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 차이를 횡단하는 즐거운 모험 리라이팅 클래식 4
강신주 지음 / 그린비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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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 강신주의 철학서를 이루고 있는 바탕은 단독성이다. <상처받지 않을 권리>에서도 <김수영을 위하여>에서도 강신주의 철학의 사유체계는 우리의 삶에서 단독성을 가지라고 설파한다. 우리의 삶에 단독성을 꺼려하는 것은 무엇일까? 바로 권력과 종교와 자본이다. 권력은 모든 인간이 명령하는 대로 살길 원하고 종교는 신의 가르침이 절대적인 삶의 방식임을 수용해야만 한다. 나아가 자본은 모든 인간이 자신의 단독성을 망각하고 자신이 자본에 종속되는 상품에 불과하다고 인정하기를 원한다. 진정한 자유는 종교, 국가, 자본 등 초월적 가치라고 생각되는 것들을 완강히 거부하고, 우리의 삶을 되찾는 것에서 시작한다. 지금까지 우리가 자신의 삶을 불완전하고 부정적인 것으로서 폄하해 왔다면, 우리가 부정했던 모든 것을 정면으로 부딪혀 사유하게 만드는 힘이 강신주 철학의 힘이다. 그리고 다음은 소통하는 것이다. 소통이 중요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우리가 삶의 단독성을 깨닫게 해주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태어나자마자 자신의 기준과 가치로만 살아오던 사람이 타자와의 만남에서야 자신의 기준과 가치를 깰 수 있듯이 < 장자, 차이를 횡단하는 모험>에서 보여주는 인문정신은 바로 소통의 중요성이다. 타자와 소통하지 않는다면, 새로운 삶의 양식을 상상하고 만들어내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기존의 삶의 규칙이 지닌 문제들은 오직 새로운 삶의 규칙을 통해서만 대상화되고 해소될 수 있는 이유이다. 저자는 로빈슨이 무인도 스페란차에서 방드르디라는 타자의 등장으로 점점 변화하는 모습을 예로 들고 있다. 로빈슨이 자신의 삶의 목적이 초월적이지 않고 내재적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게 되며 자신을 비추고 있는 태양을 가리켰던 이유가 마침내 일체의 초월적인 가치에 현혹되지 않는 삶으로 변화되었기 때문이며 , 삶 그 자체를 긍정할 수 있는 단독성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로빈슨이 자신의 삶을 긍정적으로 깨닫기까지는 근 28년이 걸린 것을 잊으면 안된다.

 

 

노자는 도가의 창시자로 장자는 노자철학에 대한 훌륭한 주석가이자 해설자로 기억되고 있다. 그래서 도가사상을 흔히 노장사상이란 이름으로 불리는 이유이기도 하다. 노자와 장자는 무위자연의 철학자로도 유명하다 

 

나는 국가를 가진 자의 포로가 되느니 차라리 벼슬살이를 하지 않고 나의 뜻을 유쾌하게 할 것이다.” - 사마천 사기』「노장신한열전에서

 

그러나 장자는 노자와는 달리 분명한 아나키즘의 성향을 보이고 있다. 아무리 귀하다고 할지라도 국가가 중시하는 어떤 가치보다 우리의 삶이 더 소중하며 국가가 제공하는 일체의 안락보다는 개체의 고유한 삶이 주는 경쾌함을 장자는 선택한다. 이 점에서 장자가 자연과의 황홀한 합일을 도모했다는 증거를 확인할 수 없다. 국가주의에 의해 포획되는 삶을 단호히 거부했기 때문이다. 이는 현재의 통상적인 견해와는 사뭇 다르다. 그는 국가의 가치를 부정하고 개인의 삶이 지닌 유쾌함을 회복하려고 노력했다. 그래서 장자는 나는 국가를 가진 자의 포로가 되느니 차라리 더러운 도랑 속에서 즐겁게 헤엄치면서 놀겠다.” 라고 한 것이다.

 

장자는 삶을 부정하는 초월적 이념을 표방하는 모든 태도를 이라고 비유하면서, 반드시 이 꿈으로부터 깨어나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것은 위에 말한 단독성과 연관이 있다.

  삶의 철학은 삶 자체를 긍정하는 데서 출발한다. 장자의 이런 성심은 들뢰즈에 따르면 배치와 결합이라고도 규정될 수 있고 배치와 결합을 낳는 마주침(rencontre)” 도 중요하다. 타자와의 예기치 못한 마주침에서 사건을 통해서 새로운 배치와 결합을 구성하게 될 때에만, 우리는 사후적으로 자신의 역량을 회고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배치를 의미하는 아장스망의 개념이다. 장자의 성심은 아비투스라 불릴 수도 있고 혹은 아장스망이라고 불릴 수도 있다. 이것은 모두 타자와의 관계로부터 생길 수밖에 없는 일종의 주름이라는 것이다.

 

장자가 꿈에서 깨어나서 의 세계를 회복해야 한다고 역설하는 것도 마찬가지 이유이다. 꿈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한다면, 우리에게 진정한 의미의 타자란 존재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타자와 마주치는 순간 지금껏 꿈속에 있었다는 것을 자각하게 된다. 노나라 임금이 바닷새를 데려다가 키우지만 바닷새가 며칠 만에 싸늘한 주검이 되어버린 이야기처럼 자신의 기준으로 타자를 대하면 안된다. 여기서 저자는 망각이 없다면 행복도, 명랑함도, 희망도, 자부심도 현재도 있을 수 없다는 니체의 말을 인용한다.

 

자신의 삶을 긍정하는 것만으로 결코 충분하지 않다. 이것은 우리가 기본적으로 유한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삶을 지속적으로 긍정하기 위해서 우리에게는 타자와의 연대가 불가피한 일이다. 장자가 권하고 있는 소통의 진리는 우리에게 개인적인 즐거움과 동시에 연대의 즐거움을 가져다준다. 타자와의 연대가 중요한 만큼 저자가 강조하는 것은 망각과 비움이다. 피리 속을 비워야 바람과 마주쳐 아름다움 소리를 만들 수 있듯이 마음이 비워져야 하는 이유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비워짐은 열림과 동의어이다. 비워질 때만 마주치는 타자를 마음속에 담을 수 있다. 초월적인 이념(국가, 종교, 권력)을 절대적인 목적과 가치로 숭배할 때, 우리는 자신의 삶을 부정하게 된다. 결국 우리내면의 소음들이 진정한 기원은 우리 자신의 삶 자체라기보다는 이런 초월적 이념이었던 셈이다. 초월적 이념은 우리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 종교, 자본에게 봉사하기 위해 고안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장자의 사유는 초월주의나 허무주의와 전혀 무관하며, 오히려 잊어라 ! 그리고 연결하라 ! 는 장자의 외침은 초월주의에 의해 빼앗겨서 왜곡된 삶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삶의 긍정성을 되찾으려고 하는 의지를 되찾는 것이 장자의 사유의 진정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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