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영을 위하여 - 우리 인문학의 자긍심
강신주 지음 / 천년의상상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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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김수영을 위하여]

너와 나를 위한 김수영 ; 자유정신과 자기다움

 

http://der_insel.blog.me/120160369424

 

 

 

 

이 책의 프롤로그가 마뜩지 않았다. 작년, 저자는 한 대학에서의 강연에서 김수영의 시 <김일성 만세>를 읽었다. 그리고 청중들 대부분의 표정에서 불쾌감을 읽었고 이는 반세기가 지난 지금도 우리가 레드 콤플렉스에서 벗어나지 못한 반증이라 해석하였다. 너무나 간명하게 인과 관계를 단정하는 이 ‘철학자’의 명쾌함이 조금은 놀라웠다. 물론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고, 논의의 편의를 위해 단순화시킨 문장은 비일비재하다. 그러나 저 대목은 (책 전체를 지배하는) 이 책의 얼굴이자 미래였다. 이 에피소드는 책을 시작하는 ‘문제의식’이고, 전개 내내 놓지 않는 ‘기제’이며, 앞으로 반복할 ‘행동’이다. 결국 어떤 책보다 자유를 강조하고 김수영을 바로 보겠다는 책이지만, 이 책 속에서 편협하다고 비판하는 (김수영에 대한) 평론들과 마찬가지로 ‘저자의 프레임’에 입각한 또 다른 김수영 론이라는 한계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프롤로그는 또한 독자로서의 한계를 인지하게 했다. 독자 역시 자신의 프레임으로 대상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자유롭게 자유를 쓰고 읽지만 자유로우면서 자유롭지 않다. 김수영을 만나기 위한 첫번째 각성은 서러운 모순이었다. 

 

 

 

시를 이해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배경지식이 있어야 할까. 늘 시를 가슴으로 읽어오다가 문득 궁금해졌다. 시인의 삶과 철학을 알면 좀 더 그의 시를 잘 읽을 수 있을까하고 말이다. 자신 있게 경애를 말하기 위해 시인에게 최소한의 예의를 갖추고 싶기도 했다. 이런 마음을 한번쯤 품었던 독자라면, 김수영의 전 생애와 그의 작품들이 씨줄과 날줄로 얽혀 서술되어 있고 부록으로 작품집이 달려 있는 <김수영을 위하여>가 무척 당길 것이다. 또한 인문학 강연 수강이 영원한 노스탤지어의 사치인 이들의 마음을 달래주는 책이다. <김수영을 위하여>는 저자가 홍대 상상마당에서 김수영을 주제로 2시간 반씩 10회 강의했던 것을 강의 원고와 녹취록을 정리하여 책 한 권으로 묶은 것이다. 부록까지 500여 페이지 남짓의 책으로 유명 철학자가 한 1500분의 강의내용을 단숨에 읽을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짜릿하다. 한편 이 책은 편집자를 부각시킨 것이 특이하다. 저자와 나란히 지은이와 만든이로 표기된 것만큼 책 속에서 저자와 완전히 대등한 비중으로 목소리를 내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본 책의 노랑 섹션과 부록 전체만큼은 저자 강신주의 책이 아니라 편집자 김서연의 책이란 생각이 든다.

 

 

저자는 <김수영을 위하여>를 통해 김수영이 죽은 지 반세기가 넘도록 그의 인문정신에 도달하지 못한 우리 사회의 정신적 결핍과 병폐를 꼬집는다. 그리고 김수영스러움의 본질을 ‘자유’로 정의하며, 있는 그대로의 김수영을 읽으려고 한다. 우리가 김수영하면 0.1초 만에 떠올리는 <풀>은 그의 마지막 시였다. 예상치 못한 교통사고로 비명횡사했다. 처녀시를 부정했고 진정한 처녀시를 고민했다. 3개 국어를 능숙하게 했고, 연극을 하다가 시로 전향했지만 시·산문·평론·번역을 종횡무진하였다. 일제 강점기와 전쟁, 분단과 독재 등 질곡의 근현대사를 체험한 산증인 세대 중에서도 포로수용소 생활 등 극단적인 경험을 하였다. 개성은 그대로나 작품 세계가 상당히 다채롭다. (…) 저자는 독자가 그의 해설과 편집으로 나열되고 조합되는 김수영과 김수영스러움을 담뿍 빠져 즐기고 있을 때, 이 책이 철학자가 철학적 관점으로 썼다는 점을 주지시켜주는 것도 잊지 않는다. 벤야민과 들뢰즈, 바르트와 칸트 등 수많은 철학자들을 인용하고, 저자 스스로의 해석도 제시하면서 독자의 사유와 감상이 더욱 풍부해지도록 돕는다. 김수영은 자유에 ‘이만하면’이란 수사는 붙을 수 없다고 했다. 자유정신은 결핍의 자각에서 출발한다. 온 몸으로 하는 자신다움에의 투쟁, 책을 읽는 내내 생각했던 부분이다.

