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눈물을 닦다 - 위로하는 그림 읽기, 치유하는 삶 읽기
조이한 지음 / 추수밭(청림출판)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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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딸아이의 친구가 교통사고로 하반신을 절단하였다. 출근할 때마다 나는 그 길을 어쩔 수 없이 지나간다. 지나갈 때마다 눈물이 나와 고개를 숙이고 지나간다. 다 큰 어른이 울고 다닌다고 할까 두려워서가 아니라, 그 아이의 아픔에 아무 위로가 되지 않는다는 절망 때문이다. 누구에게나 한번은 커다란 슬픔 하나 정도는 살아가면서 겪게 된다고 하는데 그 아이에게는 그 슬픔이 너무 빨리 왔다. 그러나, 슬픔이라는 몫은 스스로 감당해야 하는 것 같다. 슬픔은 나누는 것이 아니라, 이겨내야 하는 고독과 동의어이다. 그래서인지 모르지만  요즘처럼 세상이 절망으로 보이는 때가 없었던 것 같기도 하다. 한편으로는 그동안 세상에 너무 관심을 두지 않고 살았던 탓도 있다. 내 안의 울타리에서 한 발짝도 나오기를 거부하다가 넓은 세상에 눈을 돌려보니 우물 안의 개구리는 바로 나를 말하는 것이었다. 세상을 바르고 정직하게 살면 되는 것이라고 말한 윤리나 도덕은 이제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공허한 메아리가 된 것만 같다. 새로 시작한 일 때문에 어쩔수 없이  신문과 뉴스를 챙겨보는데  매일같이 충격받고 있다. 텔레비젼도 없고 별로 주변에 관심을 두지 않았던 탓이라 생각하지만 , 매일 같이 보도 되는 사건과 사고는 믿기 어려운 절망과 같은 소식들이다. 초등학생이 사는 게 너무 힘들다는 유서를 쓰고 자살하는 사회가  우리사회의 현주소라니... 그래서인지 더욱 울적한 날들이었다. 

 

이 책 《그림, 눈물을 닦다》는 치유하는 그림 에세이란 부제를 가지고 있다. 치유라는 것은 우리의 삶에 메스를 대고 상처를 끄집어내야만 치료가 가능하다. 이 책은 그렇게 삶의 깊은 곳에 자리잡고 있는 상처를 끄집어내 그곳에 메스를 대는 기분이다. 우리 사회에 만연한 긍정병으로 인해 타인을 의해 씌어진 삶이 아닌, 오로지 '자신' 위한 삶을 살아가는 방법과 그림을 통해 상처를 치유해가는 과정이다. 그 과정을 통해 우리 안에 꼭 억눌러왔던  슬픔과 아픔, 상처가 바로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이 감당해야 할 몫이라는 것을 일깨워준다. 그림과 글을 읽어가다보면  마치 왓츠의 <희망>이란 그림에서처럼 두눈이 보이지 않을지라도 마지막 하나 남은 현에 의지하여 살아가는 여인의 모습에서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결코 삶을 포기하지 않는 희망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처럼, 절망이라는 토양에 희망이라는 싹이 나는 경험을 하게 된다.

 

 

 

 

  슬프지 않은 인생은 없기 때문이다. 비극은 인간이 피할 수 없는 하나의 운명이다. 삶 자체가 비극이다. 부재,어둠,소망의 결핍, 나처럼 평소에 늘 조증상태에 있는 사람에게도 인생은 기본적으로 슬프다.

 

제우스에게 저항한 프로메테우스처럼,

인간은 저항함으로쎠 무의미한 삶에서 의미를 발견하고

자신의 존재를 증명한다.

