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가의 여행 - 루벤스의 스페인에서 고갱의 타히티까지
요아힘 레스 지음, 장혜경 옮김, 김소희 감수 / 웅진지식하우스 / 2012년 4월
평점 :
절판


 

[예술가의 여행] 화가의 여행에서 엿볼 수 있는 것들

 

 

http://der_insel.blog.me/120160881231

 

여기 열세 명 화가들의 여행기가 있다. 서유럽 출신이란 공통점이 있고 더러 여행지가 겹치기도 하지만, 국적도 시대도 다른 이들의 여행이다. 시간적으로는 15세기에서 20세기까지, 공간적으로는 멘체스터에서 영국까지 굉장히 광범위하다. 하지만 재주 있는 작가는 재치 있는 문장과 많지 않은 분량으로, 13명을 네 가지 주제로 나눠 우리를 안내한다. 화가의 여행에선 생각보다 많은 것들을 엿볼 수 있다. 먼저 이 책의 주 주제인 미술사적 측면에 있어서 화가의 여행은 후원의 역학관계, 미술 양식의 변화, 화가에 대한 배경 지식 등을 알 수 있고 미술사 연구에서 점점 관심이 높아지는 주제라 한다.

 

 

하지만 어떤 독자에겐 이 책이 탁월한 경제경영서로 보이기도 하고, 정치·사회학 책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만큼 <예술가의 여행>은 독자의 관점과 관심분야에 따라 전혀 다른 시각으로 읽고 느낄 수 있는 책이기도 하고, 그 다양한 면들을 모두 느낄 수 있는 책이기도 하다. 프루스트의 말을 인용한 이 책의 제사처럼 우리가 책 제목을 보고 주로 떠올릴 여행의 낭만이나 여행이 창조적 영감에 미치는 영향 같은 것은 오히려 가장 안 느껴진다. 한편 <예술가의 여행>은 저자가 서문을 완전한 서평 한 편처럼 썼다(다른 이들이 굳이 서평을 쓸 이유를 못 느낄 만큼). 그래서 목차대로 책의 기본 내용을 숙지하려거나 쇼핑 중이라면 다른 정보 찾지 말고 저자 서문을 꼼꼼히 읽어보길 추천한다.

 

 

화가의 여행은 서유럽 수공업자의 천명에서부터 출발한다. 장인과 도제로 상징되는 중세 서유럽의 길드 시스템에서 수공업자들에게 여행은 선택이 아닌 필수였고 공부였다. 대를 이어 장인이 되는 데 있어, 아버지께 전수 받고 거주 지역의 기술을 습득하는 것만으론 부족했다. 타 지역의 새로운 기술을 배우면서 자신의 기술과 융합하고 발전시켜야 한다. 화가도 넓은 의미로 보면 일종의 수공업자다. 자본(후원)이 결합하면서 화가의 여행은 도제수업·장인수업 차원을 넘어 규모와 목적이 확장된다. 16세기의 (알브레히트) 뒤러는 브랜드화를 알았다. 단순한 이니셜 모노그램에 불과했지만 작품마다 붙인 AD는 자기 작품의 상품가치를 높였다. 그리고 뒤러의 성공적인 마케팅엔 영리하고 수완 좋은 아내의 역할이 컸다.

 

 

예술과 외교 모두 성공적으로 수행한 화가도 있었다. 루벤스는 벨기에와 이탈리아·스페인·영국을 돌아다니면서 외교사절로서 충실하면서 귀족들에게 안정적인 후원을 받으면서 왕성한 작품 활동도 할 수 있었다. 왕과 교황의 미묘한 신경전 사이에서 누구도 불쾌하지 않게 현명한 처신을 한 베르니니도 있다. 홀라르의 사례로 보듯 예술가의 외교활동은 정치적으로 왕과 귀족에 가깝게 접근하면서 훌륭한 예술자문이 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흔히 전쟁은 이동의 자유를 위협한다고만 생각하지만 기회가 되기도 한다. 루벤스나 벨리니, 홀라르의 여행은 전쟁 시기와 맞물려 있다.

 

 

오리엔탈리즘이라 비판할 사례들도 있지만, 동방문화 탐방을 통해 이질적인 문화를 습득하면서 서유럽의 미술을 더욱 풍부하게 한 화가들도 있다. 술탄 사망 후 오스만과 벨리니 모두 체류의 증거를 없애려 했을 만큼 위험한 동거였지만, 술탄의 부름을 받고 그의 밑에서 일하며 오스만 문화와 미니아튀르 회화를 접한 벨리니는 독특한 화풍을 구축할 수 있었다. 이탈리아와 그리스에 큰 관심을 보이며 살아 있는 고대를 체험하고 싶었던 들라크루아는 아프리카로 눈을 돌려 알제리와 모로코 여행을 통해 자신의 이상과 판타지를 한껏 탐구했다. 이국과 그 문화에 대한 화가들의 호기심은 에크하우스·메리안·호지스·고갱·놀데처럼 대륙을 뛰어넘어 남태평양이나 남미로 떠나는 것으로 발전한다.