 

 

첫발부터 채인 당황스러움에 내내 긴장과 의문으로 독서해야 했다. 김수영은 허울일 뿐 강신주를 위함이 더 도드라지진 않을지, 이 논의의 귀결(우리가 부족한 김수영의 인문정신-자유정신-의 본질)이 어떻게 될지 말이다. 저자가 모더니티나 민족주의, 참여시인 등 어느 한 면에 초점을 맞추어 김수영을 평가하는 평론가들을 비판했듯이 김수영을 관통하는 것은 자유와 자기다움 그 자체다. 1960년대의 김수영이 남과 북 모두를 비판했고 당시 사회의 크고 작은 불위들에 쓴소리를 했다. 또한 우리가 김수영의 정신에 도달하지 못한 것엔 개인의 자세적 측면 뿐만 아니라 김수영이 50여 년 전 고민하고 비판했던 패악과 악습이 여전히 존재한다는 것도 포함된다. 김수영이 그랬듯 이념과 이해, 제도 등을 떠나 언제나 자유를 위협하는 부당함을 예민하게 알아채고 그에 맞서 싸울 수 있으며 자기다움을 위한 투쟁을 쉬지 않는 정신이 우리에게 필요하다. 예상과 달리 일반론적이고 온건한 전개였고, 저자와 만든이와 대상이 평화롭게 공존하며 제목처럼 김수영을 위함에 충실했다. (은근히 기대했던) 태풍 같은 충격과 각성이 더 없었던 것은 조금 아쉬웠다. 하지만 내내 있던 (뭔지 모를) 불편함과 체증을 일소하는 에필로그 덕분에 마음이 참 다습고 개운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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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인 조르바 열린책들 세계문학 21
니코스 카잔차키스 지음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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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 <그리스인 조르바>를 구입하면 미니북을 증정하고 있다. 무려 만부나 제작했단다.

반양장이고 쪽수가 600쪽으로 늘어나는 것을 제외하면

표지와 구성(목차,서지사항 등)이 본책과 동일하다.

 

[그리스인 조르바] 자유가 무어냐고 묻는 이의 벗

 

 

 

*) 이 글은 서평보다 독서록에 가깝게 쓴 저열한 글이다. 그래서 서평자 자신을 이르는 '나'가 마구 튀어나온다. 그런데 <그리스인 조르바>의 화자 역시 '나'로 표기되기 때문에 혼란을 방지하고자 후자의 '나'는 '화자'라는 단어로 임의로 대체해서 쓰겠다.

 http://der_insel.blog.me/120159477423

 

 

따사로운 햇살 가득한 쨍쨍한 날씨, 슬슬 피부가 달아 짜증이 나려할 때 바다가 보내주었을지 모르는 바람에 반갑고 새파란 하늘을 보며 기분이 좋아진다. 수다쟁이 아낙들이 가져온 음식을 먹으며 그 왁자지껄한 골목의 일부가 되기도 하고, 나도 과부를 희롱하는 것 같고 서로 부둥킨 살내음이 느껴져 면구스럽다. 갈탄광에서 땀 흘리는 사내들과 어울려 호기롭게 웃기도 한다. 그렇게 크레타 섬의 건강한 일상에 한껏 동화되다가 정신을 차리면 더러는 얼굴 앞과 뒤로 누군가의 정수리내와 입김이 스멀대는 출퇴근길 지하철 안, 더러는 혼자 밥을 먹던 식당 안 혹은 방 안 책상이나 침대이다. 그리고 책장을 덮는 순간 다시 이번 달 대출상환금은 문제 없을까라든가 주말에 짝꿍이라 뭐할까라든가 하는 지극히 세속적이고 개인적인 고민들에 구속된다.

 

 

가장 최근에 자유에 대해 내린 결론은 단어로 치면 ‘죽음’이었고 이미지로 치면 최인훈의 <광장> 속 중립국으로 가는 배 안이었다(20대 초반이었다면 그에 피의 이미지와 정치적 이데올로기가 더해졌을 것이다. 자유를 위해, 자유의 이름으로 죽어나간 이들이 얼마나 많던가.). 살아있는 한 인간은 완벽하게 자유로울 수 없다. 인간의 자유의지는 언제나 제약 하 제한된 자유의지다. 가족, 생업, 학벌, 욕망, 건강수준 등 수많은 구속이 살아있는 우리를 옭아맨다. 이런 논리대로 절대자유가 죽음으로써만 가능하다 하더라도 그에 대한 동경심은 생기지 않는다. 구속이 황홀하다. 이들이 삶의 당위를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개인의 모든 인위적 행위는 무언가와 연결되어 있고 영향을 주고받는다. 지극히 개똥철학이지만 이러한 결론으로 삶의 자세도 바뀌었고, 자살에 대한 입장도 확실하게 정리하게 되었다. 벌써 몇 년 전 일이다.

 

 

자유의 문제는 파고들수록 형이상학적이기도 하거니와 당장의 일상에 치이고 배가 고플 땐 쉽게 떠올리기 힘들다. 그런 핑계로 나는 꽤 오랫동안 자유에 대해 특별히 생각해보지 않았다. 그러던 때에 이 책을 만났다.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는 내내 자유가 무엇일지에 대해 생각했다. 조르바의 존재는 ‘살아 있는 자유’ 그 자체, 그는 인간이 살아 있는 상태에서 취할 수 있는 최대의 자유를 보여준다. 카잔차키스의 분신이기도 한 작중 화자가 그와의 만남을 통해 크게 각성하듯 나 역시 조르바를 접하고 그의 행보 면면을 보면 볼수록 흥분하였다. 앞서 말한, 몇 년 전에서 갱신되지 않은 나의 자유관을 일거에 깨뜨리거나 확장시킬 수 있는 기회라 생각하며 본문에서 해설까지 480쪽의 페이지를 넘기는 이 시간을 즐겼다. 참 오랜만에 서아일체되어 치열하고 끊임없이 책과 문답하였다.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음식, 술, 여자와 춤)는 그의 건강하고 왕성한

