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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한 날엔 키에르케고르 ㅣ 필로테라피 4
다미앵 클레르제-귀르노 지음, 이주영 옮김 / 자음과모음 / 2018년 10월
평점 :
에인 랜드의 소설 『아틀라스』에는 이런 말이 쓰여 있다.
“내 삶에, 그리고 삶에 대한 사랑에 걸고 서약하노니 나는 결코 타인을 위해 살지 않을 것이며, 타인에게 나를 위해 살 것을 요구하지도 않을 것이다.”
개인주의란 곧 나의 삶을 위한 삶, 그 자체를 말한다. 개인주의가 팽배한 현대사회에 가장 큰 위로를 안겨 준 것은 다름 아닌 현재의 삶 그자체를 즐기라는 욜로였다. 카르페디엠은 개인의 삶을 언제나 지지한다는 응원가와도 같았다. 그러나, 이 개인주의의 부작용이 바로 절망의 원인이라 지적한 철학자가 있다. 바로 케에르케고르이다.
판사 문유석의 『개인주의자 선언』에서는 한국사회의 불행을 ‘집단’ 주의 때문이라 지적한 바있다. 한국 사회에 넘쳐나는 집단주의화는 개개인의 자유를 말살하는 원인이며 사회에 만연한 고질병이기에 개인주의자의 행복이 집단 의존증을 벗어나게 해줄 수 있다는 것이다. 개인의 자유가 말살 된 채 무리지어 다니며 온라인에서 익명의 가면을 쓰고 잔혹성을 발휘하는 대중들이 가하는 폭력은 이미 한국 사회에 심각한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 그렇기에 개개인 스스로가 자유와 권리를 지키기 위해서는 집단주의를 경계해야 한다고 경고한 것이다.
이처럼 현대를 사는 ‘개인’은 매우 중요한 의미다. 한 세기를 여는 포문이나 다름없던 ‘개인’의 자아찾기. 인류가 개인이라는 자아를 찾게 되면서 근대가 시작되었다. 자유와 인권의 시작점이라 하여도 과언이 아닌 개인에 대한 정체성을 의심한 단 한 명의 철학자 쇠렌 키에르케고르만 ‘개인주의’가 이 시대에 절망을 가져온다는 예언을 했다.
욜로를 외치며 행복한 웃음을 짓는 젊은이들, 카르페디엠을 외치며 현재의 삶을 즐기는 이들이 넘쳐나고 있다. 그럼에도 세계보건기구의 최근 보고서에 따르면 유럽인들 25퍼센트가 매년 우울증이나 불안증을 앓고 있다고 한다. 한국사회는 더 심각하다. ‘우울증이 패션이 된 한국사회‘라는 말이 돌 정도로 우울증으로 자살하는 이들은 세계 1위며 보건복지부의 실태조사결과 전 국민의 1.5 퍼센트가 우울증을 앓고 있다. 개인의 삶을 즐기는 사람들은 많아졌음에도 우울증을 앓으며 절망에 빠진 이들이 많은 이유는 무엇일까.