베첼리오 티치아노,<프로메테우스>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서는  슬픔을 이해하는 것부터 시작한다. 저자는 일상에서 아름다움을 스캔한  예술가의 모습이 아닌, 독수리에게 끊임없이 몸통을 쪼이면서도 살아야 하는 존재로서의 예술가들의 운명과  무의미한 삶에서 의미를 찾기 위해 ,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 살아야하는 인간의 숙명을 보여주는  프로메테우스의 그림을 통해  생生의 날 것 그대로의 모습과 직면하게 하고, 아메데오 모딜리아니의 슬프고도 비극적인 사랑, 알베르토 자코메티의 절망적이고도 처절한 사랑, 아나 멘디에타의 불행한 죽음, 고흐와 창녀와의 슬픈 사랑 등 우리 내면에 잠재되어 있는 슬픔이나 절망, 분노와 마주하게 하며, 서서히 그림을 통하여 우리가 슬픔을 감당해야 하는 이유를, 비극을 이해함으로써 인생의 진정한 의미를 성찰하게 한다. 

 

사랑은 오해다. 동시에 사랑은 상상력이다.

연인들은 불완전한 상대를 앞에 두고 완전한 서로의 모습을 상상한다.

상상력이 있기에 우리는 사랑을 할 수 있다.

-르네 마그리트, <연인> - 

 

이 그림을 보는 순간 머리가 멍해졌던 것 같다. 르네 마그리트는 기발한 발상으로 관습적 사고를 거부하고 상식과 고정관념의 틀을 깨고 세계를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보며 사람들에게 충격을 준 화가로 유명한데 시인 앙드레 브르통이 '경이로운 것만이 아름다운 것'이라고 했듯이 르네의 기상천외한 발상은 그림을 보는 이들로 하여금 항상 신선한 충격을 주는 것 같다. 사랑이란 것은 어쩌면 이 그림처럼 서로에 대해 잘 몰랐을 때 가능한지도 모르겠다. 서로가 완전하다는 착각이 사랑을 완성시키기 때문이다. 르네의 사랑에 대한 통찰 <연인>은 어쩌면 사랑뿐 아니라 타자에 대한 오해와 착각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그림이 아닐까 한다. 한편으로는 태어나면서 누군가를 위해 살아가는 교육을 받고 타인에 의해 길들여진 채 살아가며 사랑할 줄 모르는 괴물이 된 채 사랑하는 슬픈 연인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태연한 인생>에서 류가 그랬던가?  타인이란 영원히 오해하게 돼 있는 존재이지만 서로의 오해를 존중하는 순간 연민 안에서 연대할 수 있으며 고독끼리의 친근과 오해의 연대가 우리의 인생이라고..." 이렇게 르네의 그림은 참 놀라우리만치 삶에 대한 통찰력을 지녔다.

 

<결핍을 즐겨라>에서는 결핍이 있기에 무엇인가를 채울 수 있는 희망이 생긴다고 한다. 이 책은 심리학과 미술사를 전공한 미술평론가 조이한의 그림 심리 에세이이다. 저자는 그림이나 예술 작품을 만나는 일이 사람과 사랑에 빠지는 과정과 유사하다고 한다. 가끔 마음이 울적하거나, 요동칠때 보는 그림이 있는데 앞서 말한 왓츠의 <희망>이라는 그림이다. 예술은 슬픔과 비극만 가득한 세상을  아름다움으로 승화켜주는 힘이 있는 것 같다. 그래서인지 요즘처럼 예술이 필요한 이유를 절감한 적이 없다. 이명옥 교수는 인생이라는 흙길을 걸어가려면 신발에 흙이 묻는 것을 겁내지 말아야 하며 , 신발에 흙을 묻히지 않고, 인생의 고단함과 장애물을 극복하지 않고, 삶의 길을 끝까지 걸어갈 수 있는 사람은 없다고 하였다. 슬픔은 이겨낼 수는 있어도 벗어날 수 없듯이, 저자는 상처를 치유할 수 없다면, 묵묵히 상처를 껴안고 걸어가는 것도 나쁘지 않으며 비극이 삶의 일부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 치유의 첫걸음임을 말한다. 이별했을 때, 이별노래가 심금을 울리듯이 마음이 아플 때 슬픈 그림은 내면 깊은 곳을 건드려 오히려 마음을 따뜻하게 한다.  <그림, 눈물을 닦다>는 페르소나를 벗고 진정한 '나'를 만나게 하는 여정을 통해  인생이라는 거울을 마주보게 하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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