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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과 에블린 ㅣ 민음사 모던 클래식 57
잉고 슐체 지음, 노선정 옮김 / 민음사 / 2012년 6월
평점 :
아담과 에블린은 장르는 로맨틱 코미디로 볼 수 있다. 서사가 없이 대화체로 진행되는 이야기라 이야기 전개가 무척 빠르다. 그리고 주인공들의 심리에 대한 묘사보다는 가벼운 연애감정처럼 가벼움이 느껴지는 주인공들이다. 하지만, 이런 가벼움이 오히려 현실성 있게 다가오는 기분이 든다. 서독과 동독의 통일 전, 시대의 무거움은 전혀 없지만, 우리가 일상 생활에서 간과할 수 없는 사회와 일상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인 것 같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문학적인 서사만 가득한 소설은 끊임없이 사유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지만, 실생활과는 많이 동떨어져 거리감이 든다. 그러나, 현실에 직면한 먹고 사는 문제와 대화는 늘 우리가 경험하는 문제들과 맞닿아있어 친숙한 느낌이 드는 것처럼 이 소설은 그 어떤 문학보다 친숙하게 느껴지는 기분이다. 독일문학을 보면 우리나라 문학과 비슷한 부분이 많다고 느낄 때가 많다. 그리고 같은 공통점 , 분단의 아픔을 가져서인지 독일 문학은 동지적 연대감이 들 때가 많다. 이 책의 시대적 배경은 통일 전으로 동독의 독재정치와 공산주의 체계에 반발하여 100만명이상의 동독인들이 서독으로 탈출하였을 때이다. 이와같이 대규모 이탈자들의 증가는 동독 사회의 기반을 심각하게 위협하는 것이었다. 서독으로 탈출하는 사람들의 절반 이상이 20대의 젊은층으로 서독에서 자유를 꿈꾸었다. 《아담과 에블린》은 겉으로는 연애소설처럼 보이지만, 전체적으로는 자유를 찾아 동독에서 서독으로 가려는 젊은이들의 이야기이다.
아담은 동독에서 ‘맞춤재단사’로 안정적인 생활을 하고 있었다. 지푸라기처럼 현금이 넘쳐나는 이유는 그가 여자들에게 아름다운 옷을 지어주는 동시에 자신이 창조한 아름다운 옷으로 아름다워진 여자와의 행위를 향유한다. ( 아담의 입장에서는 예술이지만, 나같은 일반인이 볼 때는 바람둥이에 한낱 카사노바에 불과해 보이지않지만) 이런 향락이 아담에게는 사랑하는 여인 에블린에 대한 일말의 죄책감조차 보이지 않는다. 한편으로는 아담은 자신이 재단하여 완성하는 작품에 대한 강한 애착이 많은 듯 하다. 자신을 때로는 하나님의 첫 창조물인 아담으로 착각하여 하와의 옷을 만들어준다는 착각을 하는 것으로 봐서는 예술가의 천재성에 따라오는 괴팍함이 아담에게도 보여진다. 그런 탁월한 재단실력을 겸비한 탓인지 아담은 공산주의 체제라 해도 재단사라는 안정된 직업으로 인해 중산층 이상의 삶을 누리고 있는 직위를 가지고 있다. 그와는 반대로 에블린은 백수인데다 동독의 관료주의적 통제에 갑갑함을 느껴 하루라도 빨리 서독으로 가서 대학에 다니는 것이 꿈이다. 떠나고 싶지 않은 아담은 늘 핑계를 대며 밍기적거리지만..........어느 날, 아담이 바람 피는 것을 본 순간, 뒤도 돌아보지 않고 친구들과 서독으로 떠난 에블린을 뒤따라 자신의 애마 ‘하인리히’를 타고 따라가게 되는데, (아담은 자동차조차도 이름을 부르는 것을 좋아한다.) 그리고 또 덩치와 안 어울리게 거북이 엘피를 키우는데 엘피조차도 얼마나 애지중지 하는지, 아담은 낭만주의자에 낙천주의자인게 분명하다. 그리고 서독으로 가는 길에 만난 한 여자 카탸를 도와주는 모습을 보며 정도 많은 것 같다. 비자가 없는 카탸가 서독으로 가기 위해서는 어떤 댓가든 치르겠다고 하며 아담을 유혹하는 말을 하지만, 아담은 오히려 돈까지 빌려주며 사랑하는 에블린을 만나러 가는 중이라며 아무 조건 없이 카탸와 동행해준다. 카탸는 점잖고 엉뚱하고 자유로운 성격인 아담을 좋아하게 된다.
그러나, 그 사이 친구와 떠난 에블린은 아담이 준 상처와 아픔을 위로해주는 미하엘과 사랑에 빠지고, 미하엘과 아담, 둘 사이에서 고민하게 된다. 그러나, 아담이 보여주는 사랑에 마음이 움직이고, 에블린은 아빠가 누군지 모르는 아이를 임신한 채 결혼을 서두르게 되는데,
그러나, 동독에서 여유로운 삶을 살았던 아담에게 서독에서의 삶은 녹록지 않다. 낭만주의, 낙천주의 성격의 아담에게는 자본주의에서 빠르게 돌아가는 시스템에 적응하지 못하고 자신이 애지중지하는 자동차 '하인리히'를 팔아야 할 정도로 생활의 곤궁함을 느낀다. 게다가, 그의 예술적 기질은 나태하고 무능함으로 치부되어 아담을 더욱 피폐케 한다. 에블린은 대학에 다니며 자신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고군분투하지만, 이들의 사랑은 이렇게 현실적인 장벽에 부딪혀 다람쥐 쳇바퀴를 돌듯 다시 제자리로 돌아간다. 살아간다는 것과 살아내는 것의 차이는 삶에 대한 자세의 차이인 것 같다. 아담은 살아가는 것만 알았지, 자신에게 어려움이 찾아왔을 때를 예상하지 못했고, 아담보다는 한참 어린 에블린은 살아내는 것만 알았지, 아담에 대한 배려는 전혀 없다. 아담과 에블린의 동상이몽은 어떻게 보면 서로에게 상처만 주는 사랑이 아닌가 생각이 들기도 하고 에블린이 자신이 임신한 사실을 알고 아버지가 아담인지 미하엘인지 모르겠다고 할 때는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못하는 부분이었다. 그러나, 사회주의체제와 자유주의 체제속의 개인과 사회와의 문제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 있으며, 통일을 앞두고 있는 우리나라도 동독아담과 서독의 에블린의 동상이몽이 예사롭지 않게 느껴지기도 하는 소설이다.
(첨하자면, 그의 목젖은 마치동물처럼 이리저리 도망을 가다가도 이내 다음 순간에는 언제나 그녀에게로 돌아왔다. 재미있는 것은 소설의 모티브는 최초의 파라다이스인 에덴동산에서 뱀의 꾀임에 빠져 금지된 사과를 먹은 순간 하나님이 아담을 불러 사과가 목에 걸려 목젖이 튀어나오게 된 아담과 하와이다. 그럼 사탄은 자본주의나 자유주의고 에블린은 파라다이스(사회주의) 에서 추방당한 하와라는 이야기???인 셈이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