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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로 읽는 중국 현대사
신동준 지음 / 인간사랑 / 2011년 12월
평점 :

역사속에서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 채 자고자대하는 것은 패망의 길이다.
글로벌 경제의 불확실성이 계속되고 있는 가운데 '주요 2개국(G2) '로 불리는 미국과 중국은 올해 대통령 선거가 치러지는 동시에 권력교체기를 맞는다. 쫓기는 자로서의 미국과 쫓는 자로서의 중국에 동서양의 모든 나라들이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 이유는 중국이 초고속 성장때문이다. GDP에서 세계 제 2의 경제대국이었던 일본을 앞지르며 2010년에 들어와서는 미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G2'의 일원인 중국은 서구 열강에 100년 가까이 수모를 겪고 이후 공산체제하에서 후진적인 빈곤경제에 허덕이던 나라였다. 그런데 어떻게 30년만에 'G2'의 일원이 되었을까? 그에 따른 답을 중국현대사를 주름잡았던 인들을 통하여 중국의 정치행보와 통일시대를 맞이하게 된 우리나라의 현 시점에 대비하기 위한 방편으로 이웃인 중국을 소상히 알 필요가 있음이다.
원세개
중국 인민들의 지탄 속에 숨을 거둔 원세개는 심상시의 난으로 혼란에 빠진 후한 황실을 평정하고 권력을 장악한 동탁에 비유할 만하다. 원세개는 수양 아들 여포에 의해 비명횡사한 동탁과 달리 지병으로 사망했으나 죽음에 이르는 과정만큼은 별반 차이가 없다. 그가 황제의 자리에서 내려온 뒤 이내 화병이 나 죽게 된 것은 자신이 그토록 믿었던 휘하 군벌들의 배신 때문이었다. 부하의 배신으로 인해 죽음에 이르게 된 점에서 두 사람은 하등 차이가 없다. 원세개가 생전에 그토록 추구하다 끝내 실패한 '중화제국'은 30년만에 모택동에 이르러 실현된다.
<모택동>
모택동은 원소를 격파하고 화북의 주인공이 된 조조에 비유할 수 있다. 비록 원소로 비유되는 손문을 직접 타격한 것은 아니나 큰 틀에서 보면 손문의 '삼민주의'를 물리치고 '모택동주의'를 채택한 점에서 손문을 사살적으로 제거한 것이나 다름없다. 모택동은 전장에서도 손에서 책을 놓지 않고, 기존의 어떤 형식이나 관행에 얽매이지 앟고 검소하며 서민적이고, 재담과 계교에 능하고, 임기응변을 잘하고, 준령대천을 지날 때면 늘 천하를 삼킬듯한 기백이 넘치는 시사를 짓는 등 조조와 너무나 빼닮았다. 자부심이 지나친 나머지 고집스럽게 밀어붙이는 것도 닮았다. 역대 황제 중에서 모택동과 꼭 닮은 인물은 명제국의 주원장이다. 두사람 모두 득천하에 탁월한 재능을 발휘했음에도 치천하에는 적잖은 문제를 드러냈다. 첫째 인해 '문자지옥'을 일으킨 것처럼 모택동 역시 '문화대혁명'과 같은 참사를 일으켰다. 이는 출신부터 주원장과 똑같은 빈농이었으며 둘째 체계적인 공부를 하지 못한 것 또한 같았으며 셋째, 빈민과 노동자를 동원해 천하를 거머쥔 것도 닮았다. 넷재, 주원장이 학력 콤플렉스와 더불어 엄청난 자존심으로 기본적으로 지식인에 대한 불신 및 열등감등이 뒤엉킨 결과였다.
득천하를 성공한 것은 중국의 전통에 기초한 농민혁명 노선을 취한데 있다. 모택동이 득천하에 성공하고도 치천하에 실패한 것은 농민들의 바람과 동떨어진 정책을 무리하게 밀어붙인 데 있다. 임기응변의 자유로운 사고와 많은 독서에도 불구하고 체계적으로 연마치 못한 자신의 부족한 학문에 대한 인식부족, 창업자의 지나친 자만심 등 또한 원인이었다. 그런 점에서 득천하에 성공한 이후에도 경서와 제자백가를 멀리하고 문학서에 탐닉한 것은 커다란 불행이었다. 중국 전래의 역사문화사에 공산주의 사상을 성공시키기 위해서는 중국 특유의 역사문화를 배척해야만 했기에 결국 공자를 보수반동의 사상가로 낙인 찍는 치명적인 오류를 범하는데 이것은 중국의 차원을 넘어 유구한 동양문화 전체에 대한 모독이었다.후에 등소평은 보수반동의 표상으로 낙인 찍힌 공자를 중국 문명의 아이콘으로 부상시킨다.
