잉여인간이 된 사람입니다. 왜 그가 스스로 잉여인간이 되고 싶었을까요? 삶이 지루하기 때문입니다. 주인공은 ‘화자’가 되어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죠. 리자가 벌어다 주는 돈으로 근근히 먹고 살았던 주인공은 어느 날, 통장잔고가 비어있는 것을 보고야 리자가 떠났다는 것을 알아차리죠. 그리고 버림받았다는 것도, 말그대로 생활고가 찾아와서야 자신에게 위기가 닥쳐왔다는 것을 느끼는 거죠. 인간이 가장 궁핍을 느낄 때가 아무래도 배가 고플때가 아닐까요? 네, 주인공은 배가 고파졌어요. 그런데 먹고 싶은 것을 먹을 처지가 아니었죠. 서서 먹는 , 빈민층이나 가는 곳이라 여겼던 식당에서 주인공은 눈을 질금 감으며 허기진 배를 채웁니다. 먹기 싫은 척 하면서요. 자신이 여기와서 밥을 먹는 것은 배가 고파서가 아니라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말이죠. 왜냐구요? 창피하니까요. 인정하기 싫은 거죠. 주인공은 이런 곳에서 식사하기에는 너무 많이 배웠거든요. 거리를 배회하던 주인공은 공원에 앉아 사람들을 관찰하는 잉여인간이 되기로 해요. 심지어는 자신의 삶을 먼지보푸라기로 표현하죠.
먼지는 기이하리만치 은밀히 증가해간다! 보풀이 인다는 말이 어쩌면 내 삶의 현 상태를 적당히 표현해줄 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불현 듯 떠오른다. 먼지보푸라기와 똑같이 나 또한 속이 거의 들여다보이고, 안은 연약하고, 밖으로는 쉽게 휘어지고, 사람들에게 지나칠 정도로 매달릴 뿐 아니라 말도 없다.
이제부터 주인공은 먼지 보푸라기가 되어 세상을 보고 있어요. 갑자기 아무 생각이 없어진 주인공 ‘나’는 유난히 속눈썹에 숱이 많았던 첫사랑과 닮은 여자 군힐트를 바라보며 자신의 사랑을 이렇게 정의합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잊지 못하는 것은 함께한 경험 때문이 아니라, 그 사람들을 마지막으로 보고 나서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야 비로소 우리의 머릿속에 선명히 떠오르는 세부적인 신체 부위들 때문이다.” 라고요, 이게 바로 잉여인간의 사랑인거죠. 사랑도 감정이 아닌 신체부위라고 하는 이런 유치한 사고를 한 것은 주인공 ‘나’는 아직 감정이 성숙되기 전이기 때문입니다. 잉여인간에게 감정은 사치이니까요. 그래서 주인공은 끊임없이 자신을 두 개로 분리시켜 세상을 봅니다. 혹시 그거 해 보셨어요? 나와 나를 분리시켜보는 거요. 한번쯤은 그럴 때가 있잖아요. 삶이 나를 배신했다고 느꼈을 때가, 그래서 주인공은 일자리를 잃고 정처없이 이리저리 걸어다니는 맨정신의 남자와 망상에 빠져 그런 일들에 대해 아무것도 알고 싶어하지 않는 몽상가로 분리하여 세상을 바라봅니다.
난 마치 어렸을 때처럼 거의 모든 사건의 첫머리만을 이해하는 느낌이 다시 드는 것 같다.
첫머리를 이해하고 나면 난 아마도 도망쳐버릴 것이다. 온갖 복잡한 삶이 늘 나를 얼마나 두렵게 만들었는지 아주 또렷이 기억날 테니까 말이다.
분리된 주인공은 이렇게 삶을 낯설게 바라보기 시작합니다. 처음 세상을 낯설게 바라보던 그는 즐겁기도 하지만, 이내 다시 두려워집니다. 삶은 이처럼 낯섬으로 시작하여 즐거움을 주지만, 결국 두려움을 동반하여 먼지 보푸라기처럼 주인공 ‘나’를 꼬옥 붙어 다니죠. 주인공 ‘나’는 또한 자신이 힘멜스바흐처럼 될까 두려워하고 있어요. 주인공이야 잉여인간을 흉내 내고 있는 가짜이지만, 친구 힘멜스바흐는 진짜 잉여인간이거든요. 그래서 주인공 나는 삶이 두렵습니다. 주인공은 자신이 수준 높은 교육을 받았지만 아웃사이더인 현대판 거지의 모습이란 사실을 절실히 깨달았기 때문이죠.
진짜로 중요한 사람들이란 오직 자신들의 학식과 지위를 삶 속에서 서로 융화시켜나갈 수 있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비만 내렸던 주인공의 삶에 나타난 죽어가는 사람들-발크하우젠 부인-의 상담을 해주게 되면서 이제 주인공에게도 삶에 우산이 드리워지기게 됩니다. 오랫동안 짝사랑하였던, 사랑하기에는 너무나 아름다웠던 수잔네와 ‘신체부위’가 아닌 사랑이라는 감정을 기억해내고, ‘삶 앞에 머리를 자주 숙인다면 언젠가는 산다는 것에 동의할 수도 있으리라는 희망이 수잔네의 두 다리 사이’에서 생겨납니다. 여기서 두 다리 사이에서 깨달음은 중요합니다. 외설적으로 들리지만, 주인공 ‘나’는 소설 속에서 많은 여자를 만나지만, 행위가 이루어진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처음에 말씀드렸죠? 이 장면은 주인공이 잉여인간을 탈피하는 장면이기 때문에 무척 중요한 장면입니다.
그리고 주인공은 외칩니다. 외부세계가 마침내 내 내면의 텍스트들에 맞아떨어지기만을 더 이상 기다리지 않는다고 ! 이제 나 자신의 삶의 눈먼 승객으로 사는 짓은 그만둘거야 !
이렇게 해서 어느 도시의 방랑자 이야기는 끝이 납니다. <이날을 위한 우산>은 2004년 게오르크 뷔히너상 수상작입니다. 책은 무척 얇지만, 얇다고 깔보면 안됩니다. 이 책 안에 실려있는 삶의 깨달음은 보여지는 것 이상입니다. 우리의 삶은 '낯섦'에서 출발합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즐거움도 느끼지요. 그러나, 이내 삶의 곳곳에 숨겨진 의미를 알게 될 때마다 두려움을 느끼게 되지요. 이런 삶의 과정을 주인공을 통해 잘 보여주고 있답니다. 그래서 주인공은 다름아닌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런 주인공의 시선을 따라가다보면, 살아가는 것이 녹록치 않음을 깨닫습니다. 삶은 아름다운 것 ! ~ 맞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불행을 감수할 때, 삶이 아름다워진다는 것을 이 소설은 말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제목도 이날을 위한 우산이 아닐까 합니다. 주인공이 먼지 투성이의 삶을 이해하게 된 것은 다름아닌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어주었을 때 입니다. 그런 말이 있죠, 진정한 사랑은 우산을 주는 것이 아니라 쏟아지는 비를 같이 맞아주는 거라고. 주인공은 그렇게 삶을 이해합니다. 이 책은 그렇게 쏟아지는 비를 같이 맞아주는 책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