몸에서 사라지거나 둔화되는 날이 없었다. -p.182

우리에게는 그토록 편리한, 자질구레한 덕성이 그에겐 없었다. 그에게 있는

것이라고는 만족을 모르는 극히 불쾌하고 위험한 덕성뿐이어서 이런 상태가 그를

극한과 지옥의 나락으로 끊임없이 충동질해 나가고 있는 것이었다. -pp.222-223

 

 

화자의 표현대로 조르바는 어떤 구속도 인지하지 않는 자유로운 영혼이다. 특별한 거처 없이 오만 동네를 떠돌며 숙식을 해결하고 누군가와 사랑에 빠지고 사람들을 사귄다. 65세지만 청년의 정력과 정신으로 노인의 육체를 초월한다. 그는 늙은 우리들에게 숨겨진 소년소녀를 깨울 줄 아는 사람이고, 죽은 영혼을 볼 수 있는 사람이다. 조르바의 시대와 그리스는 정치적 혼란기였고 전쟁이 관통한다. 그러나 <그리스인 조르바>에선 그런 것이 느껴지지 않는다. 현대 초의 어느 날이란 생각은 들지만 묘사되는 풍경들이나 조르바의 삶은 탈 시대적이다. 조르바의 현자성을 더욱 강조하고 이야기의 본질을 더욱 뚜렷하게 드러내기 위한 카잔차키스의 의도적 전략이었을까. 아무튼 그 자자한 명성이 이해되고, 참으로 유쾌하면서도 철학적인 소설이다. 하지만 이를 위험하게 받아들인 측도 있다. 금서에 오르기까진 않았지만 <그리스인 조르바> 역시 신성모독을 이유로 교황청과 정교회의 미움을 산다.

 

 

책상물림 글쟁이던 화자가 갈탄채취사업을 하러 크레타 섬에 가던 중 조르바라는 사람을 만나게 되고 훗날 그에 관한 책을 쓰는 것으로 마무리하는 <그리스인 조르바>의 내용처럼 조르바는 실존인물이고 카잔차키스는 조르바의 삶과 그를 직접 만나 겪었던 경험을 한 권의 책으로 박제했다. 카잔차키스가 34살에 갈탄채취 인부를 고용하려다 만나게 된 조르바, 그렇다고 그들이 소설 속의 화자와 조르바가 아니듯 실제의 카잔차키스와 조르바의 만남은 시대적 격동과 정치성에 노출된다. 카잔차키스는 호로메스, 니체, 베르그송과 함께 자신의 인생에 가장 깊은 영향을 끼친 인물로 조르바를 든다. 하지만 소설 속 조르바가 비범하지만 일반인인 것처럼 실제 조르바 역시 카잔차키스가 우연히 만난 기인일 뿐 널리 알려진 위인은 아니다. <그리스인 조르바>란 작품의 존재가, 그리고 현재 그의 딸이 생존해있고 카잔차키스 기념관에 조르바가 보낸 편지가 있다는 사실 정도가 그의 존재를 증명할 뿐이다.

 

 

하루키는 <노르웨이의 숲>의 등장인물 나가사와의 입을 통해 <위대한 개츠비>를 3번 읽는 사람이면 자신과 친구가 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리스인 조르바>의 마지막 장을 덮으며 내게 그런 작품이 있다면 이게 아닐까 생각했다. 이 책을 읽게 된 결정적 계기도 한 조르바 삼독론자의 얘기 때문이었다. 모 라디오 방송에 시인이자 달(문학동네 임프린트 중 하나)의 대표인 이병률이 출연한 적이 있는데 평생 한 권의 책만 볼 수 있다면 어떤 책을 고르겠냐는 질문에 언젠가 여행을 간 적이 있는데 배 위에서 이 책을 독서법을 달리하며 3번 읽었다면서 단 한권의 책만 읽을 수 있다면 <그리스인 조르바>를 선택하겠다는 그의 말이 참 솔깃했다. 그리고 일독 후 받은 느낌과 시간이 지나면서 다른 의미로 다가오거나 다시 찾게 하는 문장들 때문에 다시 읽기가 기대된다. 친구를 만나기 위해, 내 스스로가 더욱 이 작품을 깊이 이해하기 위해 이독삼독할 것이다. 그리고 믿는다. 조르바는 자유가 무어냐고 묻는 이에게 늘 기꺼이 찾아와 벗이 되어 줄 것이라고.

 

 

뒤늦게나마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은 것은 탁월한 선택이었고 행운이다. 그리스 현대문학을 접할 수 없는 우리에게, 카잔차키스가 있어서 그리고 열린책들 덕분에 영역본 중역인 건 아쉽지만 적어도 그의 작품은 전부 읽을 수 있어 다행이다. 해외에선 그를 철학자(사상가)로 보는 시각도 많다. 카잔차키스는 평생 소위 ‘3단계 투쟁’으로 명명되는, 영혼의 편력과 투쟁에 매진했다. 그 최종의 본질은 자유와 자기해방이었다. 종교를 넘나들고 온갖 곳을 여행하고 물질과 비물질 등 모순개념을 탐구한 흔적들을 문학으로 남겼다. <그리스인 조르바>는 그런 카잔차키스의 자유관과 문학성향을 가장 잘 나타내주는 작품이 아닐까 한다. 일독하는 내내 생각했던 자유, 결국 <그리스인 조르바>의 결말에서 상념들이 엉클어져 나의 마지막 자유관을 고치지 못했다. 하지만 미미한 성과일지언정 큰 울렁임과 수없는 고민들은 결코 무의미하다고 생각지 않는다. 이번엔 미처 찾고 깨닫지 못한 '조르바의 자유'에 대한 아쉬움을 달래며, 카잔차키스의 묘비명을 생각해본다.