<주은래>
주은래의 삶은 여러 면에서 삼국시대 촉한의 제갈량과 닮아 있다. 그는 죽을 때까지 6無를 행한 군자의 삶을 살았다. '신 중화제국'의 초대 황제 모택동과 최고의 승상 주은래는 대장정 과정에서 군신지의를 맺은 이후 죽을 때까지 시종 긴장관계를 유지했다. '중화제국'의 창업이 결코 모택동 혼자만의 힘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주은래를 뺀 모택동은 상상하기 어렵다. 주은래는 중국 공산당내에서 '엘리트 유학파'의 선두주자였으나 모택동이 중국혁명을 이끌 당대의 인물이라는 것을 발견하곤 그에게 1인자 자리를 양보한뒤 평생 충심으로 그를 보필했다. 주은래는 모택동을 보필하는데 그치지 않고 등소평을 다시 등용케 만들어 마침내 중국을 G2의 일원으로 우뚝 서게 하는 결정적인 계기를 제공했다.
" 모택동이 없었다면 중국의 혁명은 결코 불붙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주은래가 없었다면 그 불길은 다 타서 재가 되고 말았을 것이다.!"
<등소평>
등소평은 사마의에 비유할 만하다. 명민한데다가 말수가 적고, ,온갖 굴욕 속에서 칼을 갈며 때가 오길 기다렸다가 일거에 정적을 무너뜨리는 도광양회의 행보가 그렇다. 조조의 위나라가 조환때 사마염에게 넘어갔듯이 모택동이 죽기 직전에 세운 화국봉 역시 조환처럼 등소평 세력의 막강한 힘에 밀려 '황권'을 고스란히 넘겨주어야만 했다. 등소평이 모택동이 이루지 못했던 치천하를 성공한 비결은 모택동과 정반대의 길을 걸은 데 있다. 중국 전래의 역사문화를 부정하고 문화대혁명을 일으킨 모택동과는 달리 등소평은 자국의 역사문화 맥락을 충실히 좇은 것이 요체이다. '신중화제국'이 21세기에 들어와 'G2'의 일원이 된 것은 전적으로 등소평의 공이다. 등소평이 정의한 '사회주의 시장경제'는 중도 내지 중용을 역설한 공자사상의 진수를 보여준다. 실제로 '사회주의 시장경제'를 내세우고 있는 중국은 일부 측면에서 한국 등 여타 자본주의 국가보다 훨씬 자본주의적인 모습을 띠고 있다. 이는 공자가 역설한 인레人禮와 선신, 온고지신, 자강불식등의 전통적인 덕목을 얼마나 잘 실행하였는지 여부에 따라 '부강'의 달성이 달려있다는 것을 뜻한다. 모택동이 득천하를 하였음에도 치천하에 실패하였지만 후대의 권력승계를 등소평에게 한 점은 높게 평가할 만 하다. 모택동의 득천하와 주은래의 치천하를 이룰 수 있었던 것은 등소평이란 인물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중국이 21세기 전반에 경제 규모에서 미국을 따라잡을 것이라는 예측이 나온 것은 이미 오래전 일이다. 서구 민주주의의 위기를 타계할 방법으로 중국식 민주주의에 관심을 보이는 것 또한 서양의 기계론적 자연관의 위기를 초래하게 되자 결국 새로운 세계관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동양의 유기체적 자연관에 초점이 맞추고 있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현재'신 중화제국'은 등소평의 뒤를 이은 강택민과 호금도의 치세에 들어와 '부강'의 속도와 질이 훨씬 고도화하고 있다. 게다가 중국은 이미 오래 전부터 고대사에서 근 현대사에 이르기까지 동아시아 역사를 자국에 편입시키는 공정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그것이 바로 동북공정이다. 동북공정은 한마디로 말해 소수민족 통일국가론에 따라 고조선, 고구려, 발해를 중국 소수민족의 정권으로 주장해 중국역사로 편입시키는 작업이다. 유일하게 분단국가로 머물고 있는 우리나라에 시급한 것은 등소평이 중국 전래의 역사문화를 바탕으로 하여 득천하와 치천하를 이루었던 것처럼 한국 전래의 역사문화에 기초한 정치이념의 성립은 시급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이 책 <중국 현대사 >는 급변하고 있는 국제상황속에서 통일시대의 개막과 관련해 많은 것을 시사하고 있다. 21세기 현재에 이르기까지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로 남아있는 우리나라에 가장 필요한 것은 한국 전래의 문화 전통에 기초한 통치이념 및 제도의 수립이다. 정치뿐만아니라 사회 , 경제 등 다각도로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중국현대사>였던 것 같다.
"모든 개혁 가운데 정치개혁이 가장 중요하다. 우리 조국은 정치개혁에 성공해야만 밝은 미래를 기약할 수 있다."
*오타 324p 9번째줄 자나쳤다. ☞ 지나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