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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개
이언 매큐언 지음, 권상미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5월
평점 :
준은 1946년 두 마리 개의 형태로 나타난 악과의 조우를 통해 신을 만났다.(버나드는 그 사건을 이렇게 표현하는 것을 창피하게 여겼다.) 어떤 사악한 원칙이 있다. 인간의 만사를 주관하며 주기적으로 나타나 개인이나 국가의 삶을 지배하고 파괴했다가 철수해 다음 기회를 기다리는 힘.-p27
이데올로기(이념)이라는 말은 현대에 흔히 쓰이는 용어이다. 정치와 사회와 긴밀한 연관성을 가진 관념과 신념, 믿음을 말할 때 쓰여 우리에게는 꽤 익숙한 언어이다. 이언 매큐언의 『검은개』를 읽으며 이데올로기가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은 어떤 면들이 있을까를 연상하곤 하였다. 1940년대 지금과는 달리 이념의 극단을 볼 수 있는 시대가 이 소설의 배경이기 때문이다. 공산주의자와 파시즘이 첨예하게 대립하였던 시대였으며 민주주의 태동과 동시에 제국주의가 비판의 대상이 되었던 시대를 살아가던 이들의 이야기이다. 이데올로기의 풍요 속 영적 빈곤과 갈등에 허덕이던 시대가 바로 1940년대가 아닐까한다. 우리나라를 예로 들자면 극우와 극좌라는 극단의 갈등 속에서 어떤 계기로 인해 이념의 전환을 하게 되는 정치인들의 고민 같은 것이다. 사회와 정치라는 긴밀한 연관성을 가지며 자신의 신념과 관념을 증축해가는 것이 이데올로기의 옷을 입는 과정이라면 그 옷이 공산주의나 파시즘의 색을 지녔더라도 개인의 경험과 사건에 의해 언제든 변할 수 있는 온도를 가진 것이 이데올로기이다.
버나드와 준의 경험은 이데올로기가 어떻게 개인의 삶에 영향을 미치며 그것이 어떻게 변하는 과정을 거치는지를 보여주는 회고록이다. 둘 다 젊었을 때 공산주의였고 사랑에 빠져 있을 때는 같은 생각, 같은 뜻을 가진 한쌍이었다. 하지만, 이들이 공산주의 노선에서 탈피하며 서로 다른 이념을 향하자 둘은 극단의 부부가 되었다. 버나드가 합리주의라면 준은 신비주의자이고, 버나드가 인민위원이라면 준은 기권자이다. 버나드는 과학자이지만 준은 직관론자이며 모든 면에서 양극단에 서있다. 도저히 한때 사랑했던 사이로 믿기지 않을 정도로. 사위 제레미는 이런 장인 장모를 보면서 이들의 이야기를 회고록으로 남겨야겠다고 생각한다. 준이 이제 죽어가고 있었고, 준이 천작하여 평생을 집착한 검은개의 이야기를 쓰고 싶어했기 때문이다.
세상은 어머니의 세계관과 아버님의 세계관을 모두 끌어안을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어떤 이들은 내면의 여행을 하고 다른 이들은 세상을 개혁하는 데 힘쓰는 게 가장 좋은 일 아닐까요? 문명을 일구는 것은 다양성이 아니던가요?”-p71
버나드와 준에게 검은 개의 의미는 이데올로기의 변화와 연관이 있어 보인다. 위협적이었고 공포 그 자체였던 검은 개 두 마리로 인해 이때부터 신비주의자로 급변한다. 이데올로기란 사회와 깊은 연관성을 갖고 그 토대위에 만들어진 신념을 의미한다. 검은개를 악의 신으로 믿으면서 세상의 모든 일은 신의 뜻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믿음을 갖게 된 것은 이들 가족 모두의 삶에 터닝포인트였다. 합리주의자였던 버나드와 신비주의자 준은 평생을 서로 저주하며 싸우는 사이가 되었으니까.
다음날 과수원 복숭아나무의 가지를 치는데 준이 나타나 지금 다듬는 나무와 그 아름다움은 신의 창조물이라고 말했다. 버나드는 이런 나무와 다른 수목이 진화의 산물임은 익히 아는 사실이며 그걸 설명하는 데 신은 필요없다고 말했다. -p170
이데올로기가 영원할 거라는 착각을 우리는 수도 없이 하고 살지만, 준에게 닥쳤던 ‘검은 개’로 인해 삶의 모든 것이 어그러지듯이 이데올로기는 정치와 사회라는 외부의 환경에 영향을 받는다. 또한 한 개인의 신념이라는 것은 강력한 것들의 상징 앞에서는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가.버나드와 준은 신념을 지녔지만, 역사적 사건 앞에서 그 신념을 지켜나가지 못한다. 사회의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였고 한편으로는 시대의 낙오자이기도 하다. 어쩌면 이데올로기 앞에서 우리는 모두 낙오자인지도 모른다. 정치와 사회 역사라는 거대한 흐름 속에서 부유하며 떠돌아다니는 이념의 허울아래 조금씩 망가져가고 있는 개인의 삶을 반추하는 듯한 소설이다. 이언 매큐언의 메시지는 그래서 가볍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