 

 

Δεν ελπίζω τίποτα, δεν φοβούμαι τίποτα, είμαι λέφτερος.

(Den elpízo típota, den fovúmai típota, eímai eléftheros.)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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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과 바다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91
어니스트 헤밍웨이 지음, 이인규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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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밍웨이의 저작권 보호 기간이 끝나면서 주요 대형 출판사들이 일제히 헤밍웨이 작품 번역에 들어간 것에 낭비라고 못마땅한 독자도 있을 것이다. 그들의 자본력과 기획력으로 번역해줬으면 하는 국내 미소개 외국 문학 작품들이 차고 넘치기 때문이다. 특히 <노인과 바다>는 아무리 지금껏 정식 판권본이 없다고 해도 수십년 간 무수한 번역본이 쏟아져 나왔던 작품이기에 소식만 들어도 또 헤밍웨이야, 또 <노인과 바다>야라고 질리는 감도 없지 않다.

 

누구나 원전을 판권 확보 없이 마음껏 쓰게 되었다는 사실 때문에도 달콤한 유혹에 빠지지만, 자기 출판사만의 번역본을 가지고 싶다는 욕망 때문에도 작업을 선택하곤 한다. 그 번역본의 결과물이 타 출판사보다 양질이라면 금상첨화. 그리고 이미 번역본이 많은 유명 작품을 또 번역한다는 것은 대박은 커녕 레드오션 중 레드오션이지만 작품 자체의 명성 때문에 어떤 번역본이든 어느 정도 판매는 보장되기 때문에 은근히 안정적인 선택이기도 하다.

 

첫 문단에서 언급한 이유로 올해부터 나오는 <노인과 바다> 번역본들은 기존의 번역본이 많음에도 원점에서 출발하는 것과 비슷한 경쟁을 한다. 단기적으론 얼마나 빨리 출판했고 마케팅을 잘했는지 등이 관건이다. 그리고 독자(소비자)들에게 더 어필하기 위해 외형적인 스펙에 신경 쓴다(특히 후발주자일수록 불리하므로 더). 그러나 장기적으로 봤을 땐 얼마나 본문의 번역이 오역 없이 잘 되어 있는지가 승자의 관건이 될 것이다.

 

2012년 <노인과 바다> 전쟁에서 두번째로 출전한 문학동네 선수. 출간일에서도 해설 양이나 번역자 인지도 및 전문성에서도 타 출판사본의 스펙을 이기지 못해 불리했다. 물론 섹시한 표지 때문에 고정 충성층을 확보하고 있긴 하지만, 고정 충성층은 가진 타 출판사의 세계문학전집도 몇 있다. 외모 무기에 예약판매로 승부를 건 문학동네의 단기 마케팅 전략의 꽃은 영문 원서 증정이다. 예약판매자 전원과 초기 구매자 선착순에게 증정되는 이 원서(아쉽지만 2월7일 현재 전량소진)는 국역판과 같은 디자인과 문장(물론 영문)으로 컬렉션 가치를 더욱 높인다.

 

<노인과 바다> 작품 자체에 대한 서평은 따로 글을 썼기에 문학동네본의 주요 특징들을 언급하는 것으로 글을 쓴다.

노인과 바다 작품 리뷰>> [노인과 바다] 투쟁하는 모든 존재에게 보내는 불멸의 우화 

 

 

<노인과 바다>의 영어 원서는 그 동안 스크리브너사가 독점 출판하였다. 그러나 이 출판사는 지난 반세기 간 여러 번 판형을 바꿔 쇄를 거듭했을 뿐 오탈자(누가 봐도 명백한)를 방치하였다. 문학동네는 번역의 원전을 스크리브너사 2003년판으로 삼았는데, 지금 증정하는 한정 원서는 스크리너사 2003년판 원문 그대로가 아니라 편집부에서 검토해 그 오탈자를 모두 고친 버전이다. 혹시 읽으면서 오타 또 찾아내면 문학동네에 신고하시길.

해설에서 차별점은 연표에 청새치로 찍은 사진 정도. 그 외엔 분량이나 내용이나 무난하다. 본문을 압도하는 장문의 해설, 논문 수준의 개인적 연구가 많이 반영된 해설 수록을 좋아하지 않는 독자들은 선호할 듯.

 

슬슬 번역에 대한 말들이 인터넷에 올라오기 시작하였다. 헤밍웨이는 최대한 단문에 형용사·관형사 등 수식어구를 배제한 하드보일드 문체를 지향한다. 그래서 굉장히 깔끔하고 짧다. 문제는 이를 우리말로 번역하면서 언어와 문법 차이를 극복하면서 헤밍웨이의 문체를 살려야 한다는 것이다. <노인과 바다>는 우리말로 표현하기 위해서 원문에 없는 단어를 첨가하거나 임의로 문장을 나눠서 번역해야 헤밍웨이스러운 간결한 문장에 말이 되게 번역할 수 있는 작품이다. 그래서 어떤 번역본을 선택할지는 절대적인 번역의 질보다 독자의 취향과 번역관에 더 달려 있다.

