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날의 주인공은 학사모가 이렇게나 잘 어울리는 우리 어머니였다).
1992년 5월의 스물하고 두 번째 날, 아니 옹알이를 하다 말귀라는 게 생겨먹은 이후 처음으로 나는 어머니의 입에서 일가기 싫다는 말이 나오는 걸 들었다. 못난 불초자는 뒤늦게 두 가지를 깨달았는데, 하나는 여인의 살아온 반세기 동안 단 한 번도 내뱉은 적이 없던 말이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 시대의 여자 벌이'로 모질게 가정을 꾸려오면서 매일 매일 똑같이 가기 싫었을 여러 일터를 숨 한번 안 돌리고 지나쳐왔다는 거다. 아홉 시와 여섯 시의 바깥에서만 그녀를 봐왔던 나는 정말이지 이 여자가 '철의 여인' 인줄만 알았던 게다. 그러던 어머니가 나름대로 밥벌이의 지겨움을 최초로 토해냈으니, 나는 눈보라를 처음 맞은 열대지방 원주민처럼 얼어붙을 수밖에.
2013년 2월, 연거푸 대학 입시에 미끄러진 어떤 모질이는 바짝 벌어들인 돈으로 부산행을 준비했다. 불안한 눈매를 감추지 못했던 중년의 경기도 여인은 나의 하행을 탐탁지 않아 했다. 모친만큼 모질었던 나는 내 벌이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엄마도 엄마 인생을 살라며, 자기를 위해 쓰고 살라며 겹 띠동갑의 인생 선배에게 주제넘은 훈수를 두었고, 벌어둔 300만 원을 챙겨 그냥 부산에 내려가 버렸다. 나는 진심으로 그 여인에게 자기 욕망에 충실한, 자신의 삶을 되찾는 경험을 선물하고 싶었다. 내 뒷바라지에 인생을 더 희생하질 않길 바랐기에, 참으로 무정한 놈은 일방적으로 반년 동안 연락을 끊어버렸더란다.
그놈, 결국에는 이것저것 하면서 오기 반 성질 반으로 최저생활 언저리의 돈을 꾸려 버텼고, 친구 하나 없던 이 땅에 제법이지 괜찮은 뿌리를 갖게 되었다. 역시 사람은 적응의 동물인 걸까. 그 뿌리를 믿고 어쩌면 내 힘으로 하는 마지막일지 모를 공부에 뜻이 섰기에 대학원에 들어갔고, 늘어난 학비를 대고자 다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여느 때처럼, 삶의 일부처럼 해왔던 일인데, 스물여섯이나 먹어버린 그 녀석 입에서 불현듯 "일가기 싫다"라는 말이 나오는 거다. 입에 잘 안 붙이고 살던 말인데, '거참 모전자전 일세' 나는 너털웃음이 나오고 말았다.
2015년에는 그녀의 둘째가 대학에 갔다. 두 번째 분신도 어미를 닮아 싫은 기색 하나 없이 묵묵히 제 돈 제가 벌어, 제 앞길 제가 가렸다. 상아탑의 돈이 굳는 덕에 벌이는 적지만 등산도 다니고 카페도 가는 버릇이 들었고, 종종 외식도 할 줄 알게 되었다. 그녀가 꽤 괜찮은 표창을 여럿 받고 졸업한 맏아들을 여전히 밥풀떼기나 흘리는 칠칠맞은 어린애로밖에 보지 못했던 것처럼, 나 또한 서른 즈음부터 슈퍼우먼처럼 여자 혼자 벌어 모든 것을 겨우겨우 기꺼이 떠안아 버텨내던 그 시절의 그녀만 기억했던 것이다. 그 무거운 삶의 무게를 짊어진 입에서 일가기 싫다는 말이 최초로 나왔더랬다. 그제야 나는 그녀에게서 언젠가부터 늘어버린 주름과 먹지 않는 화장의 들뜸과 잔 고장 많은, 반세기를 버텨낸 신체를 발견했더랬다. 명절에 두 번, 방학에 두 번 어머니를 찾는 게으르게 바쁜 아들은 갈 때마다 늙어있는 어머니의 인생에 깊은 연민을 느꼈다.
2017년 2월 24일 자로 나는 졸업을 했다. 한때 슈퍼우먼과 그녀의 두 번째 분신은 큰 걸음으로 내 자취방에 찾아왔다. 낯 뜨거운 말을 서로 잘하지 못하는 탓에, 여자는 자신의 고된 삶을 보상해주지 못한, 기대치에 못 미쳤던 큰 아들의 입학을 제때 축하해주지 못했던 것이 두고두고 한이라고 했다. 그래서 별 볼일 없는 졸업식이라도 기어이 오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나는 결국 치우기를 포기한 냉장고를 들키고야 말았고, 방 청소에 일가견 있는 전문가 두 사람의 능숙한 손길과 부지런한 잔소리에 내 방은 금세 묵은때를 벗겨냈다.
공부했으면 참 잘했을 머리를 가진 나의 어머니는 일곱이나 딸린 동생들의 인생으로 인해, 어쩌다 연좌제의 늪에 빠져 대학의 문턱도 밟지 못했다. 어머니와의 왕래가 줄어갈수록 나의 자유는 높아만 갔지만, 직접 자식의 대학생활을 두 눈으로 보지 못한 것을 두고두고 아쉬워했고 또 늘 궁금해했다. 당신께서 참 좋아하는 해리포터 속 펜시브로 읽혔으면 하고 바라면서, 나는 이 글을 적는다. “공부를 하다 사랑을 했으며, 이별을 하며 글을 읽었고 아니 글에 읽혔으며, 생각을 적다 마음을 쏟았고, 밤을 기다리다 낮에서야 잠이 들곤 했으며, 허겁지겁 가파른 언덕의 대학을 오르내렸고, 유쾌한 웃음으로 여러 벗을 사귄 만큼 날 선 논리로 아울러 풍족한 적을 두었노라”고. 그게 간추린 내 대학 생활이라고. 깨끗해진 방에서, 귀에 잔뜩 얹은 한소리가 고마워서, 뒤늦게 이 글을 바친다.
-2017년 2월 23일 @PrismMak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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