 

 

<예술가의 여행>을 읽으면 읽을수록 인류 역사에 있어 화가의 기여에 놀라게 된다. 화가는 신분은 높지 않지만 직업적 특성 때문에 여러모로 특수한 계층이었다. 화가는 산업과 과학기술 발전에도 큰 역할을 했다. 사진이 없던 시절, 화가는 없어선 안 될 중요한 기록가였다. 그래서 각종 탐사에 참여 했고 식견이 상당했던 인물도 많다. 싱켈과 호지스는 유럽에 새로운 인종들의 모습을 그려 전했고, 메리안은 곤충 그림을 그리다가 당시 과학자들보다 곤충에 대해 훨씬 정확하게 알았다. 인류가 남극을 발견하는 순간에도 화가가 있었다(호지스). 누구도 생각지 못한 제안을 하면서 독일에 근대적 박물관이 생기는데 기여했던 싱켈은 영국의 공장 건물을 스케치하며 새 시대의 꿈을 꿨다.

 

 

여성 문제에 있어 미술이 다른 분야에 비해 훨씬 진보적이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16세기 뒤러의 아내 아그네스가 미술상으로서 능력을 발휘했다면 17세기의 메리안은 직접 화가 활동을 한다. 미술가 집안에선 원한다면 딸도 미술을 배우고 관련 일을 하게 했기 때문이다. 식민지 개척 시대 설탕이 아닌 곤충을 찾는다고 조롱받았고 그녀의 그림책은 여자들의 자수 취미 관련으로 소비되었지만, 메리안은 수리남으로 떠나 화폭 가득 자신이 좋아하는 곤충들의 면면들을 담았다. 18세기의 카우프만의 사정은 더 낫다. 이탈리아에서 볼로냐와 피렌체의 미술아카데미 회원을 거쳐 영국 왕립 미술아카데미 창립 멤버가 된다. 10살 이상 어렸던 난네를이 피아노 잘 치는 소녀로 그쳤던 것과 달리, 카우프만은 자신이 가능한 최선의 상업적 성공을 이루고 화가로서 입지를 세운다.

 

 

글로벌 시대를 사는 우리들보다 훨씬 이동이 힘들었던 옛날 사람들이 더욱 글로벌하게 세계를 종횡무진하는 이야기를 보고 있노라니 자괴감이 확 치밀며 골이 난다. 0.5초 만에 역사에 남은 비범한 인물들의 얘기니까 그런다고 합리화해본다. 참고로 <예술가의 여행> 한국판엔 원서에 없는 것이 있다. 감수자인 카이스트 김소희 교수(미술사학 전공)가 각 부가 끝날 때마다 ‘김소희의 예술가 이야기’라는 추가 해설을 달아놓은 것이다. 짧은 글이지만 책에 실린 화가들을 좀 더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책의 맨 뒤에 ‘더 읽어보면 좋은 책’을 적어놓았긴 한데, 전부 독일어 원서라(번역된 책이 하나도 없는 걸까) 많은 독자들에게 도움이 될 것 같진 않다.

 

 

히사이시 조는 다양한 경험의 중요성에 대해 크게 환상을 품지 말라고 했다. 누구나 하는 경험은 인간의 폭을 넓혀주지 않는데, 남과 차별화되는 특별한 경험하기가 생각 이상 힘들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여행은 가장 쉽게 단시간에 경험의 양을 늘릴 수 있고 가장 쉽게 특별한 경험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이다. 평소의 일상과 공부를 통해 배우고 느끼지 못한 것들을 사소한 여행 한번에서 얻을 수 있고, 여행을 많이 할수록 시야나 사유가 넓고 깊어진다. <예술가의 여행>은 여행이 얼마나 다양한 의미가 있는지 알 수 있는 책이다. 또 결코 어려운 책은 아니지만 암묵지의 소중함을 뼈저리게 느끼게 하는, 아는 만큼 보이는 책이다. ‘화가의’ 여행을 다룬 ‘미술’서적이지만 읽으면서 여행 자체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한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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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개 원리 - 개정증보판
차동엽 지음 / 국일미디어(국일출판사)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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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개 원리-2012전면개정판]

5년을 다지고 다시 한국판 탈무드를 향하여

 

 

 

 