 

아무래도 보름 차이로 출간되었고 가장 최근 출간본이기 때문에 민음사와 문학동네의 번역본을 서로 비교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민음사의 번역본과 비교해 문장의 길이가 좀 더 길고 부드러운 문체이며 번역투가 심하다는 평을 한다. 다르게 해석하면 전자가 헤밍웨이의 문체와 우리말스러움에 초점을 둔 번역이라면 후자는 원전주의를 택했다고 볼 수 있어 두 출판사 각 번역의 특성 차이일 뿐 무조건 단점으로 몰아 붙이긴 힘들다고 생각한다. 물론 민음본도 번역투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고 문학동네본도 원전 문장을 임의로 쪼개거나 첨언하여 표현하기도 한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가독성과 건조함은 포기하는 대신 원문대로 번역하려 한 느낌, 그래서인지 읽으면서 영어 문장이 절로 겹쳐 보이는 듯한 착각이 들기도 한다.

 

어쩌다 이번 주 서평책을 <노인과 바다>로 정하면서 번역본을 몇 개를 읽었는지 모르겠다. 소장한 <노인과 바다>만 여섯 권이니 도서관이나 서점에서 살핀 것과 어릴 적 읽었던 것까지 합치면 휴. 그런데 문학동네본을 읽던 중에 한 단어에서 멈췄다. dolphin을 만새기로 번역했고 역자의 말에서도 이 부분을 이 번역본의 핵심으로 꼽은 것이다. 읽다가 멈칫한 이유는 dolphin을 돌고래가 아닌 만새기로 표현한 번역본을 처음 봤기 때문. 

 

만새기: 조기강 농어목 만새기과 / 감성돔: 조기강 농어목 도미과 / 돌고래: 포유강 고래목 돌고래과
국어사전과 학명으로 보면 명백히 다르게 구별되는 어종이 영어사전과 스페인어사전으로 들어가면 골치아파진다.

dolphin: 돌고래, 만새기
dorado 영어사전으론 만새기 스페인어사전으론 흑도미의 남성형
delfin 스페인어사전으로 돌고래,만새기
흑도미=감성돔의 북한어
감성돔 영어사전으론 black porgy 스페인어사전으론 dorado

너무 궁금해서 돌고래와 만새기 중 뭐가 맛없나로 검색해보기까지 한다.

원문 전체에 구체적인 설명 없이 노인이 다랑어 다음에 잡은 고기가 dolphin으로 표기하고 유일한 단서는 dorado 뿐이라고 생각했기에 역자도 충분히 헷갈릴만한 부분이라 생각하였다. dorado의 주석도 이인규 역은 만새기의 스페인어 표현이라 달았으나 타 번역본은 돌고래의 스페인어 표현이라 달았다. 그런데 곰곰 생각하니 내가 편집적 기억한 감이 없지 않았다. <노인과 바다>는 리얼리티 면에서 스페인어 단어와 묘사가 잘못된 부분이 꽤 있는 작품이라기에 디테일에 그렇게 집착해 읽지도 기억하지도 않고 넘겼던 것이다. dolphin에 대해 책 속에 묘사들이 몇 있고 porpoise란 단어가 나오기도 해서 그걸 감안하면 만새기쪽에 더 마음이 기운다. 그런데 알고 봤더니 이미 학계에서 결론난 부분이었고 이에 대해 문학동네에서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글을 올렸다.

 

만새기에 대한 얘기 뿐 아니라, 이번 '책장' 포스트에 언급한 영미문학연구회 번역평가사업단의 <노인과 바다> 번역본 검토에 대한 자세한 내용과 이번 번역의 뒷얘기도 알 수 있다.

dolphin, 돌고래야 만새기야? 『노인과 바다』번역에 대하여 (::문학동네::)

dolphin, 돌고래야 만새기야? 『노인과 바다』번역에 대하여 2탄! (::문학동네::)

<노인과 바다> 역자 관련, 개인소장용 자료 풉니다.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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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은 다시 뜬다
어니스트 헤밍웨이 지음, 이한중 옮김 / 한겨레출판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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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은 다시 뜬다] 태양이 지면 다시 뜰 뿐, 잃은것은 없다

 

 

 

두 가지 의의에서 탐독했던 책이다. 하나는 청년 헤밍웨이를 만나고 싶었고 다른 하나는 ‘로스트 제너레이션’에 대한 몰이해와 편견에 사과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8주 만에 초고 완성, 6개월의 집필 끝에 완성했다고 전해지는 헤밍웨이의 첫 장편소설 <태양은 다시 뜬다>, 헤밍웨이가 인기작가로 발돋움한 출세작이자 그의 문학의 원형(신인 시절의 작품들을 뒤로 하고 이 소설부터 빙산 이론과 하드보일드 문체 등을 확립한다.)을 엿볼 수 있는 작품이다. 무엇보다 흥미로운 점은 1926년에 출간된 이 소설 때문에 ‘로스트 제너레이션’이란 개념이 생겼다는 것이다. 이후 ‘로스트 제너레이션’은 헤밍웨이 또래 세대(1890년대 출생자; 특히 지식인과 예술가)를 정의하는 당연한 용어가 되었다.

 

 

이 책을 읽기 전 생각했던 1920년대 미국의 이미지는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나 이디스 워튼의 <순수의 시대> 같은 모습이었다. 전쟁과 사회에 대한 환멸, 화려한 뉴욕, 지극히 일상적이고 잡기적인 탐닉들, 자유분방한 청년들과 잦은 파티들, 재즈의 유행 등 말이다. 당대 문화계의 거물이자 청년 헤밍웨이의 중요 멘토였던 스타인은 <태양은 다시 뜬다>의 제사(題詞)로 “You are all a lost generation.”라는 문장을 썼다(그녀가 창조한 말은 아니지만). '길 잃은', ‘잃어버린’, ‘망쳐버린’의 부정적 뉘앙스가 담긴 이 말은, 후에 이 세대를 분석하면서 내리고 정의한 복잡한 설명들보다 ‘언제나 젊은 애들은 답이 없는’ 만고불변의 관념처럼 단순 당시 기성세대가 신세대를 은근히 비꼬았던 것일지도 모른다.

