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의 관
미치오 슈스케 지음, 김은모 옮김 / 북폴리오 / 2012년 6월
평점 :
품절


 

잊는 것과 잊지 않고 극복한다는 것의 차이는 무엇일까.

 

  니체는 망각할 수 있다는 것이 축복이라는 데, 우리가 기억하는 것을 잊는 것과 잊지 않고 극복하는 것 , 두 가지 중 어떤 것이 더 쉬울까? 누군가가 처절한 고통의 기억을 가지고 있다고 치자, 그 고통의 기억을 시간을 되돌려 지울 수 있다고 한다면, 그 순간을 지운 채 왜곡된 기억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은 행복일까.  아니면 고통을 극복하는 것이 행복할까? 차동엽 신부님은 <잊혀진 질문>에서 고통 속으로 걸어가다 보면 고통의 작동메커니즘은 보호의 기능과 단련의 기능으로서 나타나 정신적 성장의 계기를 만들어준다고 하였다. 고통을 극복하려는 인간의 노력이 위대한 정신적 성장을 가져와 오늘의 문명을 이룬 것이라고 하였듯이 고통을 극복할 수만 있다면, 더 좋은 , 더 행복해질 것이라고 ...

 

<물의 관>은 성장소설인데 첫 시작을 너무 심각하게 시작한 듯하다. 요즘 뒤숭숭한 사건과 사고를 많이 접한 상태가 정신이 멍한 탓도 있다. 이웃 아파트에서 뛰어내린 여중생의 자살소식이 마음을 안타깝게 하고 사고로 인해 하반신 불구가 된 친구 딸의 맑은 눈망울이 자꾸 떠올라 마음이 괴로운 탓도 있다. 그러나, 고통은 살아남은 자의 몫이라고 하였던가. 살아가면서 인생에는 누구나에게 똑같은 몫의 어려움이나 고통이 온다고 한다. 그게 어떤 이에게는 젊은 날이 될 수도 있고, 다 늙어서 올 때가 있다. 그리고 그런 고통이 찾아왔을 때를 대비할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자꾸 드는 요즘이다.

 

<물의 관>의 등장인물은 크게 사춘기를 겪고 있는 이쓰오와 아쓰코이지만, 이 둘을 연결시켜 주는 인물은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할머니이다.  부모님의 이혼으로 전학 온 뒤로 반에서 왕따와 집단 괴롭힘을 당하는 아쓰코는 엄마의 무관심과  이제 세 살 밖에 되지 않은 어린 동생과 가난한 생활속에서 삶의 의욕도 없고 폭행의 공포에 길들어져 가면서 아무 희망을 느끼지 못한 채  죽기로 결심한다. 그 이전에 학교에서 20년후의 자신에게 편지쓴 타임캡슐을 떠올리고 내용을 바꾸어 놓기로 한다. 20년 후의 자신에게 평범한 편지를  써놓으면 자신의 삶도 변할 거라고 믿는 아쓰코는 작년 타임캡슐에 자신을 괴롭히던 아이들의 이름을 써 놓았기 때문에 자신의 삶이 이렇게 엉망이 된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자살을 하면 모든 사람들이 자신이 고통 가운데 자살하였다고 믿게 되는 것이 두렵기에 자신의 편지를 지극히 평범하고도 보통의 아이로 꾸며야 한다.

 

“계속 괴롭힘을 당하는 동안에는 마음에 서서히 이끼가 끼면서 결국에는 아픔과 차가움, 목을 넘어가는 액체의 온도나 맛도 거의 느끼지 못하게 되었다. 계속 그랬다면 분명히 언제까지고 참을 수 있었으리라. 하지만 괴롭힘이 중단된 그 순간, 이끼가 벗겨져 아쓰코의 마음은 속살이 고스란히 드러나고야 말았다. 아쓰코는 언제 그 아이들의 손이, 발이, 말이 날아들지 모르는 캄캄한 곳에 벗겨진 마음과 함께 방치되었다.”

 

반면 이쓰오는 부잣집에서 자란 할머니의 푸념을 들으며 어린 동생을 돌보며 생활력 강한 어머니와 나약한 아버지를 보는 일상의 지루함으로 나날을 보내고 있다. 어느 날 ,아쓰코가 동생생일날 줄 선물로 인형을 훔친 사실을 알게 되면서 , 둘은 비밀을 공유하는 동지적 유대감이 생기게 된다. 이후, 아쓰코가 집단 괴롭힘과 폭행을 당하는 것을 눈치채게 되고 아쓰코의 타임캡슐을 찾아주는 것을 도와주려 하는데 ...

 

“내가 만든 추억 속에서 살아가기로 했어.”

 

아쓰코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했던 이쓰오는 부잣집 외동 딸로 살았다고 입버릇처럼 말하던 할머니의 과거를 우연히 알게 되고, 오히려 아쓰코의 마음을 헤아리게 된다. 자신의 과거를 애써 잊고 살아가는 할머니와 타임캡슐에 쓴 편지가 자신의 삶을 좌우할 거라 믿는 아쓰코의 모습은 너무도 닮아있었기 때문이다.

    자신이 부잣집 외동딸이라고 하면 다른 사람도 그렇게 믿어줄 거라고 생각하며 자신의 과거를 잊은 채 살았던 할머니, 타임캡슐에 자신의 평범하고도 평범한 모습을 써 넣으면 자신의 삶도 그렇게 될 것이라고 믿었던 아쓰코, 그리고 그 둘을 바라보는 이쓰오. 이쓰오는 같은 상처를 가지고 있는 할머니와 아쓰코를 위해 할머니의 과거 아픔투성이인 고향의 댐이자 아쓰코가 몸을 던지려던 그곳에서 자신들의 형상을 닮은 인형을 던지는 의식을 하는 것으로 상처를 던져버리는 의식을 치른다. 인형과 함께 아픔과 고통을 물의 관속에 담아 다시는 수면위로 떠오르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여우비에 감싸여 눈부신 금색으로 빛나는 공기가 정말로 아름다워서 눈을 떠야 할지 모를 지경이었다

 

미치오 슈스케는 사람의 상처를 내밀하게 들여다보는 것에 뛰어난 작가이다.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의 삶은 윤택해졌을지라도 내면을 들여다보면 모두 저마다의 상처를 안고 살아가고 있다. 그런 상처를 극복하거나 다독이는 방법을 잘 모르기에, 아주 작은 상처가 겉잡을 수 없이 커져 치유할 수 없는 상처가 되기도 한다. 잊는다는 것과 잊지 않고 극복한다는 것, 그 차이를 다시 한번 생각해보는 동시에 아직도 자신의 상처를 잊은 채 방치하고 있다면, 물의 관 속으로 던져버리는 것으로 상처를 치유해보는 연습을 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우리가 잊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잊은 것이 아니다. 고통 속으로 걸어들어가 고통을 마주볼 수 있어야 상처가 치유된다. 이들이 만날 때, 항상 여우비가 내리는 것은, 과거와 현재가 교집하는 곳이기 때문이리라...눈부시게 햇볕이 쨍쨍한 날 아름답게  내리는 비가 한폭의 수채화처럼 펼쳐지는 아름다운 성장소설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