작년 이맘때쯤 <무지개 원리>를 읽었다. 출간된 지 4년, 이미 100만부 넘게 팔린 시점이었으니 뒤늦게 독자에 합세한 셈이다. 초판과 스마트버전, 명사편을 읽었는데 스마트버전은 초판을 판형을 달리하고 좀 더 예쁘게 편집한 것일 뿐 같은 내용이라 지인에게 선물하였다. 내 책도 아니면서 말이다. 평소 누가 책을 갖고 싶다고 하면 스스럼없이 주는 편이긴 하지만, 특히 <무지개 원리>는 책을 읽고 난 후 남과 나누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했다. 왜 그랬는지 그것도 무지개 원리를 실천하는 한 방법이라고 말이다. 뒤늦게 책 주인인 어머니께 양해를 구하며, 이러한 얘기를 꺼냈더니 어머니께서도 흔쾌히 수긍하시며 잘했다고 하셨다. 하지만 잠깐 후회하기도 했다. 초판이 잦은 대여와 책 주인의 행태 영향으로 잔뜩 낡아 만지기 조심스러운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난 달 말 출간 5년 차를 맞아 <무지개 원리-전면개정판>이 나온다는 소식을 듣고 반가웠다. 그리고 어버이날을 핑계로 어머니께 깜짝 택배를 보냈다. 그런데 차 신부님의 팬인 어머니의 반응이 생각만큼 좋지는 않았다. 읽은 책인데 <잊혀진 질문>이나 <땡큐 365> 같은 걸 사오지 그랬냐면서 단순히 편하게 읽을 수 있는 튼튼한 책이 새로 생긴 정도로만 여기는 눈치였다. 하지만 새 책을 읽으면서 그런 소리가 쏙 들어갔다. 아마 다른 많은 독자들도 이런 반응이지 않을까란 생각을 했다. 보통 개정판이라고 하면 판형과 디자인을 바꾸고 새로운 장들을 추가하는 정도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번 <무지개 원리-전면개정판>은 흔치 않은 전면개정판다운 책이다. 당장 목차만 봐도 가늠해볼 수 있는데, 구판과 대조할 엄두가 안 날만큼 구성 자체를 완전히 뒤집으며 기존 내용과 증보 내용을 어울렀다.

 

 

 

 

<무지개 원리>는 상당히 고무적인 책이었다. 첫째는 주로 미국과 일본 번역 책 위주인 자기계발서 시장에서 토종 자기계발서로 150만부 넘게 판매하며 우리 자기계발서 시장에 가능성을 열었다는 점이다. 다른 하나는 종교인이 썼고 사목적 성격이 강한 자기계발서가 종교를 초월하여 일반 대중들에게 두루두루 지지를 얻었다는 점이다. 기독교에선 성소공동체를 강조한다. 종교 부흥을 위해 교인을 관리하고 함께 신앙을 나누며 믿음을 발전시키려는 이유도 있지만, 자살·우울증·왕따 등 점점 사회문제가 증가하는 세태에 대응하여 종교의 기여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옥간다, 파면이다 등 무조건적 교리 강요와 협박이 아니라 체계적인 상담·치료·안식 프로그램을 진행하거나 책을 출간하면서 함께 문제를 풀어가는 것이 요즘의 기독교 추세다. <무지개 원리> 역시 다분히 그런 성격이 강한 책이다.

 

 

 

 

하지만 논의의 기초를 유대교에서 가져온다는 점이나 하는 일마다 잘되고 스스로 팔자를 고친다는 등의 한국인을 혹하게 하는 주제들이 기존의 외국 자기계발서와 종교계 자기계발서와 차별되고 생각보다 거부감이 적은 이유인 듯싶다. 그러나 5년이 지났고 그만큼 세상도 변했다. 우리나라 자기계발서 시장이 급격히 커진 계기가 IMF 구제금융 때문이라 한다. 지난 15년간 공부 안하면 죽고, 돈 많이 벌어 성공해야 하고, 희망을 버려서는 안 되고 하는 등의 이데올로기가 우리를 짓눌렀고 우리 역시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처세다 치유다 자기계발이다 하며 열광했다. 그에 대한 허무감과 저항감의 발로로 인문학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경제경영서나 자기계발서도 인문학과 접목하며 진화하였다. 기독교 정신에 입각해 미국이 주도했던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긍정론이 도전 받고 있다.  

 

 

 

 

그런 점에서 여러모로 <무지개 원리-전면개정판>은 영리한 기획이라고 생각한다. 본문에 새롭게 삽입된 에피소드들의 상당수가 최신이고 구판의 내용을 다시 정리하고 공고히 한다. '셰마 이스라엘'에서 출발하고 7가지 원리라는 사실은 변함없지만 종교적 색채는 더욱 줄이고 일상적인 측면을 강화한다. 저자가 짚는 무지개 원리의 포인트는 3원리와 4원리고, 기존의 자기계발서와 <무지개 원리>의 차별점을 서술해놓았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느낀 이 책의 차별점은 6원리와 7원리의 실천 강조에 있다고 생각한다. 저자도 그런 점을 의식하기에 누구나 만사형통할 수 있지만 실천하지 않는 사람에겐 해당하지 않는다는 얘기들을 전면개정판에 추가하지 않았을까. 행동하지 않으면 변화가 없다. 자기계발을 동반하지 않는 자기계발서 독서는 그저 잠깐 자극을 주고 휘발되는 책뽕(마약)일 뿐이다.

