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끄적끄적
#공포는 때로 정치적이다.
#문학

오정희의 『유년의 뜰』 마지막 편에 실려 있는 『어둠의 집』의 여자는 고요한 아침에 덩그러니 남겨진 나를 닮았다.
아무도 없고 누구도 알 수 없는 내면의 바다가 빈공간을 채우는 시각, 내가 느꼈던 것도 어쩌면 외롭고 남겨진 자로서 감당해야하는 슬픔인지도 몰랐다.

‘불을 꺼요.
짧고 날카로운 호각 소리, 성마른 외침, 골목을 뒤흔들며 튀어 오르는 발소리에 이어 느닷없이 공습경보가 울렸다.
집과 골목의 사이사이에서 산발적으로 튀어 오르는 호각 소리-그것은 마치 평화로운 마을에 잠입한 비적 떼들의 서로 부르고 응답하는 신호처럼 들렸다-어지럽고 다급한 발소리에 그 여자는 집 뒤 야산의 전주에 매달린 스피커가 낮 동안 몇 차례 방송한 것이 야간 등화관제 실시를 알리는 것이었음을 깨달았다.‘ -p293

가족들이 약속이나 한 듯 모두 늦던 날, 그 여자도 홀로였다.
전쟁의 상흔을 간직한 오래되고 낡은 집에 ‘야간 등화관제‘를 실시하는 호각소리가 울린다. 가상적기의 출현을 알리는 신호로 불을 끈 여자는 공포와 두려움에 잠식되어 간다. 어둠의 시간은 밝음의 시간보다 더 지루하게 흐른다. 시각의 마비는 촉각을 긴장시켜 아주 작은 소리에도 민감하게 만들어 버린다. 어둠 속에서는 자신의 숨소리조차 엄청나게 큰 데시벨이 된다. 이윽고 물이 천장에서 똑똑 떨어진다. 낡고 오래된 그녀의 집에는 물이 새고 누수가 되어 곳곳에 전류가 흐른다. 세수를 하다가 또는 설겆이를 하다가 전류가 흐르는 물에 놀라 소리치는 딸과 아들, 남편은 이사를 가자하지만 그녀는 벽 사이사이를 페이트칠로 메꾸는 노동으로 버텨왔다. 불 꺼진 어둠의 집, 마루에 내딛는 자신의 발걸음이 낯선 타인의 걸음으로 느껴지고 이층계단이 컴컴한 동굴의 입구처럼 여겨지며 여자는 ‘공포에 빠진 자의 불가항력, 불가사의한 힘에 대한 무력하고 무의한 저항’과도 같은 상태에서 단편적 기억들을 파노라마 필름을 돌린다. 늘 바쁜 남편에게 찬밥 신세였던 여자는 밤마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로트버틀러와의 로맨스를 꿈꾸고 딸아이의 잦은 외박이 남자때문이라는 것에 불안감을 느낀다. 기억은 태초로 거슬러가려는 듯 전쟁 이전에 이 검은 집에 살았던 한 여인의 기억- 전쟁 중 일본인들 7명에게 둘러싸여 무자비하게 강간당한 한 여인-을 떠올리며 공포는 더욱 커져만 간다.

가상적기는 이내 격파되고 마을 몇 집만 탔을 뿐 야간 등화관제가 끝나면서 여자의 공포도 막을 내린다. 여자에게 나타난 공포, 그것의 정체는 무엇이었을까. 허나 나는 이 여자의 공포가 중년 여성이 가지고 있는 무의식의 세계를 반추하는 듯 보여졌다. 어둠과 고요속에 홀로 남겨져보면 안다. 시계의 초침소리가 얼마나 크게 울리며 시간의 페이지를 넘기고 있는지를. 아이들과 남편이 떠나간 자리에는 아내와 엄마라는 역할의 무게가 때론 공포가 되기도 한다. 정치적 폭력을 시사하는 등화관제 속 어둠에서 홀로 견디며 공포에 잠식되어 가는 여성의 모습은 중년에 막 접어든 이들의 모습과 다르지않다. 문득 모두가 떠난 자리에 우두커니 앉아 있던 어느 날의 내가 떠올라 잠시 끄적거려본다. 공포는 때론 정치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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