 

 

이 일 때문이었을까, 스타인과 헤밍웨이의 돈독했던 관계는 그다지 오래 갔다고 하진 않는다. 그리고 헤밍웨이는 말년에 30년도 지난 일을 다시 꺼내 글을 쓴다.(미완성 유작 <이동축제일(1964)>/국내엔 올해 <파리는 날마다 축제>란 제목으로 이숲에서 초역). 헤밍웨이는 반박의 의미로 스타인의 제사 아래 구약성경 전도서의 한 대목을 덧붙인다. 그리고 거기서 책의 제목도 딴다. '태양은 다시 뜬다(The sun also rises)'고. 로스트 제너레이션 작가들은 현대 미국 문학의 중심점이었다. 학창시절 디킨스, 스티븐슨, 키플링 등의 문학을 배우고 제1차 세계대전을 겪은 후 파리에서 플로베르, 스타인, 파운드, 조이스 등에 영향 받고 습작하며, (프랑스 문학으로 대표되는) 유럽의 문학을 흡수해 미국에 전한다. 그리고 미국 문학의 입지와 독자성을 높여 오늘날 현대 미국 문학을 공고히 다지는 역할을 한다.

 

 

이러한 헤밍웨이 청년시기의 배경지식을 알고 나면 케네디가 왜 헤밍웨이를 로스트 제너레이션의 기록자이자 이들을 불후의 세대로 끌어올렸다고 표현했는지 십분 이해된다. 로스트 제너레이션의 시작이면서 아이로니컬하게도 이러한 명명을 반박하기 위해 쓴 작품인 <태양은 다시 뜬다>, 기대감에 책을 펼치고는 적잖이 당황하였다. 역으로 기성세대를 공격하는 것도 없고, 젊은 세대들의 가치와 생명력을 피력하는 것도 없고, 그렇다면 언젠가 태양은 다시 뜨겠지 하고 열심히 읽었으나 기다리는 것은 지극히 열려 있는 결말이다. 게다가 내용은 위에 언급했던 1920년대 미국 문학과 젊은이들의 모습들에 대해 흔히 떠올리는 전형이다. 파리로 친구들이 모여 스페인으로 여행을 떠나고, 그 과정에서 놀고 떠들고 남녀 관계가 얽힌 모습을 보여준다. 그것도 철저히 대사 위주의 보여주기 기법으로.

 

 

<태양은 다시 뜬다>는 읽는 내내 헤밍웨이의 삶을 떠올리게 하는 부분들이 참 많다. 주인공들의 일상과 여행 자체가 헤밍웨이의 파리 시절을 압축하고 있는 것처럼, 파리에 오만 젊은이들이 모여들고 주인공들의 여행 종착지는 헤밍웨이가 첫 아내와 세 번이나 여행 갔던 스페인의 팜플로나다. 주인공 제이크는 헤밍웨이처럼 제 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고 매년 여름마다 스페인으로 휴가를 떠난다. 그의 친구인 빌과 콘은 작가다. <태양을 다시 뜬다>는 ‘아무리 분석해도 작품의 본질을 다 담지 못한다’는 호평을 받은 작품, 그만큼 젊은 작가들 특유의 패기와 혁신성이 엿보이는데다 온갖 은유에 대단히 어렵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단 한 번도 절판된 적 없으며 세계에서 가장 많이 번역된 작품 중 하나이고, 글로 묘사된 브렛의 패션이 엄청난 유행이었으며, 이 소설 때문에 팜플로나의 투우가 유명해져 방문객 규모가 100만 명을 돌파했다는 출간 후일담들에 다소 고개가 갸우뚱했다. 다른 독자들은 다 쉽게 읽었던 건가?

 

 

물론 마음먹으면 충분히 단순하고 흥미 위주로 접근할 수 있다. 참전 중 부상으로 고자가 된 주인공 제이크는 자신의 상황에 애써 태연한 척 하면서도 애인 브렛과의 육체적 관계 문제로 고민이 많다. 안 그래도 브렛은 두 번의 결혼 경력에 약혼자가 있어 제이크가 늘 불안해하는데 나중엔 친구 콘이 자기 애인과 헤어지고 밀월여행을 다녀오질 않나 투우사 로메오와도 사랑에 빠지니 미칠 지경이다. 이렇듯 <태양은 다시 뜬다>는 제이크 시점의 1인칭 소설로 큰 사건 없이 여행과 사랑을 주제로 전개된다. 헤밍웨이가 추구한 문학이 완성되는 마지막 장편 <노인과 바다>와 시작이었던 이 첫 장편 <태양은 다시 뜬다>의 미묘한 특징 차이를 비교하거나, 욕도 하고 종이를 뚫고 나오는 주인공들의 젊음과 청춘의 고민을 느낄 수 있는 것도 이 소설을 읽으며 얻는 또 다른 즐거움이었다.