 

 

 

 

‘무지개 원리’는 지키기 힘든 거창한 이상도, 혜성처럼 등장한 새로운 이야기도 아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미 ‘무지개 원리’가 내재하고 있다. 다만 의식하지 못할 뿐이다. <무지개 원리>는 조력자 역할이다. 유대인들이 ‘셰마 이스라엘’을 입 밖으로 계속 외는 이유는 자각하고 기억하기 위해서다. 한편 <무지개 원리>의 궁극적인 지향점은 한국판 탈무드가 되는 것이란 점에서 이번 전면개정판 역시 과제가 남는다. 이번 책은 변화하는 세태에 맞춰 시사성 있게 내용을 보완하고 전체 내용을 다진다는 의의는 있다. 하지만 탈무드가 수천 년을 내려오며 어느 시대 어느 사람에게나 통하듯 <무지개 원리> 역시 그런 책이 되려면 굳이 개정할 필요가 없는 탈 시대적인 예시와 서술들로 채워져야 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5년 만에 나온 <무지개 원리-전면 개정판>은 앞으로의 도약을 향한 디딤돌 역할이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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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항 2 버지니아 울프 전집 18
버지니아 울프 지음, 진명희 옮김 / 솔출판사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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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항1,2] 나비, 바다를 딛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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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심을 모르는 나비는 바다가 무섭지 않다. 스물넷 아가씨 레이첼에게 산타마리나행 출항은 전아가 뒤흔들리는 충격이었다. 가정교사에게 수업 받고, 자수나 피아노 연주 같은 취미를 갖고, 가끔 집 근처를 산책하는 등 조신하게 자라다가 결혼하는 것이 당대 귀족 딸들의 삶이었다. 딱히 교우도 없는데다 아버지와 고모들의 과보호 속에 자란 레이첼은 더욱 세상과 사람에 무지하였다. <출항>은 버지니아 울프의 첫 장편소설로, 주인공 레이첼에게 자신을 많이 투영했다. 10번을 넘게 고치며 무려 11년에 걸쳐 완성한 <출항>, 처음 쓸 때 레이첼 또래였고 역시 미혼이었던 작가는 30대의 주부가 되어서야 레이첼을 놓을 수 있었다. 레이첼을 통해 그녀는 어떤 꿈과 생각을 담았던 걸까.

 

 

울프의 문학적 관심은 인간 내면 심리와 육체적 고통, 새로운 시도, 여성 해방 등이었다. 그러나 재밌게도 울프는 작정한 이 역작을 가장 트렌디한-당시 유행하던 가정/연애/여행 소설-방법으로 풀어간다. 데뷔작부터 대놓고 파격이 아니라 기성 문학의 틀 안에 본의를 삽입하며 은근한 변형을 꾀하는 전략적 타협을 한 것이다. 순진무구한 귀족 아가씨의 해외여행과 로맨스,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에 엘리트와 보헤미안이 한꺼번에 덤비는 삼각관계까지 <출항>의 외형은 완벽한 연애소설이다. 하지만 전개 과정과 결말 처리, 세밀한 레이첼의 심리 묘사, 레이첼과 환경(주변 인물) 간의 대비를 통해 작은 혁명을 도모한다. 그래서 <출항>은 연애소설이면서 성장·계몽소설이기도 하다.

 

 

<출항>의 배경이면서 울프 문학 세계의 기저인 빅토리아 시대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울프는 양 대전이 관통하는 시기에 작품 활동했던 현대 작가이다. 하지만 스무 해 가까이 빅토리아 시대를 경험했고, 시대의 흔적은 꽤 오랫동안 남아 있었다. 앞서 말한 <출간> 당시 문학 트렌드는 빅토리아 시대 문학의 여전한 유행이었다. 빅토리아 시대는 영국 제국주의 시대의 최전성기였다. 그러나 가장 풍요롭고 근대에서 현대로 넘어가는 이 시대가 아이러니하게 영국 역사상 가장 보수적이고 여권은 퇴보했던 시절이다. 활동은 더 제한되고 부인으로서 역할에 충실하며 수동적인 존재로 살아간다. 남성 작가로 위장해야 <제인 에어>나 <워더링 하이츠> 같은 ‘위험한’ 작품을 발표할 수 있었던 시대, 수많은 여성들이 자살했다.

