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을 사색하는 시간
이창익 지음 / 인간사랑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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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이가 흰머리와 주름살을 지녔다는 것이 그가 오랜 시간을 살았다고 생각할 만한 이유가 되진 않는다. 그는 오랜 시간을 살았던 것이 아니라, 다만 오랫동안 존재했던 것이다.”-p115

 

우리는 이분법을 너무 좋아한다. 좋음과 나쁨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다보니 삶에도 좋은 삶과 나쁜 삶이라는 이분법으로 구분하려고 한다. 죽음도 마찬가지다. 죽음에도 좋은 죽음과 나쁜 죽음을 말하기도 한다. 과연 삶과 죽음 앞에서 좋음과 나쁨의 잣대가 정녕 타당한 것인지 모르겠다. 죽음은 그저 죽음일 뿐이고, 삶 역시도 그저 삶일 뿐, 좋음과 나쁨은 그 누구도 판단할 수 없는 것이다. 근래에 회자되는 웰다잉이라는 말도 그렇다. 문자그대로 좋은 죽음, 편안한 죽음을 맞이하기 위한 준비과정이라 하지만, 우리가 일상에서 맞부딪히게 되는 죽음의 모습은 웰다잉과 거리가 멀다. 많은 사람들이 준비의 과정 없이 죽음을 맞이하고 있으며, 예상하지 못했던 일로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 현실이다. 코로나 펜데믹으로 바이러스 공포를 경험한 바로는 웰다잉이라는 말자체가 얼마나 공허한 메아리인지를 떠올려보게 된다. 이제 죽음은 도처에 널려있으며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죽음의 공포는 그 어떤 말로도 대처되지 않는 지경에 이르렀다.

 

 

미드 가운데 「워킹 데드」란 영화가 있다. 죽었지만 살아있는 시체들이 세계를 가득 메우고 살아있는 사람들은 좀비와 싸우다가 장렬히 죽음을 맞이한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자기가 사랑하는 이들의 처참한 모습을 보고 죽여야만 하는 고통에 괴로워한다. 살아있어도 죽은 자이며 죽었어도 살아있는 자이다. 그러나, 영화에서 명백하게 보여주는 것은 ‘어떻게든 살아남아야만 한다.’는 인간의 책무이다. 죽음이 도처에 있지만, 포기하지 않을 때 삶이 지속된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듯 살아남은 사람들은 오로지 살기 위해서만 투쟁한다. 지속되어야만 하는 우리네 삶에서 정작 필요한 것은 잘 죽는 웰다잉보다 웰리빙 즉 잘 사는 법을 배워야한다.

 

바우만에 따르면, 근대 이후의 세계에서 잘게 분해하여 행복이라는 무수한 ‘작은 불멸성’으로 해체하는 것이다. 이제 사람들은 삶의 끝에 자리하는 천국의 환희를 기대하기보다 일상생활에서 누릴 수 있는 작은 쾌락과 환희, 즉 웰빙에 몰두한다. 삶의 끝에 놓인 불확실한 천국을 갈구하기보다 삶의 매 순간에서 ‘작은 천국’을 건설하고자 한다. 바우만은 이러한 현상을 ‘불멸의 죽음’으로 개념화한다.

    

 

    

 

 

인간에게 죽음은 ‘탄탈로스의 바위’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탄탈로스의 머리 위에 매달린 채, 언제 허공에서 떨어져 탄탈로스의 머리를 박살낼지 알 수 없는 이 바위로 인해, 탄탈로스는 감히 신의 음식을 먹지 못한다. 아마도 제우스는 탄탈로스의 오만함을 징벌하기 위해 머리 위에 바위를 매달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바위는 인간과 신의 건널 수 없는 경계선을 의미한다. 탄탈로스는 바위의 추락을 감수하지 않는 한, 신의 음식에 손을 댈 수 없다. 신처럼 살려면 탄탈로스는 신들의 음식을 먹어야 한다. 그러나 음식에 손을 대는 순간 바위가 떨어질 것이다. 신처럼 살려고 하는 순간 탄탈로스는 인간으로서 처참한 죽을 맞이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죽음은 항상 신과 인간의 차가운 경계선을 알려준다.-p125

 

『죽음을 사색하는 시간』은 죽음에 대한 학문적 서사이다. 현대를 압도하게 지배하고 있는 죽음의 시간들에 대하여 사유의 문을 열어주는 책이라 할 수 있다. 무한한 시간 속에서 죽음이라는 유한성으로 인해 삶이 더 가치 있다는 누군가의 말처럼, 어쩌면 똑같이 시한부 인생을 걸어가는 우리에게는 꼭 필요한 화두가 아닐까한다. 신이 될 수 없었던 탄탈로스의 숙명처럼 무한한 시간 앞에 던져진 인간의 유한한 삶의 운명은 바위에 깔리지 않으려 애쓰는 탄탈로스 같은 것이 아닐까. 이런 고통에서 그저 살아내는 것, 이제 우린 웰다잉이 아닌 웰리빙을 외쳐야 할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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