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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의 철학 - 2019 청소년 교양도서 선정
송수진 지음 / 한빛비즈 / 2019년 3월
평점 :
항우울성 약을 먹는다고 가슴속 멍울까지 사라질까? 잠시 처방은 될 수 있다. 그러나 우울증 진단을 받으면 “너는 정상이 아니다”라고 취급당하는 것 같은 기분은 지워지지 않는다. 나는 의사가 아니니 우울을 의학적으로 정의할 수는 없다. 하지만 내게 배운 철학으로 우울을 해석할 수는 있다. 우리가 지금 우울한 것은 일상의 세계를 날것으로 민감하게 바라보고 있다는 반증이다. 우울은 생을 처절하게 들여다보는 과정의 일부다. 다른 세계를 찾으라는 신호이며 파편화된 내 삶을 재편하려는 외침이다. 그 외침의 현장은 때론 죽음충동을 추동시키기도 하지만, 그만큼 절절하고 치열하게 생을 붙잡으려는 저항의 움직임이기도 하다.-p96
갑을관계,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우리들에게 익숙한 말이 되었다. 갑질이 익숙하다는 것은 우리사회가 상하관계와 주종관계를 인정하고 있고 누구나 갑질에 자유롭지 못한 경험이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아랫사람이라는 이유로 쉽게 폭언을 퍼붓는 재벌 사모님의 이야기나 기분이 나쁘다는 이유로 비행기를 돌려 국민적 공분을 사기도 하였다. 이러한 갑질은 재벌가의 이야기만이 아니다. 미투 운동으로 세간을 떠들썩하게 하였던 사건들은 직위와 명예를 이용한 갑질의 연장선이었고 을들은 그런 갑들에게 정신과 육체를 지배당하고 있었다. 사회에 만연한 갑질이 폭로되면서 을들의 공분은 잠시였고 자본주의 구조 속의 을들은 속수무책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갑을관계는 영원히 지속되는 구조이기에 을에게는 살아남아야만 하는 생존법이 필요한지도 모른다. 그럴 때 필요한 책이 『을의 철학』 이다.
누구나 한 번쯤은 세계가 흔들리는 경험을 한다. 그것은 예고치 않은 사고처럼 다가오기도 하고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을 당하거나 시련의 아픔으로 인한 것일 수도 있다. 기존의 가치관과 신념이 와르르 무너질 때가 언젠가는 찾아온다. 몇 년 전 그런 경험이 내게도 찾아왔었고 그것은 너무 갑작스럽게 일어났다. 중년의 사춘기 같았던 우울과 분노의 감정으로 화나면 화나는 대로 거칠었고 분노를 고스란히 타인에게 속사포처럼 쏟아내기도 하였다. 그렇게 몇 년을 지내다보니 나는 내가 아닌 사람이 되어 있었고 형편없는 모습이 되어버렸다. 그런 나를 마주하는 것이 무엇보다 두려웠다. 중년기의 사춘기가 내게 남겨준 것은 너덜너덜 조각난 자존심의 깃발을 열심히 펄럭이며 내면은 텅텅 비어 슬퍼하는 자아였다. 이 책을 읽으면서 조금씩 그런 나를 이해할 수 있었다. 나라는 존재 역시도 타인을 이해하는 과정처럼 ‘이해하는 과정’이 필요로 하다는 것을.
그렇게 나를 이해하는 과정은 타인을 이해하는 과정보다 더 괴롭고 처절했다. 우리는 종종 지금의 세계와는 또다른 세계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곧잘 잊는다. 하나의 문이 닫히면 다른 세계의 문이 저절로 열린다. 문제는 언제나 이 문이 마지막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지금의 세계가 전부라 여기기에 을이라는 이유로 받는 고통을 고스란히 받으며 버팅기며 살아가는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을로 살아가는 운명을 지닌 우리는 삶에서조차 갑이 되지 못하고 자발적 을의 삶을 살아가고 있기에 모두가 우울할 수밖에 없다.
프롬은 말한다. 당신이 허무했던 이유는 ‘남이 바라는 나’로 열심히 살고 있기 때문이라고, 진짜 삶은 자신을 억압했던 것들을 스스로 깨닫고 자발적 고독을 선택하는 것이라고. 이처럼 진짜를 향한 동경은 철학자들의 공통분모다. -p81
그렇다면 어떤 삶이 ‘갑’이라 할 수 있을까. 사고는 예고 없이 찾아온다. 누구에게나 자신의 세계가 한 번쯤은 뒤집어지는 순간이 찾아온다. 세계의 뒤틀림, 견고하게 쌓아왔던 자신의 성이 송두리째 무너져 버리는 사고가 찾아오면 우리는 어김없이 와르르 무너지기도 한다. 그러나,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사는 사람에게는 그 성을 다시 쌓을 수 있는 희망이 있다. 구약성서의 욥이 수많은 고난에도 굳건하게 자신의 세계를 다시 일으켜 세울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이 어쩔 수 없는 세계가 있음을 인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스스로 변할 수 있는 자유로운 주체, 그것이 진정한 갑의 삶이다. 데미안의 싱클레어가 태어나려는 자는 반드시 자신의 알을 깨뜨려야만 한다고 말하였듯이 갑의 삶을 살기 위해 지금의 나를 둘러싸고 있는 을의 세계를 한 번쯤은 깨뜨려야 한다. 철학은 그것을 가능케한다. 하나의 세계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자신의 세계를 깨뜨려 나아가다보면 자본주의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뛰어넘는 또 다른 세계가 존재한다. 『을의 철학』은 당신에게 그 세계를 엿보게 해주는 사유의 문이다.
‘내 인생은 여기서 끝났어’라고 자신에게 선언하는 순간 삶은 진짜 위험해진다. 자칫하면 정말 죽음으로 끝날 수 있으니까. 그 허무주의는 왜 나에게 온 것인가? 나는 왜 그렇게밖에 생각하지 못하는가? 대체 무엇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는가? 철저히 물어야 한다.-P7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