 

 

열세 살부터 죽을 때까지 울프를 괴롭혔던 정신병, 발병 계기는 어머니의 죽음 때문이지만 여섯 살부터 성인이 될 때까지 가족사가 깊은 트라우마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시기는 후기 빅토리아 시대와 일치한다. 울프에게 빅토리아 시대는 온 몸에 새겨진 모순과 고통의 기억이고 문제의식의 시작이었다. 작가로서 커리어의 시작인 <출항> 집필에 들어가는 때가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인 것은 과연 우연일까. 윌로우비에서 체일리까지 <출항> 속 수많은 등장인물들은 각각 시대의 편린들을 담고 있다. 인물의 관념성이 강하기 때문에, 레이첼을 제외한 나머지 인물들은 레이첼의 단계별 게임 퀘스트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출항>은 무밭을 찾아 바다를 딛는 나비의 날갯짓 같은 소설이다.

 

 

서평으로 문예 활동을 시작했던 울프는 20대 초반에 이미 독서 편력이 상당한 상태였다. 170여 개의 역자 각주의 대부분이 책 얘기일 정도로, <출항>에서 울프는 책들의 나열을 통해 자신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예를 들어, 울프 문학의 지향점과 대척점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 있다. 레이첼은 여자이기 때문에 고등 지식은 배울 수 없다. 독서도 소설책이나 사교생활에 지장 없는 정도의 교양을 쌓을 수 있는 정도면 충분하다. 그랬던 그녀에게 큰 영향을 미치고 그녀가 내적 고민을 하는 계기가 되는 책은 입센의 희곡들(정신적 각성)과 기번의 로마제국쇠망사(지적 성숙)다. 그러나 주변인물들이 그녀에게 권하는 책은 제인오스틴, 이유는 ‘남자처럼 글을 쓰지 않아 영국의 가장 위대한 여성 작가’이기 때문이다.

 

 

레이첼은 자신에 대해 성적 욕망을 드러내는 이성의 뻐꾸기를 전혀 눈치 채지 못한다. 리처드에게 기습 키스를 당하고 나서도 그 느낌이 어떤지 상대에 대한 감정이 어떤지 모르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생각들을 정리하고 벌벌거린다. 그래서 레이첼의 첫사랑이 더욱 특별하게 보인다. 산타마리나에서 레이첼은 두 남자를 만난다. 허스트는 스물넷에 집안 좋고 똑똑한 완벽남이고 그녀에게 기번을 알려주지만 당대 남성들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다. 반면 스물일곱에 700파운드의 연 수입으로 글 쓰며 지내는 소설가 지망생 휴잇은 자유분방하고 양성적인 독특한 인물인데 여권 등 여러 면에서 레이첼과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서로 끌린다.

 

 

그러나 환상적 동지가 되겠다 싶은 기대와 달리 레이첼과 휴잇의 사랑은 ‘무서움’, ‘고통’ 등의 단어로 표현된다. 그들의 관계와 연애는 대단히 기괴하고 특이하다. 두 남녀는 끔찍하게 사랑에 빠져 있으면서 도망치려 하고, 끊임없이 생각을 나누고 스스로 고민하며 확인과 혼란을 반복한다. 조력자(헬렌)의 도움과 스스로의 노력으로 각성하는 봉건 여성 레이첼은 이 단계부터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한다. 그리고 그 한계는 결말을 통해(자기의지는 아니지만) 더욱 분명해진다. 물결에 전 나비는 지치고 시리다. <출항>의 결말은 울프가 고집했던 것이긴 하지만, 그래서 더 현실성 있고 여운이 있지만, 울프도 레이첼도 이 여자들은 왜 이렇게 아플까 일호 부아가 난다(현실의 울프는 공교롭게도-작품 때문은 아님- <출항> 집필 전후 모두 자살을 기도한다).

 

 

울프 문학을 3기로 나눴을 때 초기와 말기는 기존의 전통적 소설 특성이 강하고 문학성으로도 대표작에 비해 저평가 받는다. 그런 점에서 <출항>은 울프 소설 중 가장 쉽게 읽을 수 있는 작품이다. 물론 의식의 흐름 등 울프 특유의 문체와 기법이 <출항>에서 엿볼 수 있지만 개성이 강하지 않고 구성과 전개도 평이하다. 다른 울프 소설처럼 <출항> 역시 작품의 매력은 문장에 있다. <출항>의 스토리텔링과 인물 설정은 너무나 전형적이고 단순하다(비슷한 장르를 썼던 앞선 시대 작가들의 작품보다 퇴보한다). 번역은 역자가 울프 전공자답게 크게 거부감 없으면서 영어와 울프 문체의 특성과 늬앙스를 잘 살린 편이다. 문장 감상에 더욱 주력하도록 돕기 위함일까, 솔은 친절하게 책 뒤에 등장인물을 전부 정리해(때문에 스포일러 피해가 있지만) 독자의 수고를 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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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항 1 버지니아 울프 전집 17
버지니아 울프 지음, 진명희 옮김 / 솔출판사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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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항1,2] 나비, 바다를 딛다

 

 

 

 

 

 http://der_insel.blog.me/120160562721

 

