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복 세이초 월드
마쓰모토 세이초 지음, 김경남 옮김 / 모비딕 / 2012년 7월
평점 :
품절


[잠복] 대작가의 초기작과 거니는 1950년대의 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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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쓰모토 세이초는 일본 드라마나 영화, 소설, 연극 등을 보는 사람이라면 어떤 경로로든 접하게 되는 작가다. 1950년 등단 이래 1992년 사망하기까지 40여 년 동안 세이초는 장편 100여 편 중단편 1000여 편에 달하는 엄청난 양의 작품을 썼다. 지금까지 나온 작품 단행본이 750여종에 달하고 66권이 나온 전집이 완간이 아닌 현재 진행 중인 걸 보면 그가 얼마나 엄청난 다작 작가인지 가늠할 수 있다. 흔히 마쓰모토 세이초는 사회파 미스터리의 대부로 소개되고 독자들도 그렇게만 알고 넘어가는 경우가 많다. 미스터리 소설은 소비성과 오락성이 강한 대중통속소설의 일환으로 등장 발전하여 순수문학에 비해 내용도 가볍고 집필 속도도 빠른 경향이 있으며, 양산형 장르문학이나 라이트노벨로 이런 이미지가 더 강하게 굳혀져 있다. 그래서 세이초의 다작과 작품성을 평가 절하해 예단할 수도 있다.

 

 

하지만 세이초의 작품세계는 대단히 방대하다. 물론 세이초가 (사회파) 미스터리 장르로 일가를 이루었고 그의 이름을 딴 문학상도 추리·미스터리 관련이지만, 소설과 논픽션을 넘나드는 작가였고 소설의 경우 순수소설과 추리소설, 미스터리소설, 역사소설 등 장르를 종횡무진하는 작가였다. 초기작인 <어느 ‘고쿠라 일기’전>이 일본 최대 상업 문학상인 나오키상에 후보로 올랐다가 도리어 일본에서 가장 권위 있는 순수문학상인 아쿠타가와상을 받은 사실이나, 역사소설 집필을 위해 몰두한 일본사에 대해 훗날 학계와 맞서고 학문적 성과를 어느 정도 인정받은 점은 세이초란 인간과 그의 문학 세계의 스펙트럼이 얼마나 광범위한지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독자가 한 작가의 작품들에 접근하는 방법엔 대표작을 중심으로 읽는 방법과 초기작부터 시작해 시대 순으로 읽어 나가는 방법이 있다. 후자의 방법으로 세이초의 문학을 알고 싶은 독자에게 지난 달 출간된 <잠복>은 강력 추천하는 책이다.

 

 

총 여섯 권으로 기획한 모비딕의 ‘마쓰모토 세이초 단편 미스터리 걸작선’은 1965년에 일본의 문학평론가 히라노 겐이 여섯 권으로 펴낸 ‘신조문고 마쓰모토 세이초 걸작단편집(신조사)’를 번역한 책이다. 권 순서는 다르지만 일본판과 제목도 수록단편도 같은 단편집 <잠복>은 세이초의 첫 미스터리소설인 [잠복]을 포함하여 1955년에서 1957년 발표한 여덟 편의 미스터리소설을 담고 있다. 단편의 배경이 되는 일본의 1950년대는 2차 대전 종전 후 전장에서 사람들이 돌아오고 패전과 식민지 상실로 입은 경제적 정신적 타격을 한국전특수로 인한 경기부흥으로 극복하는 시기이다. 궁핍한 가정형편으로 학력도 소학교 졸업으로 그쳤고 마흔이 될 때까지 노점상과 인쇄공, 각종 부업 등 별별 일을 했던 세이초는 상금을 받기 위해 글을 쓰면서 등단한 작가였다. 초기단편집인 <잠복>엔 그런 다사다난했던 세이초의 경험과 당시의 일본사회의 모습이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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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이 그르친 완전범죄 [얼굴] - 1956

무명의 연극배우였던 료키치는 그의 연극을 본 이시이 감독의 눈에 띄어 감독의 신작 <봄눈>에 단역으로 캐스팅된다. 대여섯 장면만 나오는 단역에 불구했지만 평론가들의 주목을 받은 료키치, 이번엔 파격적인 주연 캐스팅 제의가 들어온다. 료키치는 불안하다. 료키치에겐 씻을 수 없는 과거가 있고 그 과거를 아는 한 사람이 있기 때문에 지금껏 조용히 살았다. 전국 개봉하는 영화의 주연, 오랜 무명 생활을 벗어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눈앞에 온 상황, 성공하고 싶고 유명해지고 싶다는 욕망은 결국 파국을 부르는데.