 

 

한편 이 책은 헤밍웨이에 대한 몰이해와 편견 뿐 아니라 평소 역자 선호도에 대해 재고할 수 있었던 기회였다. 문학 번역은 해당 언어와 문학을 전공한 교수 번역을 가장 선호하는 독자로서, 영문학자는커녕 전공자도 아닌 일반 전문번역가가 번역한 한겨레의 <태양은 다시 뜬다>를 선택한 이유는 이 작품을 번역하며 수많은 자료 조사를 하며 비전공자의 한계를 극복하려 했던 역자의 노력이 느껴진 번역본이었기 때문이다. 역자는 스톤백 교수의 <태양은 다시 뜬다> 연구를 중심으로 지도와 사진 자료를 수록하며, ‘순례 모티브’와 그 외 배경지식(기본 해설, 연보)을 담은 45페이지 가량의 해설을 썼다. 또 210개의 각주를 원문 단어와 함께 본문과 함께 수록하여 독자들의 이해를 높였다.

 

 

이 작품을 단순 당대 트렌디 소설로도, 사랑에 관한 모든 것으로도, 제임스와 주변 인물들의 일상과 심리를 통해 전후세대, 고국이탈자로 불렸던 1920년대 젊은이들이 불안·고민·실존주의적 탐구로도, 산티아고 순례처럼 종교적 관점에서 접근할 수도 있다. 즉 <태양은 다시 뜬다> 역시 건조하고 행간이 많아 다양한 감상이 가능한, 전형적인 헤밍웨이 작품이다. 그렇기에 이 작품에 관심 있다면 서평이나 논문 읽는 것으로 그치지 말고, 반드시 각자의 감상을 찾길 바란다. ‘다시 뜨는 태양’의 의미 역시 마찬가지다. 혹자는 제이크의 존재 자체나 낚시나 투우로 상징되는 소설 속 몇 에피소드들이 좌절치 않고 전진하는 희망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한편으론 헤밍웨이는 어떤 거창한 반론이나 의미 부여보다는 그저 당시 청춘들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여줌으로써 자신 세대의 존재를 증거하고 영원으로 남기는 것이 스타인의 명명에 대한 대답이었을지도 모른다. We were here, 우리가 여기 있었노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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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의 미래 - 왜 인문학을 가르치고 배워야 하는가?
월터 카우프만 지음, 이은정 옮김 / 동녘 / 2011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인문학의 미래] 죽은 인문학자의 살아있는 일침

 

 

 

 

http://der_insel.blog.me/120147407226 

 

프린스턴대 철학과 교수였던 월터 카우프만의 1977년 작, 생각보다 국내에 많이 알려져 있지 않았던 책으로 저자는 이미 고인이 되었다. 이 책 뿐 아니라 월터 카우프만의 저서는 대학 도서관들에 원서들은 제법 소장되어 있는 편이나 그 동안 번역된 게 손꼽을 정도다. <인문학의 미래>는 그의 30여년의 경험을 바탕으로 인문학과 인문학 교육에 외치는 쓴 소리다. 그러나 국립중앙도서관과 국회도서관, 각종 대학도서관을 비롯하여 이 책의 원서를 소장하는 곳이 거의 없으며 미리내에서 낸 번역서는 소장 도서관이 제법 많은데, 13년 전 이남재 교수가 번역한 이 번역서는 '수많은 오역과 낯 뜨거운 비문으로 가득한 번역'이라는 혹평을 들으며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그런 의미에서 이 죽은 인문학자의 명서를 제대로 된 번역으로 21세기에 살리고 알리겠다는 동녘과 이은정 교수의 의욕을 보고 새 번역본이 무척 궁금해졌다.

 

 

 

제목을 봤을 때 인문학의 위기에 대한 현상 진단과 대안에 대한 담론을 다룰 것이란 일반적 기대와 달리 <인문학의 미래>는 인간형의 고찰과 고등교육에서의 교수법, 독서와 출판에 대한 것까지 다루며 논의의 범위가 상당히 넓다는 점에서 특이하다. 이러한 접근과 기술이 가능한 것은 저자가 철학자이자 교수, 번역가, 서평가, 편집자, 시인 등 다양한 이력을 가졌기 때문이다. 또한 이 책을 통해 인문학의 위기가 시작되는 시점을 알 수 있다. 저자는 오늘날 인문대학이 겪는 시련이 세계 제 2차 대전을 기점으로 대학교육이 재편되면서부터라고 분석하는데 전후, 수많은 대학이 생기고 교수가 부족해 60년대까지 박사 미 소지자도 쉽게 교수가 될 수 있던 것이 불과 십몇년 만에 미국만 매년 2000명 이상의 백수 인문학 박사를 내는 상황으로 전락했다는 사실에 다소 놀랐다. 68혁명에 대한 저자의 평가도 흥미로웠다.

 

 

첫 장 '네 가지 유형의 마음가짐'은 이 책의 논의 전반을 이해하는 데 있어 바탕이 되는 장으로 저자는 네 가지의 인간형을 제시한다. 기존의 이론과 시대의 상식을 뒤집는 새롭고 독특한 아이디어를 제시하는 통찰가형, 기존의 연구들과 자료들을 정리하고 계승하며 학파 중심적으로 활동하는 사변가형, 어떤 사상과 이론도 틀릴 가능성을 항상 염두하며 비판적 견지와 무지의 자각을 강조하는 소크라테스형, 시류를 중시하며 지금 당장 팔릴 것을 생산(연구·집필 등)에 집중하는 저널리스트형이다. 이 유형들이 어떤 건 무조건 좋고 어떤 건 무조건 나쁜 건 아니다. 월터 카우프만의 문제의식은 현재의 교육과 사회가 이러한 유형들이 균형 있게 공존하지 못하고 사변가형과 저널리스트형 인간들만 주로 양산하고 있다는 것이다.

