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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체성 ㅣ 밀란 쿤데라 전집 9
밀란 쿤데라 지음, 이재룡 옮김 / 민음사 / 2012년 5월
평점 :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책이기도 한데, 밀란 쿤데라의 전집중 아홉 번 작품으로서의 <정체성>은 밀란 쿤데라가 기존 작품세계에서 보여주었던 非비키치에 대한 세상-즉, 보이는 세상이 아닌 ,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한 통찰이 제일 잘 드러나 있는 책이다. 밀란 쿤데라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사랑이 삶에 주는 영향에 대한 깊은 사유를 통해 현실을 통찰하게 하는 데에 뛰어난 작가이다. 이 책 역시도 사랑이야기로 보여지지만, 그 사랑이 현실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주인공 샹탈과 장마르크를 통해서 밀란 쿤데라의 문학의 매력이 돋보인다.
샹탈은 어린 아들이 죽은 후 남편과 이혼하고 연하의 연인 장마르크와 살고 있다. 아들이 없다는 사실은 연하인 연인 장마르크의 절대적인 사랑을 의미라기에 그녀는 아들이 죽어서 행복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점점 아들에 관한 회상은 비윤리적인 행복한 느낌을 동반하여 그녀를 고통스럽게 한다. 그 고통은 그녀에게 꿈으로 나타나고 꿈을 꾸는 것인지, 현실인지조차 구분을 못할 정도로 샹탈의 세계는 모호해진다. 그런 모호함 속에서 샹탈은 아들의 죽음으로 인해 비키치의 세계에 눈을 뜨게 되고 아들의 죽음이 남겨진 세계에 대한 통찰에 이른다. 아들(아기)가 없기에 이 세계에 집착할 이유가 없어졌으며, 아기의 부재로 인해 자유로워졌음을, 내가 사랑하지 않는 이 세계를 정면으로 응시할 수 있게 되었음을, 아들이 죽은 후 수십 년이 흘러서야 아들의 죽음은 하나의 선물, 결국에는 받아들이고 만 끔찍한 선물이라는 현실(키치)의 세계에 직면한다.
존재에 대한 확고부동한 동의가 미학적 이상으로 삼는 세계는, 똥이 부정되고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각자가 처신하는 세계라는 결론이 도출된다. 이러한 미학적 이상은 키치라고 불린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중에서 )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마주친 젊은 남자, 보잘 것 없이 늙어가는 자신의 육체 앞에서 발산하는 젊음의 싱싱함 앞에서 일종의 혐오감을 느낀 샹탈은 충격을 받고 장마르크에게 “남자들이 더 이상 날 쳐다보지 않아.”라는 말을 던진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육체의 점진적 소멸의 시작을 알리는 적신호였다. 이 말을 듣고 장마르크는 샹탈을 기쁘게 해 주기 위해 익명으로 그녀에게 편지를 보내기 시작한다.
그녀를 사랑하고 아름답다고 생각한다는 말을 아무리 해 주어도 소용없고 사랑에 가득한 시선도 그녀에겐 위로가 될 수 없을 것이다. 사랑의 시선은 외톨이로 만드는 시선이기 때문이다. 장마르크는 다른 사람들에게는 투명하게 변한 두 늙은이의 사랑스러운 고독에 대해 생각했다. 그것은 죽음을 예고하는 슬픈 고독이다. 아니다,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사랑의 시선이 아니라 천박하고 음탕한 익명의 시선, 호감이나 취사선택에 의한 것이 아니고 사랑도 예의도 없이 필연적으로, 숙명적으로 그녀 육체로 쏟아지는 시선이다. 이런 시선들이 그녀를 인간 사회에 머무르게 하고 사랑의 시선은 그녀를 사회로부터 유리한다. -p46
익명의 편지를 받으면서 샹탈은 처음에는 불쾌감이었으나, 알 수 없는 감정에 사로잡히고 장마르크와 익명의 주인공을 비교하며 상상하는 즐거움에 빠지게 된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편지를 보낸 사람의 정체, 혹은 그 정체성에 의혹을 품기 시작하면서 두 사람 관계에는 급격한 변화가 찾아온다. 그리고 편지의 주인공이 장마르크란 사실은 오히려 샹탈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안겨준다. 급기야 샹탈은 자신이 정말 잘 안다고 여긴 장마르크의 마음까지 믿지 못하게 된다. 이에 따라 샹탈은 점점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과거의 자신이 누구였는지, 그리고 지금 여기 있는 그녀는 누구인지 혼란에 빠진다.
샹탈은 이후 계속 꿈을 꾼다.
하지만 그가 정말 그 편지를 보냈을까? 아니면 단지 상상 속에서만 썼을까? 현실이 비현실로, 사실이 몽상으로 변했던 정확한 순간은 언제일까? 그 경계선은 어디에 있을까? 어디에 경계선이 있을까? -p182
샹탈과 장마르크, 두 주인공은 이 경계선 사이에서 끊임없이 방황한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 그리고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에 대해서, 무심한 듯 스쳐 지나간 타인의 진짜 모습에 대해 혼란을 겪고 사랑하는 사람과 다른 여자의 육체적 외모를 혼동한다. 밀란 쿤데라는 이들의 혼돈된 모습 속에서 자아를 찾아가는 모습을 사랑의 완성이라는 과정으로 그려내고 있다. 현대인의 불안과 혼란의 원인을 밀란 쿤데라는 '권태'로 보았다. 참을 수 없는 현대인의 권태는 존재에 대한 인식조차 모호하게 만드는 것이다. 또한 이들이 보여지는 키치와 非비키치의 세계를 넘나들며 펼쳐지는 세계는 무척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처음에는 아들의 죽음이 샹탈에게 그렇게 중요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나 샹탈을 지배하는 고독과 무거움에 대해서 생각해보니 그녀를 억누르고 있는 어깨위의 무거운 짐은 바로 아들의 죽음이었다. 그럼에도 너무도 담담하게 아들의 죽음을 추억하는 샹탈에게서는 그 어떤 슬픔도 느끼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의 존재를 송두리째 상실케 할 정도의 고통이었기에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까지 모호해진 것이다. 그런 그녀를 사랑하는 장마르크의 두려움은 어느 순간, 늙고 추한 여인으로 변해있는 여인을 샹탈로 착각할 정도이다. 샹탈을 일깨워주는 방법으로 편지를 떠올렸지만, 결국 샹탈을 구원하게 한 것은 장 마르크의 한 마디 말이었다.
“나는 더 이상 당신으로부터 눈길을 떼지 않을 거야. 쉴 새 없이 당신을 바라보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