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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당 이회영 평전 -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독립운동가
김삼웅 지음 / 두레 / 2022년 1월
평점 :
역사교과서에 신흥무관학교 이회영이라는 한 줄로 만났던 이회영을 평전으로 만났다. 독립운동가의 전생을 읽는 일은 무척이나 설레고 긴장되는 일이다. 이회영을 떠올리면 가장 쉽게 연상되는 사람이 있다.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을 보았다면 바로 고사홍이라는 캐릭터를 자연스레 떠올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드라마에서 고사홍은 정승만 10명 배출한 조선 최고의 명문가 집안이다. 고사홍은 세손의 스승이기도 하였고 마을에서 가장 신임받는 어른이었으며 전답을 풀어 노비들을 풀어주기도 한 시대를 앞서가는 사람이었다. 아들들이 독립운동가로 목숨을 바쳐 싸우고 있을 때 고사홍은 전답을 팔아 물질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드라마를 보면서 픽션일 뿐 실제로 독립운동에 목숨 바쳐 싸운 사람은 모두 무지렁이 백성들 뿐이라 생각했던 건 나의 오산이었다. 고사홍은 현실에서도 존재했던 것이다.
이회영의 삶이 그러했다. 10대 이항복을 비롯하여 많은 명신·헌사를 조상으로 두었다. 제국주의 앞에서 요동치던 나라는 1910년 일본에 의해 경술국치를 당하자 우당 6형제는 모든 재산을 처분하여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만주로 이사를 간다. 당시 전재산을 처분하고 손에 쥔 돈은 40원이었다. 이 40원으로 그가 가장 먼저 했던 것은 학교를 차리는 일이었다. 이회영은 전재산을 팔면서 노비들의 신분도 자유롭게 해주었지만 대부분의 노비가 이회영의 만주행에 동행했다고 한다. 그가 만주에 가서 독립운동을 하면서 깨달았던 것은 ‘교육’이다. 님웨일스의 ≪아리랑≫에는 이 교육내용이 자세히 기술되어 있는데 독립운동가 김산은 낮에는 교육과 밤에는 사람들의 눈을 피해 산에서 무술연습을 하였다고 한다. 이회영이 세운 신흥무관학교에서 배출한 독립운동가들은 후에 일본을 상대로 많은 저항을 하였다. 이름만 대면 알법한 독립운동가들이 모두 신흥무관학교 출신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1920년대와 30년대 무렵 이회영을 비롯한 독립운동가들은 아나키즘을 받아들이고 나서 ‘무정부주의 운동’을 벌였다. 다음은 그들이 이 운동을 통해 무엇을 주장하는지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만인의 자유·평등을 주장하고, 일체의 정치적 지배·강권을 부인하고, 경제적으로는 사유재산, 강권적 공산을 배격하고 윤리적으로 상호부조와 만인의 공영을 주장하고, 실현하고자 하는 주의이다.(…) 재래의 사회적 해독물인 지배·착취·강권등의 제도를 파괴하고 근절하고, 정치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각 방면에 상호·압축 속박되어 살고 있는 민중을 해방시키고, 동시에 지배와 강권이 없는 자유공산사회를 실현시키는 운동이다. 만인이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취하는 것이다.
한민족의 독립은 민족 스스로 목숨을 걸고 나서 의열투쟁이나 무력항쟁 등 보다 적극적이고 강력한 투쟁을 통해서만 성취될 수 있다는 의식이 형성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흐름은 김원봉을 비롯한 일부 젊은 열혈투사들에 의해 제창되었지만, 의열투쟁의 장엄한 역사의 밑바닥에는 이회영이 일찍이 심혈을 기울여 양성한 신흥무관학교의 젊은 청년들이 있었다.-p208
신흥무관학교에서 신민회로 의열단과 임시정부로 이어지는 긴 여정까지, 함께 하였으나 홀로였고 실행은 신속했다. 독립운동가들과 함께 하였지만 분쟁은 하지 않았다. 신분제 사회에서 자유평등을 주장해왔으며 노비에게 존댓말을 쓰는 양반이었다. 관료들이 가지고 있는 권위주의나 자기과시를 무척이나 싫어했고 그의 사상은 독립운동가 이전에 진정한 자유주의자를 꿈꾸었던 찐 아나키스트였다. 조선 땅에서 따뜻한 밥을 먹고 좋은 옷을 입으며 살았을 조선명문가 6형제는 밥 한 끼로 열흘을 버티고 풍찬노숙을 하며 독립운동을 하였지만, 다섯 째 이시영만 나라의 독립을 보았다. 감동받아 마땅하지만 가슴 아픈 일이다. 신흥무관학교가 독립운동가의 시금석이 되었듯이 이회영의 자유사상은 가슴 깊이 찬란한 불씨로 남겨져 언젠가 우리 모두의 가슴에도 아나키스트로 피어오를 날이 오겠지.
나도 남에게 지배받고 싶지 않으니 ‘기소불욕이면 물시어인’으로 나도 남을 지배해서는 아니 될 것이 아닌가. 지배 없는 세상, 억압과 수탈이 없는 세상이 우리 독립한국에 실현되어야 한다는 것이 말의 표현을 닮았을망정 나의 일관된 정견이었다.-p4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