 

 

어느 잠복형사의 일지 <잠복> - 1955

도쿄에서 발생한 기업 중역 강도 살인사건, 아무런 단서도 없어 한 달째 수사가 난항을 겪던 중 우연히 노상 불심검문 중 범인인 야마다가 체포된다. 순순히 범행을 자백하는 야마다는 처음엔 단독범행이라 진술했다가 공범이 있고 자신은 강도에만 가담했을 뿐 살인까지 저지른 것은 공범인 규이치라고 초기 진술을 뒤집는다. 야마다를 취조하면서 이시이가 자신에 신병에 비관해 자살하려고 했고 죽기 전에 옛 연인을 만나고 싶어 했다는 사실을 안 경찰은 이시이가 연인을 만나러 갈 것인지 아닌지로 의견이 나뉘고 결국 수사를 두 방향으로 진행하게 된다. 이시이가 연인을 만나러 갈 것이라 예측했던 유키는 그녀가 규슈에 살고 있는 사다코라는 것을 알아내고 사다코의 집 앞에서 잠복수사를 한다. 계속되는 잠복, 평온한 사다코의 일상, 이시이는 사다코를 만나고 유키는 이시이를 검거할 수 있을까.

 

 

저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지만 저를 꼭 찾아주세요 <귀축> - 1957

열여섯부터 인쇄소 일을 하던 소키치는 스물일곱에 함께 인쇄소에서 더부살이했던 오우메와 결혼하고 합심해 노력한 끝에 서른둘에 작은 인쇄소를 차리게 된다. 처음엔 하청으로 시작했지만 꼼꼼한 일솜씨로 신용을 얻은 소키치의 사업은 번성한다. 하지만 경제적으로 여유가 생기자 소키치는 요릿집 접대부인 기쿠요와 불륜에 빠지고 오우메 사이에서 자식이 없던 그는 기쿠요와 3명의 아이를 낳으며 철저한 이중생활을 한다. 하지만 최신 장비를 가진 대형 인쇄소가 지역에 들어서면서 소키치의 사업은 기울게 되고 생활비를 제대로 받지 못하게 된 기쿠요가 오우메를 찾아오면서 8년간의 두 집 살림이 종결된다. 당신의 아이니 책임지라며 세 아이를 두고 떠나는 기쿠요, 오우메의 등쌀 속에서 세 아이들이 죽거나 죽어야 하는 운명에 처하는데.

 

 

씁쓸하고 다시 생각하기 싫은 내 시골 기자 생활 <투영> - 1957

도쿄에서 신문기자를 하던 다무라는 상사와의 불화로 신문사를 그만두고 아내 요리코와 무작정 낙향한다. 하지만 금세 퇴직금은 바닥나고 다무라가 취업이 잘되지 않자 요리코가 카바레에서 일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다무라도 곧 그 지역에서 가장 영세하고 다른 기자들에게 무시 받는 3류지 요도신보에서 일하게 된다. 요도신문은 오직 시정 비리를 캐는데 혈안이 된 신문, 그래서 시의회와 시청의 눈엣가시다. 어느 날 다무라의 취재원 중 한명이었던 미나미가 시체로 발견되고, 다무라는 냄새를 맡는데 이건 특종이다!

 

 

나의 너무 좋은 기억력이 무섭다 <목소리> - 1956

신문사 전화교환원인 도모코는 전화교환원 특유의 직업병이긴 하지만 그 중에서도 특히 예민한 감각과 좋은 기억력으로 전화 온 사람들의 목소리를 잘 구별하고 잘 알아챈다. 어느 날 야근하던 도모코는 사회부 기자의 부탁을 받고 전화를 건다. 그러나 도모코는 잘못 전화를 걸었고 상대방은 약간 장난스럽지만 퉁명하고 화난 목소리로 전화를 끊는다. 도모코는 잘못 건 번호의 주소를 확인하는데, 다음날 신문에서 자신이 전화를 걸었던 주소에서 살인사건이 일어났다는 기사를 읽고 충격에 휩싸인다. 목격자는 아니지만 범인의 목소리를 들은 도모코는 수사에 적극적으로 협조하고 그 얘기가 기사화되었다. 그러나 반년 동안 범인을 잡지 못해 미제로 수사가 종결된다. 퇴사 후 결혼하고 전업주부가 된 도모코는 남편 시게오가 홧김에 회사를 그만두고 반년간 극심한 생활고에 시달린다. 계속 일을 구하지 못하다가 약품 관련 상사에 취직했다는 시게오는 다달이 꽤 많은 월급을 받아왔다. 도모코 뿐 아니라 시게오 본인도 정확히 어떤 회사인지 알지 못하고 걸핏하면 집에서 세 명의 회사동료와 마작을 하니 수상하기 짝이 없지만 넉넉하고 꼬박꼬박한 월급에 애써 참는다. 어느 날 세 회사 동료 중 한명의 전화가 걸려오고, 도모코는 그 목소리가 과거 살인사건 범인의 목소리임을 알아차리는데.