수심을 모르는 나비는 바다가 무섭지 않다. 스물넷 아가씨 레이첼에게 산타마리나행 출항은 전아가 뒤흔들리는 충격이었다. 가정교사에게 수업 받고, 자수나 피아노 연주 같은 취미를 갖고, 가끔 집 근처를 산책하는 등 조신하게 자라다가 결혼하는 것이 당대 귀족 딸들의 삶이었다. 딱히 교우도 없는데다 아버지와 고모들의 과보호 속에 자란 레이첼은 더욱 세상과 사람에 무지하였다. <출항>은 버지니아 울프의 첫 장편소설로, 주인공 레이첼에게 자신을 많이 투영했다. 10번을 넘게 고치며 무려 11년에 걸쳐 완성한 <출항>, 처음 쓸 때 레이첼 또래였고 역시 미혼이었던 작가는 30대의 주부가 되어서야 레이첼을 놓을 수 있었다. 레이첼을 통해 그녀는 어떤 꿈과 생각을 담았던 걸까.

 

 

울프의 문학적 관심은 인간 내면 심리와 육체적 고통, 새로운 시도, 여성 해방 등이었다. 그러나 재밌게도 울프는 작정한 이 역작을 가장 트렌디한-당시 유행하던 가정/연애/여행 소설-방법으로 풀어간다. 데뷔작부터 대놓고 파격이 아니라 기성 문학의 틀 안에 본의를 삽입하며 은근한 변형을 꾀하는 전략적 타협을 한 것이다. 순진무구한 귀족 아가씨의 해외여행과 로맨스,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에 엘리트와 보헤미안이 한꺼번에 덤비는 삼각관계까지 <출항>의 외형은 완벽한 연애소설이다. 하지만 전개 과정과 결말 처리, 세밀한 레이첼의 심리 묘사, 레이첼과 환경(주변 인물) 간의 대비를 통해 작은 혁명을 도모한다. 그래서 <출항>은 연애소설이면서 성장·계몽소설이기도 하다.

 

 

<출항>의 배경이면서 울프 문학 세계의 기저인 빅토리아 시대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울프는 양 대전이 관통하는 시기에 작품 활동했던 현대 작가이다. 하지만 스무 해 가까이 빅토리아 시대를 경험했고, 시대의 흔적은 꽤 오랫동안 남아 있었다. 앞서 말한 <출간> 당시 문학 트렌드는 빅토리아 시대 문학의 여전한 유행이었다. 빅토리아 시대는 영국 제국주의 시대의 최전성기였다. 그러나 가장 풍요롭고 근대에서 현대로 넘어가는 이 시대가 아이러니하게 영국 역사상 가장 보수적이고 여권은 퇴보했던 시절이다. 활동은 더 제한되고 부인으로서 역할에 충실하며 수동적인 존재로 살아간다. 남성 작가로 위장해야 <제인 에어>나 <워더링 하이츠> 같은 ‘위험한’ 작품을 발표할 수 있었던 시대, 수많은 여성들이 자살했다.

 

 

열세 살부터 죽을 때까지 울프를 괴롭혔던 정신병, 발병 계기는 어머니의 죽음 때문이지만 여섯 살부터 성인이 될 때까지 가족사가 깊은 트라우마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시기는 후기 빅토리아 시대와 일치한다. 울프에게 빅토리아 시대는 온 몸에 새겨진 모순과 고통의 기억이고 문제의식의 시작이었다. 작가로서 커리어의 시작인 <출항> 집필에 들어가는 때가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인 것은 과연 우연일까. 윌로우비에서 체일리까지 <출항> 속 수많은 등장인물들은 각각 시대의 편린들을 담고 있다. 인물의 관념성이 강하기 때문에, 레이첼을 제외한 나머지 인물들은 레이첼의 단계별 게임 퀘스트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출항>은 무밭을 찾아 바다를 딛는 나비의 날갯짓 같은 소설이다.

 

 

서평으로 문예 활동을 시작했던 울프는 20대 초반에 이미 독서 편력이 상당한 상태였다. 170여 개의 역자 각주의 대부분이 책 얘기일 정도로, <출항>에서 울프는 책들의 나열을 통해 자신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예를 들어, 울프 문학의 지향점과 대척점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 있다. 레이첼은 여자이기 때문에 고등 지식은 배울 수 없다. 독서도 소설책이나 사교생활에 지장 없는 정도의 교양을 쌓을 수 있는 정도면 충분하다. 그랬던 그녀에게 큰 영향을 미치고 그녀가 내적 고민을 하는 계기가 되는 책은 입센의 희곡들(정신적 각성)과 기번의 로마제국쇠망사(지적 성숙)다. 그러나 주변인물들이 그녀에게 권하는 책은 제인오스틴, 이유는 ‘남자처럼 글을 쓰지 않아 영국의 가장 위대한 여성 작가’이기 때문이다.