절망은 ‘자아의 질병’이라 부른다. 아니 ‘개인’의 질병이라 부르는 것이 더 적합한지 모르겠다. 실제로 사람들이 절망을 느끼는 이유는 ‘핑계를 댈 수 없는 대상’, 즉 자기 자신 스스로가 자신을 비난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먼저, 절망에 빠진 사람은 벗어던지고 싶은 자신 때문에 절망한다. 그런데 절망할수록 오히려 벗어나고 싶은 자신의 모습에 더욱 집착한다. 절망한 사람은 지금의 자기 모습을 더 이상 견디지 못하지만 벗어나지도 못한다. 보기 싫은 자신의 모습은 절망으로 더욱 강하게 도드라져 보이고 절망은 이런 자신을 파괴하고 싶게 만든다. 자기에게서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을 하면 할수록 그런 자신이 머릿속에 늘 존재한다! 심지어 절망한 사람은 자신에게 절망하기 위해 자신을 필요로 한다. -p29
“인간은 정신이다. 그렇다면 정신은 무엇인가? 자아다. 그렇다면 자아는 무엇인가? 자신과 맺는 관계다. 다른 말로 하면 정신은 내 안의 자아와 맺는 내면적인 방향이다. 자아는 관계가 아니라 관계를 맺는 자신에 대한 피드백이다. -p57
절망은 자아를 상대로 하는 싸움의 감정이다. 우리가 삶에서 더욱 절망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절망이 향해 있는 대상이 바로 우리 자신을 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떠나고 믿었던 친구에게 배신당하고 사기를 당하는 것들조차도 결국은 그런 상황을 만들어낸 자신과의 길고 긴 감정의 배신을 참고 견뎌야 한다는 것을 이해하기 때문이다. 개인의 자유가 극대화된 사회에서 절망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을까? 그렇기 위해서는 올바른 선택을 하는 것이 우선 되어야 한다. 실연의 아픔을 겪기 위해서는 사랑하는 사람을 잘 골라야하고 친구에게 배신당하지 않으려면 좋은 친구를 사귀었어야 한다. 사기를 당하지 않으려면 정보수집을 잘 했어야 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사람을 볼 줄 아는 안목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매 순간의 선택의 기로에서 어떤 선택이 옳고 나쁜지에 대한 명령을 내리는 것은 자아 속 내면의 소리이다. 무의식적이든 혹은 의식적이든 성장과정 환경에 따라 이미 내면은 형성되어 있는 상태이다. 우리의 선택을 명령하는 것은 이미 자아라는 내면의 소리이다. 개인주의의 함정은 바로 여기에 있다. 건강한 자아와 건강하지 못한 자아의 선택의 결과는 윤리적으로 도덕적인 비도덕적인지에 따라 옳고 그름의 판가름을 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이렇게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말은 공공이나 집단의 이익과는 상관없는 오로지 개인의 기준과 잣대로만 판단된다는 것이다.
‘실제 인생의 한 부분을 한 발짝 뒤로 물러나 바라보며 시로 표현하면 윤리적인 부분을 왜곡하고 상황을 제대로 보지 못하게 한다.’p208
선택도 개인이고 결과의 책임도 개인이 하지만 결국 개인이 감당해야 할 문제는 자유라는 이름 뒤에 숨어 있어 프로메테우스의 간을 쪼아 먹는 독수리처럼 자아를 갉아먹게 된다. 키에르케고르는 이런 개인주의의 부작용을 꿰뚫고 있었다. 윤리적인 기준이 개인이 기준이 되다보면 그 기준에 못 미치게 되면 죄책감에 시달리고 절망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사악한 결정은 삶의 모순을 극대화시켜 삶을 파괴적으로 몰아간다. 절망 속을 잘 들여다보면 인생에 보내는 야유, 미친개 같은 도전, 이상을 더럽히고 모욕하고 저주하려는 의지가 숨어있다. 절망은 양심에 거리낌 없이 모든 것을 조롱하는 방법으로 사악한 의도를 드러낸다. 이미 살펴보았듯이 희극은 실존적인 깊이가 있기에 의미를 찾을 수 있다. 물로 반대로 웃음을 모든 것을 진지하게 보지 않고 조롱하는 방법으로 사용하는 경우도 있다.-p183
절망은 우울하다 해서 찾아오는 감정이 아니다. 절망은 시시때때로 나를 따라다니며 조롱할 때가 있다. 때론 타인의 비난으로 때론 죄책감으로 때론 원망으로 때론 미움으로 시시각각으로 모양을 바꾸어 마음의 문을 두드린다. 『절망한 날엔 케에르케고르』를 읽으며 다소 절망이라는 실존의 감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한 챕터의 마지막 부분마다 ‘짚고 넘어가기’ 부분이 나올 때마다 질문에 답을 끄적거리게 만들었다. 그것은 어쩌면 본연의 나이기도 하며 아파하는 나의 실존이었다. 개인의 삶, 그 깊은 심연에는 절망이 잠들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