 

 

도쿄에 사는 그녀가 지방신문을 읽는 이유는 <지방신문을 구독하는 여자> - 1957

도쿄에 사는 요시코는 도쿄에는 팔지 않는 Y현 K시의 유명신문 고신신문을 구독한다. 구독하면서 며칠치 예전 신문도 구매하길 원하는 요시코, 배달된 지방신문을 매일매일 탐독한다. 그리고 구독한지 한 달이 채 지나기 전에 원하는 기사를 찾은 그녀는 구독을 중지한다. 문제는 괜히 구독신청과 구독중지시 사유를 적은 것이었다. 고신신문에 연재 중인 [야도전기]란 소설이 재미있을 것 같아 구독하고 소설이 재미없어져서 구독을 중지한다는 것이었다. 무심코 넘어갈 수 있었을 문제지만 그 사실을 알게 된 [야도전기]의 작가 류지는 수상함을 느끼고 그녀를 찾는다. 요시코가 고신신문을 읽는 이유는 무엇이고 류지는 무엇을 알아차렸던 걸까.

 

 

그와 그녀의 <일 년 반만 기다려> - 1957

전쟁 중엔 남자가 부족했기에 여자들의 취업이 쉬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후 남자들이 하나둘 돌아오면서 필요 없어진 여직원들은 대량 해고되었다. 여전 졸업 후 바로 입사했던 스무라 사토코 역시 그 희생양 중 한명이었다. 그의 남편 요키치는 남자였지만 중졸이었기 때문에 전후 인력이 넘치게 되면서 경쟁우위가 없어 역시 실직하였다. 재취업에 실패한 요키치는 주부로 눌러앉고, 졸지에 가장이 된 사토코는 새로운 일자리를 여럿 전전하다 에너지개발 붐에 따른 토목경기활황에 주목, 공사장을 돌아다니며 보험을 판다. 사토코의 예상은 적중했다. 일이 위험해 보험의 수요는 많은데 공사장이 오지인 경우가 많아 보험판매원들의 방문이 거의 없어 엄청난 실적을 올리게 된다. 하지만 돈을 많이 벌자 요키치가 방탕한 생활을 하고 사토코를 질투하며 그녀에게 걸핏하면 폭력을 행사한다. 참다못한 사토코는 요키치를 죽이고 정당방위인 면이 많고 페미니스트이자 인기 평론가인 다키코의 지지가 더해져 여론은 사토코를 동정하는 일색으로 흐른다. 그런데 사토코의 비밀을 폭로하는 사내가 등장하는데 1년 반만 기다려?

 

 