 

 

레이첼은 자신에 대해 성적 욕망을 드러내는 이성의 뻐꾸기를 전혀 눈치 채지 못한다. 리처드에게 기습 키스를 당하고 나서도 그 느낌이 어떤지 상대에 대한 감정이 어떤지 모르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생각들을 정리하고 벌벌거린다. 그래서 레이첼의 첫사랑이 더욱 특별하게 보인다. 산타마리나에서 레이첼은 두 남자를 만난다. 허스트는 스물넷에 집안 좋고 똑똑한 완벽남이고 그녀에게 기번을 알려주지만 당대 남성들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다. 반면 스물일곱에 700파운드의 연 수입으로 글 쓰며 지내는 소설가 지망생 휴잇은 자유분방하고 양성적인 독특한 인물인데 여권 등 여러 면에서 레이첼과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서로 끌린다.

 

 

그러나 환상적 동지가 되겠다 싶은 기대와 달리 레이첼과 휴잇의 사랑은 ‘무서움’, ‘고통’ 등의 단어로 표현된다. 그들의 관계와 연애는 대단히 기괴하고 특이하다. 두 남녀는 끔찍하게 사랑에 빠져 있으면서 도망치려 하고, 끊임없이 생각을 나누고 스스로 고민하며 확인과 혼란을 반복한다. 조력자(헬렌)의 도움과 스스로의 노력으로 각성하는 봉건 여성 레이첼은 이 단계부터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한다. 그리고 그 한계는 결말을 통해(자기의지는 아니지만) 더욱 분명해진다. 물결에 전 나비는 지치고 시리다. <출항>의 결말은 울프가 고집했던 것이긴 하지만, 그래서 더 현실성 있고 여운이 있지만, 울프도 레이첼도 이 여자들은 왜 이렇게 아플까 일호 부아가 난다(현실의 울프는 공교롭게도-작품 때문은 아님- <출항> 집필 전후 모두 자살을 기도한다).

 

 

울프 문학을 3기로 나눴을 때 초기와 말기는 기존의 전통적 소설 특성이 강하고 문학성으로도 대표작에 비해 저평가 받는다. 그런 점에서 <출항>은 울프 소설 중 가장 쉽게 읽을 수 있는 작품이다. 물론 의식의 흐름 등 울프 특유의 문체와 기법이 <출항>에서 엿볼 수 있지만 개성이 강하지 않고 구성과 전개도 평이하다. 다른 울프 소설처럼 <출항> 역시 작품의 매력은 문장에 있다. <출항>의 스토리텔링과 인물 설정은 너무나 전형적이고 단순하다(비슷한 장르를 썼던 앞선 시대 작가들의 작품보다 퇴보한다). 번역은 역자가 울프 전공자답게 크게 거부감 없으면서 영어와 울프 문체의 특성과 늬앙스를 잘 살린 편이다. 문장 감상에 더욱 주력하도록 돕기 위함일까, 솔은 친절하게 책 뒤에 등장인물을 전부 정리해(때문에 스포일러 피해가 있지만) 독자의 수고를 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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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영을 위하여 - 우리 인문학의 자긍심
강신주 지음 / 천년의상상 / 2012년 4월
평점 :
절판


[김수영을 위하여]

너와 나를 위한 김수영 ; 자유정신과 자기다움

 

http://der_insel.blog.me/120160369424

 

 

 

 

이 책의 프롤로그가 마뜩지 않았다. 작년, 저자는 한 대학에서의 강연에서 김수영의 시 <김일성 만세>를 읽었다. 그리고 청중들 대부분의 표정에서 불쾌감을 읽었고 이는 반세기가 지난 지금도 우리가 레드 콤플렉스에서 벗어나지 못한 반증이라 해석하였다. 너무나 간명하게 인과 관계를 단정하는 이 ‘철학자’의 명쾌함이 조금은 놀라웠다. 물론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고, 논의의 편의를 위해 단순화시킨 문장은 비일비재하다. 그러나 저 대목은 (책 전체를 지배하는) 이 책의 얼굴이자 미래였다. 이 에피소드는 책을 시작하는 ‘문제의식’이고, 전개 내내 놓지 않는 ‘기제’이며, 앞으로 반복할 ‘행동’이다. 결국 어떤 책보다 자유를 강조하고 김수영을 바로 보겠다는 책이지만, 이 책 속에서 편협하다고 비판하는 (김수영에 대한) 평론들과 마찬가지로 ‘저자의 프레임’에 입각한 또 다른 김수영 론이라는 한계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프롤로그는 또한 독자로서의 한계를 인지하게 했다. 독자 역시 자신의 프레임으로 대상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자유롭게 자유를 쓰고 읽지만 자유로우면서 자유롭지 않다. 김수영을 만나기 위한 첫번째 각성은 서러운 모순이었다. 