 

 

2장과 3장은 책에 관심이 많은 독자들이 특히 흥미를 가지며 주의 깊게 볼 부분이다. 전자는 독서방법론에 대해 후자는 서평·번역·편집에 대해 다루는 장이다. 2장에서 월터 카우프만은 인문사회과학의 핵심을 독서로 꼽으며, 대부분의 학생들이 잘 읽는 법에 대해 배우지 못하고, 교수들과 학자들은 각자의 극단적인 독서법을 고집하는 현실에 개탄한다. 그러면서 고전 독서법을 중심으로 성서해석적 독서, 독단론적 독서, 불가지론적 독서, 변증법적 독서 네 유형의 독서법을 설명하며 변증법적 독서의 중요성을 역설한다. 서평의 정치성과 번역과 편집에 있어 윤리와 주의할 점을 논하는 3장은 독자들을 각성시키는 '위험한 진실'인 동시에 이 작업에 얽혀 있는 인문학계에 대한 자조이기도 하다. 이러한 의견이 양심을 이끌어낼지는 모르겠지만 새겨 볼 고언임엔 분명하다.

 

 

월터 카우프만이 정의하는 인문학의 범위는 종교, 철학, 예술, 음악, 문학, 역사 여섯 분야이다. 4장과 5장은 교수법과 교육프로그램의 모색과 현재 교육 현실에 대한 비판과 방향잡기라면 마지막 장은 학제 간 연구로 마무리하며 인문학의 생존법에 대해 총정리하며 끝낸다. 고등교육에서 현저하게 소홀히 다뤄지는 종교 교육을 시작으로 철학과 문학 등 다양한 강의안들을 제시하는 4장을 읽으면서 프로그램 참고 뿐 아니라 양서 리스트를 얻어갈 수 있다. 5장과 6장은 지금까지 논의한 것을 정리하며 책 전체에서 인문학의 위기와 미래에 대해 가장 충실히 다루는 장이다. 월터 카우프만이 인문학의 생존을 위해 강조한 것은 통찰가형이나 소크라테스형도 많이 나올 수 있기 위한 교육의 개혁과 학제 간 연구를 통한 인문학의 가치 강화이다.

 

 

역자는 이 책의 주요 독자를 인문학자(대학 교수와 그 외 연구자들)로 규정하고 있는데, 그만큼 이 책이 일반인 독자를 대상으로 했다기에 다소 수준이 높고 저자의 비판 방향이 학계와 교육에 놓여 있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일반인에게 유리된 주제도 전혀 이해 못할 만큼 어려운 내용도 아니기에 충분히 즐길 수 있는 책이다. 한편 앞서 언급했듯 이번 동녘에서 출간된 <인문학의 미래>는 번역에 신경 썼음을 강조하였는데, 길고 복잡한 구조의 문장이 많은 걸 감안할 때 가독성에 꽤 신경쓴 듯 보인다. 또 본문에 언급된 출판물이 단행본·잡지·장편인지 논문·단편·미술작품인지 기호를 달리 해 구분한다거나 문맥에 따라 'Bible'을 성서와 성경으로 바꿔가며 번역하는(그래서 헷갈릴 수 있지만) 섬세함이 있다. 또 카우프만이 정리한 참고문헌을 일일이 대조에 국내 번역 여부를 써놓은 것도 독자를 위한 상당히 세심한 배려다.

 

 

<인문학의 미래> 출간 이후에도 인문학은 계속 벼랑 끝으로 내몰렸다. 인문학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는데, 월터 카우프만이 '자살'이라 표현했던 것처럼 이러한 위기에 인문학 스스로도 어느 정도 책임이 있지 않나 싶다. 아이러니한 것은 출판계 같은 경우 '인문학 열풍'이 불고 오히려 다른 분야에서 인문학적 가치를 강조하며 융합을 꾀하고 있다는 것이다. 반면 순수인문학 교양서들은 점점 가볍고 쉬워진다. 인문학을 사랑하지만(그래서 취미로는 더없이 환영이지만) 전공은 꺼리는 요즘 세태를 반영한 것일까. 출간한지 30여년이 넘은 이 죽은 학자의 외침이 이젠 무의미하고 추억 저편으로 넘어가는 것이 아니라 현재에도 생생하게 살아있는 일침이 된다는 사실에 저자의 혜안에 탄복하면서도 몹시 씁쓸하고 아팠다.

 

 

몇 달 전 들었던 한 라디오 프로그램이 생각났다. 어느 유명 인사가 자신이 고등학교 때 이과를 선택한 이유는 그 시대엔 문과 가면 밥 굶는다는 말이 돌았기 때문이라 하였다. 그는 60년대 초반 생이었고 그들의 대학시절을 우리 세대는 참 낭만적이다 여겼다. 지금은 더 상황이 좋지 않다. 수능이 끝났고 수많은 문과 학생들이 전공 선택을 고민하는 때이다. 그들에게 진로에 대한 확실한 신념이 없으면 무난하게 경영학과를 가라 비겁한 조언을 던지는 기저는 채만식의 <레디메이드 인생>에서 자신의 아들을 인쇄소에 맡기는 P의 무력함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표류하고 있는 인문학, 그럼에도 인문학을 계속 가르쳐야 하고 인문학은 발전해야 하며 인문학의 희망을 보고 싶다 생각하는 독자들에게 <인문학의 미래>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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