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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해고도에 위리안치하라 - 절망의 섬에 새긴 유배객들의 삶과 예술
이종묵.안대회 지음, 이한구 사진 / 북스코프(아카넷) / 2011년 8월
평점 :
절해고도에 위리안치하라.
당쟁으로 얼룩진 조선시대 역사를 들여다보면 언제나 등장하는 형벌이 있다. 바로 유배라는 형벌이다. 삼국 시대와 고려 시대에도 유배의 형벌은 많았지만 조선 시대에 비하면 새발의 피이다. 조선시대에 벼슬아치 네 명 가운데 한 명 꼴로 유배를 당한 사살로 볼 때, 뱌슬아치 치고 유배를 경험하지 않은 이는 거의 없었다고 봐야할 정도이다. 정쟁이 심해질수록 형벌이 더 가중되면서 등장한 벌이 절해고도(육지에서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 외로운 섬)에 위리안치(머무는 집의 지붕까지 가시나무를 둘러쳐 외부와 완전히 격리시키고 개구멍 같은 작은 틈으로 먹을 것을 넣어주어 목숨을 연장하도록 한 형벌)라는 형벌이다. 이 형벌은 연산군때 처음 시행되었는데 뿌린 대로 거둔다는 말처럼 수많은 젊은 관리를 절해고도에 위리안치하도록 한 연산군 또한 이 형벌로 죽는다는 것이다.
아름다운 우리의 섬들은 그렇게 사람을 유폐시키는 유배지로서 고독과 절망 속에서 어떤 이는 안식과 마음의 평화로, 어떤 이는 학문으로 승화시켰는데 이 <절해고도에 위리안치하라>라는 형벌은 조선시대의 문학을 꽃피우는 계기가 되어주기도 한다. 섬은 여행객들에게는 아름답기만 한 것이지만 그 섬이 담고 있는 것은 유배객들의 절망과 고독 또한 기억할 가치가 있는 것이기에 저자는 유배객의 자취를 따라 직접 섬을 답사하여 이쁜 사진은 사진작가 이한구씨가 글은 이종묵 교수와 안대회 교수가 조선시대 유배객들의 흔적을 담아둔 책이다.
유배라는 형벌로 절망가운데 살았던 연산군과 광해군의 마지막은 씁쓸함을 남기지만 진도에 유배된 노수신은 절망하지 않고 진도 사람들과 잘 어울릴 뿐 아니라 애환을 담은 소재로 많은 시를 남겼다. [귀양지의 네가지 맛]이라는 시에서는 ‘맑은 새벽에 머리를 빗는 맛,늦게 아침밥을 먹고 천천히 산보하는 맛,환한 창가에 앉아 햇볕을 쪼이는 맛, 등불을 밝히고 책을 읽는 맛’ 이 귀양지의 맛이라며 유배지의 한가로움을 노래하기도 하였다. 훗날 노수신이 시의 대가로 칭송받고 귀양지에서 풀려 정승이 되는 데 유배 시절의 독서가 바탕이 되었음은 자명한 일이다. 유배지를 “신선사는 거리“ 라고 노래한 사람이 있는데 바로 이대기이다 . 이대기는 백령도에 유배온 바로 그 해에 [백령도지]를 지었는데 [백령도지]는 한 섬의 전모를 충실히 기록한 보물로 남았다. 칠십 평생을 살면서 꼭 짓지 않으면 일없이 시나 문장을 거의 짓지 않았으나 그가 백령도에 유배되었을 때 지은 시 한수는 그의 마음을 잘 표현해주는 것 같아 적어 본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땅에 몸이 있고
아무 생각도 없는 지경에 마음이 있네.
생각을 잊고 사물에 뜻을 두니
사물마다 모두 아름다워라.
남만의 바람과 흉노의 달도
오히려 빼어난 풍경이려니.
바다의 대나무와 섬의 소나무도
신선사는 거리인가 보구나. -[무회옹] 설학집 1권-
제주도에 유배된 정조와 순조 연간의 사람 조정철에 대한 이야기는 처음 듣는 것인데 조정철이 역사적으로 알려진 인물은 아니지만 제주에 유배되어 30년의 모진 세월을 살며 당한 설움을 시로 표현하였는데 거의 천 편에 이르는 작품에 분통과 억울함,슬픔과 괴로움,굴욕과 부끄러움,은혜와 원망을 담아 놓았다. 그러나 조정철이 눈에 띄인 것은 조정철이 유독 다른 유배객과는 달리 제주목사로부터 많은 괴롭힘을 당했기 때문이다. 뿐만아니라 조정철과 홍윤애의 사랑이 너무도 절절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극적인 것은 제주목사로서 제주 땅을 다시 밟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연인홍윤애의 무덤을 찾아 ‘홍의녀지묘’라는 비를 세워주고 그 묘비는 지금까지 보존되어 왔다.
이렇게 우리의 아름다운 섬은 유배지로서 유배온 사람들의 손길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으며 위도에서 이규보, 교통도에서 연산군과 광해군이, 나라를 위해 투쟁하였으나 적국인 대마도에서 최후를 맞이한 최익현을, 흑산도에서는 정약전을, 남해에서 한글 고전 소설의 걸작을 낳은 김만중을 만나게 된다. 그 모든 것이 유배라는 형벌로부터 시작된 것을 볼 때 우리나라 역사에서 유배란 조선 학문의 위대한 발전을 가져왔다라고 볼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섬을 찾아 수백년전의 자취를 온전히 찾을 수는 없었으나 사진으로 보여주는 섬의 모습에서 유배를 온 유배객들의 쓸쓸함과 고독을 느끼기에는 충분하리라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