 

 

 

시를 이해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배경지식이 있어야 할까. 늘 시를 가슴으로 읽어오다가 문득 궁금해졌다. 시인의 삶과 철학을 알면 좀 더 그의 시를 잘 읽을 수 있을까하고 말이다. 자신 있게 경애를 말하기 위해 시인에게 최소한의 예의를 갖추고 싶기도 했다. 이런 마음을 한번쯤 품었던 독자라면, 김수영의 전 생애와 그의 작품들이 씨줄과 날줄로 얽혀 서술되어 있고 부록으로 작품집이 달려 있는 <김수영을 위하여>가 무척 당길 것이다. 또한 인문학 강연 수강이 영원한 노스탤지어의 사치인 이들의 마음을 달래주는 책이다. <김수영을 위하여>는 저자가 홍대 상상마당에서 김수영을 주제로 2시간 반씩 10회 강의했던 것을 강의 원고와 녹취록을 정리하여 책 한 권으로 묶은 것이다. 부록까지 500여 페이지 남짓의 책으로 유명 철학자가 한 1500분의 강의내용을 단숨에 읽을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짜릿하다. 한편 이 책은 편집자를 부각시킨 것이 특이하다. 저자와 나란히 지은이와 만든이로 표기된 것만큼 책 속에서 저자와 완전히 대등한 비중으로 목소리를 내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본 책의 노랑 섹션과 부록 전체만큼은 저자 강신주의 책이 아니라 편집자 김서연의 책이란 생각이 든다.

 

 

저자는 <김수영을 위하여>를 통해 김수영이 죽은 지 반세기가 넘도록 그의 인문정신에 도달하지 못한 우리 사회의 정신적 결핍과 병폐를 꼬집는다. 그리고 김수영스러움의 본질을 ‘자유’로 정의하며, 있는 그대로의 김수영을 읽으려고 한다. 우리가 김수영하면 0.1초 만에 떠올리는 <풀>은 그의 마지막 시였다. 예상치 못한 교통사고로 비명횡사했다. 처녀시를 부정했고 진정한 처녀시를 고민했다. 3개 국어를 능숙하게 했고, 연극을 하다가 시로 전향했지만 시·산문·평론·번역을 종횡무진하였다. 일제 강점기와 전쟁, 분단과 독재 등 질곡의 근현대사를 체험한 산증인 세대 중에서도 포로수용소 생활 등 극단적인 경험을 하였다. 개성은 그대로나 작품 세계가 상당히 다채롭다. (…) 저자는 독자가 그의 해설과 편집으로 나열되고 조합되는 김수영과 김수영스러움을 담뿍 빠져 즐기고 있을 때, 이 책이 철학자가 철학적 관점으로 썼다는 점을 주지시켜주는 것도 잊지 않는다. 벤야민과 들뢰즈, 바르트와 칸트 등 수많은 철학자들을 인용하고, 저자 스스로의 해석도 제시하면서 독자의 사유와 감상이 더욱 풍부해지도록 돕는다. 김수영은 자유에 ‘이만하면’이란 수사는 붙을 수 없다고 했다. 자유정신은 결핍의 자각에서 출발한다. 온 몸으로 하는 자신다움에의 투쟁, 책을 읽는 내내 생각했던 부분이다.

 

 

첫발부터 채인 당황스러움에 내내 긴장과 의문으로 독서해야 했다. 김수영은 허울일 뿐 강신주를 위함이 더 도드라지진 않을지, 이 논의의 귀결(우리가 부족한 김수영의 인문정신-자유정신-의 본질)이 어떻게 될지 말이다. 저자가 모더니티나 민족주의, 참여시인 등 어느 한 면에 초점을 맞추어 김수영을 평가하는 평론가들을 비판했듯이 김수영을 관통하는 것은 자유와 자기다움 그 자체다. 1960년대의 김수영이 남과 북 모두를 비판했고 당시 사회의 크고 작은 불위들에 쓴소리를 했다. 또한 우리가 김수영의 정신에 도달하지 못한 것엔 개인의 자세적 측면 뿐만 아니라 김수영이 50여 년 전 고민하고 비판했던 패악과 악습이 여전히 존재한다는 것도 포함된다. 김수영이 그랬듯 이념과 이해, 제도 등을 떠나 언제나 자유를 위협하는 부당함을 예민하게 알아채고 그에 맞서 싸울 수 있으며 자기다움을 위한 투쟁을 쉬지 않는 정신이 우리에게 필요하다. 예상과 달리 일반론적이고 온건한 전개였고, 저자와 만든이와 대상이 평화롭게 공존하며 제목처럼 김수영을 위함에 충실했다. (은근히 기대했던) 태풍 같은 충격과 각성이 더 없었던 것은 조금 아쉬웠다. 하지만 내내 있던 (뭔지 모를) 불편함과 체증을 일소하는 에필로그 덕분에 마음이 참 다습고 개운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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