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옷을 입으렴
이도우 지음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2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사서함 110호의 우편물을 읽고 이도우 작가를 기억하게 된 것 같다. 로맨스의 풋풋함과 싱그러움으로 다가왔던 전작이었기에 잠옷을 입으렴도 그런 기대감으로 읽게 되었는데, 이 책은 로맨스가 아니라 성장소설이다. (사뭇 로맨스를 기대 ^^;;) 성장소설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기에 시큰둥하게 읽기 시작했는데 책을 다 덮는 순간 콧날이 시큰거린다. 집안 형편이 어려워 어렸을 때 잠시 외갓집에 맡겨 지낸 적이 있었는데 , 이 책의 주인공 둘녕과 처지가 비슷하다보니, 둘녕의 감정이 퍽 친숙하게 다가왔다. 바느질로 생활을 꾸려가고 있는 서른 여덟살의 둘녕의 시점이다. 둘녕에게는 잠옷을 입은 채로 돌아다니는 몽유병이 있다. 마음속에 치유되지 않은 아픔을 안고 잠옷을 짓는 둘녕은 잠옷을 완성하는 동시에 오랜 기억속의 그 마을에 가려 한다. 그곳에는 그 아이가 아직도 자신을 기다리기에....

 

엄마가 갑자기 집을 나가고 바쁜 아빠는 둘녕을 외할머니에게 보낸다. 처음 만난 새침한 아이 수안을 보고 , 둘녕은 어딘지 모르게 새침하고 당돌한 수안에게 위축되지만, 그 아이의 낡은 내복을 본 순간 위안을 받는다. 장에 가서 외할머니는 둘녕과 수안에게 처음으로 잠옷을 사주고 둘의 아름다운 소녀시절은 그렇게 시작된다. 책이 귀한 시절에 가끔 들리는 만화방에서 주고 받던 만화책이야기가 좀 더 진일보해서 문학작품을 탐독하게 되고 둘은 복잡한 어른들 세계와는 달리 자신들만의 세계를 구축해나간다. 책은 둘 사이를 이어주는 매개체이자, 위로이자, 추억이 된다. 둘의 문학세계가 문을 열고, 주의 사람들은 만나고 떠나고, 삼촌 역시 떠났다가 돌아오고, 이웃집 할매는 죽고 , 둘은 성장하고 있었다.

 

몸이 약한 수안을 위해 무엇이라도 해주고 싶었던 둘녕은 무엇이라도 해주고 싶어하지만, 서른 여덟이 되어서야 깨닫는 불편한 진실과 마주한다. 자신이 끊임없이 무엇인가 해주려고 하고,

사랑하니까 도움이 되어야 한다고 믿었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

 

그 아이는 내게 많은 걸 바라지 않았다는 걸 나중에서야 깨닫습니다.

 

젊음이 아름다운 이유는 삶의 모든 것을 아름답게 보려한다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른이 되면서 모든 것이 명징해감에 따라 삶이 그다지 아름답지 않음을 깨달을 때에야 비로서 성장한 사실을 깨닫고는 한다. 어른이 되어도 는 그대로이며, 단지 늙어가고 있다는 진실만 남는다.

 

흘러간 물은 다시 오지 않는다지만, 우리 눈에 비친 냇물은 언제나 똑같아 보이기만 했다.

 

이 책이 아름답게 느껴진 이유도 바로 그런 청춘의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삶을 아름답게 바라볼 수 있을 때는 오로지 성장할 때이다. 그래서인지 교복을 입고 지나가는 여고생들의 뒷모습만 바라봐도 웃음이 나고, 첫사랑을 떠올리게 하는 영화 써니건축학개론을 읽으면서 눈물 범벅이 되는 이유도 이제는 삶을 투명하게 바라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장소설을 읽고 나면 마음이 아프다. 둘녕이 오랜 세월, 수안을 떠나보내지 못하고 잠옷을 짓는 그 마음처럼 내 안에 깃들여있던 추억의 한자락을 떠올렸다가 다시 떠나보내기란 또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릴 것인지...새벽녘의 짙푸른 어스름 속에 아슴아슴 제 붉은 빛을 드러내는 고운 꽃처럼 추억과 젊음과 아름다운 기억들을 애절함과 간절함과 아련함으로 기억하게끔 하는 소설이다. 들녕의 기억 한자락에 기대어 나의 아름다운 시절을 추억해본다.

 

 한때 내 것이었다가 나를 떠난 것도 있고, 내가 버리고 외면한 것도, 한 번도 내 것이 아니었던 것도 있다. 다만 한때 몹시 아름다웠던 것들을 나는 기억한다. 그것들은 지금 어디로 달아나서 금빛 먼지처럼 카를거리며 웃고 있을까. 무엇이 그 아름다운 시절을 데려갔는지 알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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