내가 살기 위해선 스승을 없애야 한다 <카르네아데스의 널> - 1957

패전 후 국가주의적 역사론이 몰락하면서 그 입장에 섰던 수많은 역사학과 교수들이 추방당했다. 오쓰라 교수 역시 마찬가지였지만, 그의 애제자였던 구무라는 빠르게 유물론적 사관으로 기조를 바꾸면서 피바람을 피할 수 있었다. 하루아침에 처지가 뒤바뀐 그들, 오쓰루는 각종 저술과 강연으로 짭짤한 부수입을 올리는 구무라가 부러워한다. 초라해진 스승에 대한 우쭐함도 잠시 오쓰루는 다시 강단에 서게 되고 구무라처럼 유물사관을 펴는 진보사학자가 되어 구무라의 입지를 위협한다. 또 시대가 바뀌어 좌익사관이 불리해지자 오쓰루는 가장 먼저 우익으로 전향하며 구무라보다 교과서 시장을 선점한다. 바다 한가운데 난파했을 때 한 사람만 붙잡고 있어야 살 수 있는 널빤지를 두 사람이 붙잡고 있을 때 다른 한 사람을 밀어내야 자신이 살 수 있는 ‘카르네아데스의 널’ 문제와 같은 구무라와 오쓰루의 관계, 구무라는 결단을 내리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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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이초가 표방한 사회파 미스터리는 복잡한 트릭이나 장르적 기교가 없다. 그래서 열심히 머리 굴리며 추리해 짜릿한 쾌감을 얻길 즐기거나 기술적 정교함이나 자극성을 중요하게 여기는 독자에겐 밋밋하고 심심하게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시사적인 사회문제나 사회구조적 모순을 반영하는 사회파 미스터리는 장르문학을 즐기는 동시의 작품 발표 당시의 시대적 풍경을 구경할 수 있다. 구로사와 아키라로 상징되는 1950년대 일본 영화산업의 진일보, 전국 개봉하는 영화가 없었다면 계속 연극배우만 했다면 밝혀지지 않았을 [얼굴]에서 료키치의 범죄는 밝혀지지 않았을 것이다. 작은 인쇄소의 흥망성쇠가 담긴 [귀축]의 또 다른 스토리텔링 축은 불륜에 대한 끔찍한 대가로 스스로 자기 아이들을 죽이거나 죽는 것을 봐야 하는 아버지이다. [일년 반만 기다려]나 [카르네아데스의 널]은 종전 이후 고용과 학계가 어떻게 급변하는지, 후자의 경우 변화하는 세태에 생존하기 위해 어떻게 처신해야하는지 같은 모습을 보여준다. [잠복]이나 [투영], [지방신문을 보는 여자], [목소리]엔 지금은 사라진 직업이나 일의 방식들이 있는데 내용 자체는 지금 읽어도 세련되고 공감되어 매력적이다.

 

 

당대의 사회현실을 반영한 문학들의 강점은 과거를 비추는 거울로서 소중한 유산이 되는 동시에 역사의 굴레에 의해 현재와 맞닿는 작품의 어떤 면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이다. 세이초는 스토리텔링의 천재였다. 쉼 없이 샘솟는 상상력과 세상을 보는 날카로운 관찰력은 학력도 나이도 콤플렉스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일까, 세이초의 수많은 작품들은 한번으로 드라마나 영화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수없이 리메이크된다. 그 저력과 매력의 이유는 책을 직접 읽으면 알 수 있다. 분명 1950년대의 풍경을 담은 <잠복>의 단편들은 예스러움이 생동하고 있는데 지금 읽어도 재미와 시사점이 있다. 단편 안에서도 시나리오 씬을 나누듯 장을 나눈다거나([귀축],[목소리]), 시간과 시점이 엇갈린 일기의 토막을 나열하면서도 자연스럽게 내용이 전개되는([얼굴]) 등 기법 면에서도 흥미로운 것들이 많다. 또 수사 과정에 대한 묘사나 세밀한 설정과 인용들은 세이초의 방대한 취재량과 풍부한 지식이 짐작되는 부분이다.

 

 

한편 우리가 외국 장르문학 작품을 볼 때 포기할 수 없는 것은 번역이다. 물론 해당 외국어능력은 기본이지만, 장르문학의 번역은 얼마나 학벌이 대단하고 교수 등 프로필이 화려한지는 상관없다. 장르에 대해 잘 이해하고 문장을 쉽고 감칠맛나게 풀어내야 한다. 그런 점에서 모비딕에서 펴내는 ‘세이초월드’ 번역의 대부분을 맡은 김경남의 <잠복> 번역은 퍽 마음에 들었다. 역사전문출판사였고 그 동안 임프린트를 따로 내지 않았던 역사비평사가 모비딕이란 장르문학 전문 임프린트를 만들고 장르문학 전문 출판사인 북스피어와 함께 세이초 선집작업을 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무척 의외였고 어떤 결과물들을 낼지 궁금했다. 특히 <잠복>의 경우 모비딕이 독자투자모금(북펀드)을 하며 자신감을 내비쳤던 만큼 어떨지 무척 기다렸던 책인데 기대가 무색하지 않을 만큼 한 편 한 편 주옥같고 흥미진진하였다. 사회파 미스터리가 가장 붐이던 시대에 만들어진 세이초 문학의 원형들이 담긴 <잠복>, 이후엔 어떻게 작품들이 발전하는지 계속 세이초를 탐닉하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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