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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풍의 언덕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18
에밀리 브론테 지음, 김종길 옮김 / 민음사 / 2005년 3월
평점 :
정혜윤님의 <세계가 두 번 진행되길 원한다면>을 읽고, 폭풍의 언덕의 히스클리프가 가는 곳마다 부유하여, 다시 읽게 된 책이다. 21세기가 되어도 여전히 히스클리프가 매력적인 이유를 정혜윤은 “나는 너야!’라는 선언이 인간의 삶에 얼마나 큰 의미를 부여하는지 알기 때문이다. 불행 없는 소망은 없다는 걸, 부도덕하지 않은 절대성은 없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라고 하였듯이 히스클리프의 사랑은 절대적이고도 영원한 사랑이기 때문이다. 젊은 날에 히스클리프의 사랑에 대한 집념을 이해할 수 없었던 것 같다.(하지만, 사랑을 한다면 히스클리프처럼 하고 싶다는 생각이 ^^;; )
드러시크로스 저택에 세를 들기 위해 록우드라는 청년이 워더링 하이츠(폭풍이 불면 정면으로 바람을 받아야만 하는 집)의 집주인인 히스클리프를 찾아가는 첫날 밤이 이야기의 시작이다. 워더링 하이츠에서 만난 히스클리프의 식구들은 캐서린, 헤어튼, 조셉, 그리고 가정부 질라. 록우드는 이 식구들의 첫 만남이 다른 가족과는 다른 분위기인데다가 종잡을 수 없는 가족관계에 의아함을 느낀다. 이상한 암울함이 드리워진 가족들. 록우드는 서둘러 워더링 하이츠를 벗어나고 싶었으나, 폭설로 인해 그만 발이 묶이게 된다. 가정부 질라의 심술로 인해 히스클리프가 아무도 재워서는 안된다는 방에 묶게 된 록우드는 그곳에서 낡다못해 곰팡이가 피어있는 책을 발견하게 되는데 그 책에는 ‘캐서린 언쇼’였다가 ‘캐서린 히스클리프’였다가 ‘캐서린 린튼’ 으로 이름이 쓰여 있었다. 그리고 잠 속에 빠진 록우드는 계속된 악몽과 전나무 가지가 유리창을 두드리는 소리 때문에 깨어나는데 그곳에서 여자아이 유령을 본다. 공포에 찬 록우드의 소리에 놀라 쫓아온 히스클리프는 록우드의 말을 듣고 창을 바라보며
“들어와 ! 들어와 ! 캐시 제발 들어와 . 아 제발 한 번만 더! 아 ! 그리운 그대, 이번만은 내 말을 들어주오. 캐서린 이번만은 !”
캐서린 린튼이 죽은지 수십 년이 흐른 뒤에 히스클리프를 찾아 떠돌아다니는 아기유령이라... 나는 여기서 의아함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리고 캐서린은 왜 자신의 이름을 캐서린 린튼이라고 했을까? 록우드 조차 캐서린 언쇼가 아닐까 하는 의아함을 떠올리는데 , 책을 다 읽고 나서야 아기 유령의 모습으로 나타난 이유와 캐서린 린튼이라고 한 이유를 깨달을 수 있었다.
그것은 캐서린의 사랑의 형체이다. 캐서린이 캐서린 히스클리프로 살았던 생애, 가장 아름다웠을 때가 어린아이의 사랑이었다면, 자신을 캐서린 린튼이라고 하는 것은 자신이 어른이 되어서도 포기하지 못하는 현실이다. 실제로 캐서린은 자신이 에드거 린튼을 사랑하는 것을 포기하지 않으면서 히스클리프를 사랑한다. 히스클리프 자체가 자신이라고 하듯이, 자신이 사랑하는 히스클리프와 에드거와의 사랑은 분리되지 않는 사랑이었다. 그러므로 어떤 것도 포기하지 않으며 소유하는 것이 가능한 그런 사랑이었기에 캐서린은 온전히 히스클리프를 온전히 사랑할 수 있는 시기는 어린 아이였을 때나 가능한 사랑이었다. 어쩌면 히스클리프가 캐서린을 사랑한 최초의 모습이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서로에게 완전한 사랑이었을 때이기에 캐서린은 죽어서도 어린 아이 유령의 모습으로 그려진 듯 하다. 그렇지만 어쩐지 캐서린의 사랑, 어떤 면에서는 너무도 이기적인 사랑의 모습이다.
