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
#속물에대하여
#로맹가리와김수영
현대사회에 있어서는 고독은 나일론재킷이다.
고독은 바늘 끝만치라도 내색을 하면
그만큼 손해를 보고 탈락한다.
원래가 속물이 된 중요한 여건 하나가,
이 사회가 고독을 향유할 수 없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런데 속물이 된 후에 어떻게 또 고독을 주장하겠는가.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짜 속물은 나일론 재킷을 입고 있다.
그러니까 이 재킷을 입고 있는 사람은,
이 글 제목대로 ‘거룩한 속물‘
즉 고급 속물의 범주에는 들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내가 흥미를 느끼고 있는 것은
저급 속물이지 고급 속물은 아니다.
고급 속물은 반드시 자기 의식을
갖고 있어야 할 것이다.
고급 속물이란 자폭을 할 줄 아는 속물,
즉 진정한 의미에서는 속물이 아니라는 말이 된다.
아무래도 나는 고급 속물을 미화하고 정당화시킴으로써 자기 변명을 하려는 속셈이 있는 것 같다.
이쯤되면 초고급 속물이라고나 할까.
인간의 심연은 무한하다.
속물을 규정하는 척도도 무한하다.
-김수영 전집 1에서 -
‘거룩한 속물들‘이라는 김수영의 글을 읽다가
김수영이 참 재밌는 시인이라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이 단락이 제일 재밌는 것 같다.
그동안 순수문학을 하며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던 그가
돈이 궁색해지자 통속적인 시와 문학,즉 사람들 입맛에 맞는
글을 쓰자 평론가들의 호평을 받으며 인기작가가 된다.
그런 김수영에게 속물론 주제로 원고청탁을 하자
김수영이 하는 말이
과거 자신이 순수한 문학을 하고 있을 때는
자신의 속물론에 귀기울여주지 않더니
완전무결한 속물이 되자, 속물론을 써달라는 말에
너무 잔인한 부탁을 받았다고 한다.
속물이 속물을 평가할 때 속물은 이미 자신에 대한 변명거리와
속물론을 미화하려 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은 속물이라는 걸 아는 한
초고급 속물이라는 해석은 정말 재밌는 표현이다.
자폭을 할 줄 아는 자, 자기를 아는 자는 초고급 속물이다.
그렇지 못한 사람은 저급 속물이다.
결국 인간은 모두 속물이지만
자기를 아는 인간과 자기를 모르는 인간으로 구분될 뿐이다.
로맹가리라는 프랑스 작가 있었다.
<하늘의 뿌리>로 콩쿠르 상을 수상했지만
언제부턴가 평론가들은 로맹가리는 한물 간 작가라며
앞다투어 씹어대기 시작했다.
그때 혜성같이 나타난 작가가 에밀 아자르이다.
<자기앞의 생>으로 콩쿠르 상을 수상하면서
이후 출간하는 책마다 격찬을 받았다.
그와 비교대상은 항상 로맹가리였다.
평론가들은 로맹가리의 소설은 혹평하면서
에밀 아자르는 천재라고 했다.
이후 로맹가리가 자기 입에 권총을 넣고 자살한 후
그의 유고작 <에밀 아자르의 삶과 죽음>을 통해
로맹가리와 에밀 아자르가 동일인임이 밝혀진다.
당시 엄청난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것은 물론이다
그의 유작에는 평론가에 대한 신랄한 비판이 담겨 있었다.
속물론에는 자폭할 줄 아는자는 속물이 아니라는 표현이 나온다.
김수영의 순수문학에는 냉혹한 시선을 보내다가
먹고 살기 위해 글을 쓸때야 비로소 자신의 문학의 가치를 인정해준 속물들에 대한 김수영의 속물론은
로맹가리가 평론가들 머리위에서 익명으로서만
자신의 문학성을 인정받았을 때
세상을 향한 배신감의 깊이는
속물론 만큼이나 냉소적인 것일테다.
김수영이나 로맹가리가
나일론 재킷을 입고
속물들을 향한 일침의 글은
그래서 위대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