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톤 정암고전총서 플라톤 전집
플라톤 지음, 이기백 옮김 / 아카넷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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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톤』은 소크라테스가 독주를 마시기 전, 즉 죽기 하루 전 감방에서 친구 크리톤과 나눈 대화이다. 둘의 대화를 읽으면서 조금은 답답함이 느껴지곤 하였다. 그 답답함은 완고하고 철학적이지만 고집스러운 면들이 설득이 도저히 안 되는 꼰대처럼 여겨지기 때문이었다. 만약 내가 소크라테스의 입장이었다면, 나는 크리톤의 설득에 은근슬쩍 넘어가 살아남으려 했을 것이다. 크리톤의 말처럼 가정이 있고, 자식이 있고, 지켜야할 무언가가 있다면 소크라테스처럼 아무리 정의에 반한다하여도 살아남아야 할 이유만큼 강한 법은 없다 생각한다.

 

크리톤은 소크라테스에게 ‘자신을 구할 수 있는데도 자신을 포기하는 일은 정의롭지 못하다.’라는 말을 하며 자신을 버리는 것은 아이들도 버리는 것이며, 아이들을 고아로 만들려면 자식도 낳지 말았어야 한다며 신랄한 비난을 하지만 소크라테스는 자신을 ‘가장 좋은 원칙’외에는 다른 어떤 것에도 따르지 않는 그런 사람‘이라 한다. 다수의 판단보다는 전문 지식을 가진 한 사람의 판단이 중요하며 다수의 어리석음은 오히려 삶을 망칠 수 있다고 조언한다. 이 기준은 정의로움과 아름다운 것, 훌륭하게 사는 것이 같고 전문 지식을 가진, 즉 판단능력이 월등한 사람만이 이 기준을 지킬 수 있다 보는 것이다. 이 부분에 나는 상당한 오해를 가지고 있었다. 최대 다수의 행복이 최고의 선이라는 공리주의가 어쩌면 현대철학의 시금석이라 할 수 있다면, 소크라테스가 기준으로 하는 정의는 오로지 다수의 의견이 아닌 ’한 사람‘에 의해 적용된다는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전문 지식을 가졌다 해서 모두 정의로울 수 없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전제이다. 반대로 개인의 권리와 어떤 희생원칙도 용납되지 않는 것이 작금의 가장 정의로운 기준이 아닌가. 어쩌면 소크라테스의 지나친 원칙주의자의 궤변에 불과하다 생각될 수 있는 말이지만 소크라테스가 세운 ‘가장 좋은 원칙’을 다시 떠올려 보면 그의 행동이 이해가 된다. 그가 세운 원칙은 결코 정의롭지 못한 일을 해서도 안 되며, 보복으로 정의롭지 못한 짓을 해서도 안 된다. 였다. 결국 자신에 대한 정의와 옮음, 아름다운 삶에 반하는 행위이기 때문에 스스로에게 더욱 엄격하게 굴었던 것임을 나중에서야 깨달았다. 말과 행동이 다른 위정자들이 도처에 얼마나 많은 세상인가. 만약 소크라테스와 같은 엄격한 원칙론자들이 정치를 하였다면, 플라톤이 말한 철인이 지배하는 가장 이상적인 세계가 이미 이루어져 있었을지도 모른다. 한 사람의 철인이 아닌 행동하는 개인이 바로 소크라테스였던 것이다.

 

나훈아의 신곡 ‘테스형’이 화제다. 소크라테스에게 삶이 왜 이따위냐고, 그럼에도 그저 와 준 오늘이 고맙다고 하는 나훈아의 노랫가사말이 예사롭지 않게 다가오는 건 살아가는 모든 일이 녹록치 않다는 것을 이해하는 나이가 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크리톤의 말로 미루어 짐작해 볼 때 재판과정과 결과에서 억울한 면이 많았음에도 자신의 원칙과 정의에 충실히 따르는 소크라테스의행동에서 최대 다수의 행복이 최고의 선이 정의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시대에 개개인의 ‘옳음’의 기준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새삼 느끼게 되었다. 소크라테스에 의하면 정의와 옮음과 아름다움은 세쌍둥이다. 다수를 위해 소수의 희생이 당연시되고 있는 현재에 발생하고 있는 윤리적 딜레마는 소크라테스의 철학을 통해 극복되어야 한다. 이제까지 철인이 통치하는 나라가 가장 이상적인 국가라 배워왔지만, 이 책을 통해 철학을 공부하는 개개인의 시민이 세상을 구원할 수 있다는 것이 소크라테스의 진심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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