린튼에 대한 내 사랑은 숲의 잎사귀와 같아. 겨울이 돼서 나무의 모습이 달라지듯이 세월이 흐르면 그것도 달라지리라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어. 그러나 히스클리프에 대한 내 애정은 땅 밑에 있는 영원한 바위와 같아. 눈에 보이는 기쁨의 근원은 아니더라도 없어서는 안 되는 거야. 넬리, 내가 바로 히스클리프야. 그는 언제까지나 , 언제나 내 마음속에 있어. 나 자신이 반드시 나의 기쁨이 아닌 것처럼, 그도 그저 기쁨으로서가 아니라 나 자신으로서 내 마음속에 있는 거야. 그러니 다시는 우리가 헤어진다는 말은 하지마.
반면에 히스클리프에게는 캐서린이 전부인 사랑이었다.
캐서린의 오빠 힌들러에게 늘 구타를 당하고 폭행을 버티게 해 줄수 있었던 캐서린이라는 존재는 히스클리프의 전생을 다 차지하고도 남았으니, 캐서린이 부유한 집의 아들 애드거 린튼과 결혼하자, 히스클리프는 복수하기 위해 애드거의 동생 이사벨라와 결혼한다. 그의 복수는 여기서 끝나지 않고 오빠 힌들러를 도박으로 유혹하여 워더링 하이츠를 빼앗고 힌들러의 아들, 헤어튼을 자신처럼 키운다. 히스클리프가 정신적인 타락과 보조를 같이하여 걸음걸이부터 얼굴, 성품이 모두 침울해져갔던 것처럼 과거 자신이 워더링 하이츠의 주인에게 받았던 수모를 워더링 하이츠의 주인에게 그대로 갚아주는 것이다.
무엇 하나 그녀 생각을 불러일으키지 않는 것이 있어야 말이지! 이 바닥을 내려다보기만 해도 그녀의 모습이, 깔린 돌마다 떠오른단 말이야 ! 흘러가는 구름송이마다, 나무마다, 밤이면 온 하늘에, 낮이면 눈에 띄는 온갖 것들 속에, 나는 온통 그녀의 모습에 둘러싸여 있단 말이야 ! 흔해 빠진 남자와 여자 얼굴들, 심지어 나 자신의 모습마저 그녀의 얼굴을 닮아서 나를 비웃거든. 온 세상이 그녀가 전에 살아 있었다는 것과 내가 그녀를 잃었다는 무서운 기억의 진열장이라고 !
그러나, 히스클리프는 자신처럼 키운 헤어튼, 즉 자신의 전생을 바쳐 복수하기 위해 워더링하이츠 주인의 아들을 데려와 키우지만, 운명의 얄궂은 장난은 히스클리프를 다시 원점에 서게 하는 것이다. 헤어튼을 보며 히스클리프가 절규하는 이유 또한 자신과 무섭도록 똑같은 , 자신이 키운 헤어튼에게서 ‘불멸의 사랑, 권리를 지키겠다는 무모한 노력, 나의 타락, 나의 자존심, 나의 행복, 고뇌의 망령’ 을 보게 됨으로써 히스클리프는 자신의 무섭도록 집요하였던 워더링 하이츠와의 싸움을 끝낼 때가 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폭풍의 언덕은 록우드와 엘렌(넬리) 두사람이 대화를 하며 이야기가 진행된다. 워더링 하이츠에서 히스클리프를 처음 만난 후 넬리에게서 워더링 하이츠의 내력을 듣게 되는 이야기는 현재와 과거 , 다시 현재라는 액자식 구성으로 이야기를 해 나가는데 워더링 하이츠의 오랜 가정부인 넬리는 히스클리프와 캐서린의 어린 시절부터 시작하여 이들의 죽음을 모두 목격한 산증인이다. 넬리는 이야기만으로도 그들의 내면심리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게 해주고 있다. 그리고 그런 세세한 묘사가 폭풍의 언덕을 멜로드라마가 아닌 인간 실존의 세계를 그려낸 작품으로 존재하게 한다.
바람을 정면으로 맞서는 곳에 세워진 집, 지금은 누구도 그런 집을 짖지 않지만, 바람을 정면으로 맞서기 위해서는 바람보다 더 강해야 한다. 그래서 폭풍의 언덕위에 세워진 워더링 하이츠는 강하다. 어떤 바람이 불어도 흔들리지 않는 워더링 하이츠는 또한 히스클리프와 닮았다. 폭풍과 싸우려는 강한 집념과 무모함까지 말이다...그런 히스의 절대적이고도 영원한 사랑의 모습에 현재에도 세기의 사랑으로 불리워지는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